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정책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 FIA 회장 장 토드와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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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정책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 FIA 회장 장 토드와의 인터뷰
  • 짐 홀더
  • 승인 2014.07.16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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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토드(Jean Todt)는 FIA의 운영을 위해 승리를 거두던 세계챔피언 팀을 떠났다. 모터스포츠와 자동차 정책을 다루기 위해서다. 그가 짐 홀더(Jim Holder)와 그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국제자동차연맹(FIA) 회장 장 토드의 책상 뒤에는 사진 8장이 걸려 있었다. 그 환상적인 생애의 핵심적인 순간이 담겨 있었다. 그의 사회활동 기간에 랠리 코-드라이버로 시작하여 WRC에서 르망을 거쳐 스포츠카와 F1의 세계 타이틀을 휘어잡은 선두팀에서 활약했다. 게다가 지금은 파리와 제네바에 본거를 둔 모터스포츠와 로드카 입법기관에서 최고위직을 맡고 있다.

한데 내 눈길을 끌고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첫 번째 사진이었다. 나는 그걸 장 토드와의 인터뷰 끝으로 돌렸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것에 비하면 부수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뻔하기 때문에 나를 바보라고 생각할까 두려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실은 그의 표정이 활짝 밝아졌다. “왜 짐 클라크의 사진을 벽에 걸어두고 있느냐?” 내가 물었다.

토드는 서로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것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절친한 친지가 아니면 따뜻한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드물었다. 결국 이 사람이야말로 스포츠적인 배려를 접어두고 동전을 던져 드라이버를 골라 파라-다카르 랠리 결과를 결정한 인물이었다. 그의 송곳 같은 정신자세가 페라리를 사랑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오랜 승리 가뭄에 뒤이어 잇따른 성공을 앞장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토드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짐 클라크는 내 영웅이었다. 저 사진은 모터스포츠를 향한 나의 정열에 불을 댕겼음을 알려주고 있다. 나는 의사의 아들이었고, 모든 자동차를 사랑했다. 나이 15살 또는 16살에 챔피언 드라이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재정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없었다. 따라서 코-드라이버로 기회를 잡았다.”

그는 파리에서 실업학교에 다니면서 처음에는 아버지의 미니로 레이스에 나갔다. 토드는 이 취미를 직업으로 바꾸고 싶었다. 오래지 않아 성공이 찾아왔다. 토드는 WRC의 최상급에서 코-드라이버로 활약했고 폭넓은 레이스에서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초기부터 그를 돋보이게 한 것은 내비게이터를 넘어서는 생활에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

“코-드라이빙은 결코 필생의 활동이 아니었다. 거기서 시작해 35세쯤까지 그 일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 팀 감독이 되려는 목표를 세웠다” 그렇다, 그는 일생 중 일대 전환점을 맞았다. 타이틀을 딴 탈보 팀에서 드라이버 부문 랭킹 2위로 시즌을 끝낸 직후였다

“푸조 CEO 장 브와이요가 자기 회사의 스포츠 부문을 운영해달라고 불렀다. 우리는 랠리, 내구 랠리와 내구 레이스에서 성공했다. 한데 나는 거기서 생애를 마칠 작정이 아니었다. 스포츠 부문이 아니라 운영이나 마케팅 부문으로 옮기고 싶었다. 내 야망은 회사에서 무언가 다른 일을 할 기회를 찾는데 쏠려 있었다.”

그때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F1 총책 버니 에클레스턴과 대화를 나누다가 루카 디 몬테제몰로와 통화를 하게 됐다. 몬테제몰로는 페라리 레이스팀을 이끌 사람을 찾고 있었다. 토드는 자기 미래는 모터스포츠 밖에 있다고 마음을 굳혔지만 마라넬로의 도전을 받아들이려는 욕망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페라리는 달랐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다, 나는 여전히 모터스포츠에 몸을 담고 있었다. 한데 F1의 팬에게는 페라리가 그보다 훨씬 큰 무엇이었다. 내가 꿈을 꾸거나 희망한다고 찾아올 기회가 아니었다”

이때 토드는 꾸준히 성공할 수 있는 근성을 드러냈다. “페라리에서 성공하기는 어렵다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거기 무엇이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면밀히 살펴봤다. 그 자리에 기껏 2년 있으면 다행이라고 했지만 그보다 더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하지만, 남들이 할 수 없다고 하는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되자 한층 결의가 굳어졌다. 결국 나는 16년을 머물렀고, 수많은 성공을 거뒀다.”

2009년 그 시기는 끝났다. 토드는 서서히 페라리에서 물러났고, 후계자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여유를 줬다. 자기 생애의 우선순위가 바뀌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또다시 세계 타이틀을 잡는 게 내가 도전해야 과제는 아니었다. 타이틀을 따지 못한다면 실패였