일상과 축제의 경계
상태바
일상과 축제의 경계
  • 임재현
  • 승인 2014.08.12 11: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재규어는 지난 2011년 프랑크푸르트모터쇼에서 아름다운 콘셉트 카 1대를 선보였다. 긴 보닛, 짧은 리어 데크, 풍만하게 솟은 뒤쪽 숄더, 차체 옆면으로부터 뒤쪽 모서리를 휘감는 얇은 테일램프 등 고전미가 돋보인 C-X16이라는 이름의 이 콘셉트 카는 과거의 어떤 차를 연상시켰다. 바로 E-타입이다.

재규어 E-타입의 역사는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재규어의 설립자 윌리엄 라이온스가 직접 설계하고 1948년에 출시한 2인승 로드스터 XK120을 경량 튜브형 프레임과 알루미늄 차체 구조로 바꿔 경주차 C-타입을 만들었다. C-타입의 C는 ‘competition’의 앞글자로, C-타입은 ‘경주대회용’이라는 뜻이었다. 재규어는 1951년에 C-타입으로 르망 24시간 경주에 출전해 우승했고, 1953년에 또 한 차례 우승을 거뒀다. 이어 혁신적인 모노코크 구조의 후속 경주차 D-타입으로 1955년부터 1957년까지 3년 연속 르망 24시간 경주를 재패했다. C-타입과 D-타입의 영광을 계승해 1961년에 출시한 일반도로용 2인승(이후 2+2가 추가된다) 스포츠카가 E-타입이다.

항공기 엔지니어 출신인 말콤 세이어가 C-타입과 D-타입에 이어 디자인한 E-타입은 재규어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또한, 마르첼로 간디니가 디자인한 람보르기니 미우라와 함께 오늘날까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자동차’로 손꼽히기도 한다. 출시 당시 페라리 설립자인 엔초 페라리가 “지금껏 만들어진 자동차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뉴욕 현대미술관은 오팔색의 1963년형 E-타입 로드스터를 디자인 컬렉션에 포함시켜 1996년부터 영구 소장 중이다.

재규어는 C-X16 콘셉트의 양산형을 2012년 파리모터쇼에서 공개했다. XF, XJ 등 알파벳 X로 시작하는 다른 재규어 모델들과는 달리 ‘F-타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E-타입의 계보를 잇는 직계 후손임을 선언한 것이다. 사실 E-타입 후속모델에 대한 논의는 이전에도 있었다. 재규어는 지난 2000년 디트로이트모터쇼에서 F-타입 콘셉트를 공개한 바 있다. 아쉽게도 당시에는 양산화가 좌절됐고, 그로부터 12년이 지나서야 F-타입의 꿈이 실현됐다. F-타입은 컨버터블이 먼저 나왔고, 1년 뒤 2013년 LA모터쇼에서 쿠페가 추가됐다. 재규어에서 정통 스포츠카가 나온 건 1975년에 E-타입 단종된 지 근 40년 만이다.

E-타입의 DNA가 오롯이 담긴 F-타입 V8 S 컨버터블과 R 쿠페는 우아하고 매끈하며 고혹적인 자태를 뽐냈다. 오피스 건물로 밀집된 서울 도심 한 부분을 고풍스러운 1960년대 유럽 어딘가의 풍경으로 바꿔놓고 있었다. 주변의 시공간을 바꾼 이들 형제에 다가서서 리모컨 키의 열림 버튼을 누르자 도어 패널 속에 숨어 있던 손잡이가 스르르 나온다. 심미적인 목적도 있지만, 주행 시 차체 옆면으로 흐르는 공기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한 기능적인 목적이 더 크다. 악수를 청하듯 손잡이를 잡아당겨 F-타입 V8 S에 올랐다. 시트 높이는 생각보다 낮지 않아서 위화감이 없다. 부드러운 가죽을 입힌 스포츠 시트는 신체 형상에 꼭 맞았다. 심장 박동과 같은 비트로 붉은 빛이 반짝이고 있는 시동 버튼을 보면 함께 두근거리게 된다. 숨을 고르고 버튼을 누르자 우렁찬 배기음으로 주변의 공기를 흔들며 잠에서 깨어났다.

F-타입 V8 S의 긴 보닛 속에는 495마력을 발휘하는 V8 5.0L 슈퍼차저 엔진이 들어 있다. 앞쪽에 자리 잡은 엔진, 터보가 아닌 슈퍼차저, 네바퀴굴림이 아닌 뒷바퀴굴림…. 겉모습만큼이나 고전적인 구성이다. 등으로 전해지는 V8 엔진의 기분 좋은 고동을 느끼며 약간의 두려움과 설렘을 안고 차를 조심히 움직여봤다. 그런데 이 녀석, 생각 외로 편하다. 천천히 다닐 때는 거의 세단 감각이다. 스티어링 휠과 페달은 가벼우며, 변속은 부드럽게 진행된다. 승차감도 안락한 수준. 20인치 휠과 편평비가 30에 불과한 타이어를 달고도 승차감이 좋다. 골목길 과속방지턱을 지날 때도 전혀 부담이 없다. 요란하고 과격한 움직임을 예상하고 긴장했건만 너무 편안해서 싱거웠다. 단, 가속 페달 위에 올려놓은 오른발에 힘을 보태기 전까지.

가속 페달을 지그시 누르자 본색을 드러냈다. 방금 전까지 신사 같았던 차가 무시무시한 야수로 돌변했다. 주변의 대기는 V8 S가 내뿜는 배기음으로 밀도 있게 채워졌다. 센터콘솔에 있는 액티브 스포츠 배기 버튼을 누르면, 가변 배기 시스템의 바이패스 밸브가 열리며 더욱 크고 웅장한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흡사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공군의 주력기로 활약한 스핏파이어 소리 같은 독특한 배기음은 재규어 모터스포츠의 역사를 소리로 응축해 표현한다. 비단 가속 페달을 밟을 때만 극적인 것은 아니다. 가속 페달을 누르던 오른발에서 힘을 빼는 순간 오히려 드라마는 절정에 도달한다. 배기구에서는 정제되지 않은 원초적인 폭발음이 나는데, 1960년대 스포츠카에서 나던 바로 그 소리다!

차체는 부드러움을 잃지 않으면서도 기민하게 움직인다. 직선도로를 항속할 때는 안정적이고, 노면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굽이진 도로를 내달릴 때는 앞쪽에 대형 엔진을 단 차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기민하게 움직인다. 컨버터블이라고 해서 차체가 헐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 거대한 바윗덩어리를 깎아서 만든 듯 견고하다.

R 쿠페에는 V8 S와 같은 V8 5.0L 슈퍼차저 엔진이 들어간다. 대신 V8 S보다 55마력 높여 550마력으로 강화하고 R 배지를 달았다. R 쿠페의 최대토크는 3,500rpm에서 69.4kg·m이다. 2,500rpm에서 63.8kg·m을 발휘하는 V8 S보다 더 높은 엔진 회전수에서 더 강한 토크가 나온다. R 쿠페의 실내구성은 V8 S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래쪽이 평평한 D컷 스티어링 휠과 풀 버킷 타입의 퍼포먼스 시트 정도가 차이점. 스티어링은 V8 S보다 무겁게 세팅됐다. 뿌리가 같은 엔진을 나눈 V8 S와 R 쿠페의 결정적인 차이는 지붕의 유무다.

지붕은 차체 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부분인데, 재규어는 F-타입 쿠페의 차체 강성이 컨버터블보다 80% 강하다고 밝혔다. 정밀 계측기 없이 차체 강성의 차이를 몸으로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각 부품들의 체결감이나 조작감을 두고 차체 강성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의외로 시트 레일 같은 사소한 부품이 감각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런데 V8 S를 탄 뒤 R 쿠페를 타면 그 차이가 명확하게 느껴진다. 다만, 이는 단순한 느낌이므로 차체 강성 차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차체 강성감(感)이라고 해두자. 차체 강성감 측면에서 V8 S도 단단한 느낌이지만, R 쿠페는 그것을 한참 넘어선다. 덕분에 코너에서 한층 더 예리하고 민첩하게 움직인다. 앞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코너를 보며 조금 더 과감해진다.

다이내믹 모드를 경험할 준비가 됐다. 변속기 레버 왼쪽에 위치한 토글 스위치를 조작해 다이내믹 모드를 활성화하면 스티어링, 드로틀, 변속기, 차체 자세 안정 장치의 반응이 한 번에 바뀐다. 물론 차량 설정 메뉴를 통해 각각 개별적으로 설정할 수도 있다. 다이내믹 모드로 꽉 조여진 하체와 날카롭게 변한 응답성으로 무장한 R 쿠페를 몰고 코너를 향해 돌진했다. 코너 진입에 앞서 변속기를 수동 모드로 바꾼 뒤 강한 브레이킹과 함께 기어 레버를 앞쪽으로 두 번 밀었다. 우렁찬 소리가 지축을 흔들며 2단 아래로 빠르게 변속됐다. F-타입의 기어 레버는 앞쪽으로 밀면 시프트 다운, 뒤쪽으로 당기면 시프트 업이다. 이는 대부분의 차와 반대되는 구성으로 BMW와 같은 방식이다. 인지심리학적으로 위가 +, 아래가 -인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실제로 스포츠 주행을 하는 상황에서 시프트 다운은 감속과 함께, 시프트 업은 가속과 함께 이뤄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관성을 거스르지 않도록 위가 -, 아래가 +인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동작을 유도한다.

브레이킹 뒤에 스티어링을 꺾고 가속 페달 조작 없이 타력으로 돌아봤다. 충분히 속도를 줄이지 않았는지 타이어가 약간의 마찰음을 냈다. 언더스티어 현상을 보이나 싶더니 결국엔 의도대로 돌아나갔다. 다음에는 코너의 정점을 지나며 가속 페달을 슬며시 밟아봤다. 뒷바퀴가 바깥쪽으로 약간 미끄러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네바퀴굴림 차와 같은 움직임으로 깔끔하게 돌아나갔다. 이후 여러 차례 비슷한 시도를 반복했는데 매번 같은 반응이었다. 토크 벡터링과 전자식 액티브 디퍼렌셜이 위화감 없이 작동되며 코너링 성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다. 550마력의 막강한 힘을 뒷바퀴에만 전달하는 자동차라고 생각하기 힘든 움직임이다. R 쿠페는 예상보다 훨씬 우수한 회두성과 뒷바퀴의 추종성을 보여줬다. 더욱 과감히 몰아붙여보고 싶은 욕구가 강했지만 일반도로에서는 무리. R 쿠페의 진가를 확인하려면 역시 서킷에 가야 할 것 같다.

R 쿠페의 서스펜션은 기본적으로 V8 S보다 단단하게 설정돼 있다. 하지만 일상주행 중에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과하지는 않으며, 스포츠 주행 시 부드러움을 잃지 않으면서 차체를 수평으로 유지시켜주는 능력이 뛰어나다. F-타입은 코너링 성능을 위해 평소에 불편을 감내할 필요가 없는 차다. 노면 상태나 속도, 혹은 주행 상황과 상관없이 F-타입의 승차감은 언제나 일관성 있게 쫀득함을 유지한다. 토크 컨버터 방식의 8단 변속기는 빠르고 정확하게 작동한다. 수동 모드에서는 7,000rpm 너머 레드존에 들어가도 다음 단으로 강제 변속되지 않는다. 운전자에게 최대한 자유를 부여한 세팅이다. 다이내믹 모드에서 가속 페달을 바닥에 붙이면 시속 260km 언저리에서 6단으로 변속된 뒤 가속이 다소 더뎌진다. 이때 엔진 회전수는 5,000rpm을 조금 상회하는 수준. rpm 상승 속도로 짐작컨대 최고시속은 6단에서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R 쿠페의 최고시속은 300km에서 제한된다고 한다.

속도를 줄이자 방금 전까지 포효하며 맹렬히 돌진하던 야수가 언제 그랬냐는 듯 온화한 신사로 바뀐다. V8 S와 R 쿠페의 매력은 운전자의 의도에 따라 바뀌는 성격의 극적인 대비에 있다. 물론 R 쿠페가 더욱 강렬하지만, V8 S도 그에 못지않다. 가속 페달에 얹은 오른발의 움직임만으로 고급 세단과 슈퍼스포츠카 사이를 오가며 일상과 축제의 경계를 넘나든다. 레이몬드 챈들러 추리소설 시리즈의 주인공 필립 말로가 떠오른다. 1958년에 출간된 레이몬드 챈들러의 유작 〈플레이백〉에서 필립 말로는 “어떻게 터프한 남자가 이토록 상냥할 수 있나”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터프하지 않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고, 상냥하지 않다면 살아갈 자격이 없다.” 재규어와 F-타입 얘기 같다.

글 · 임재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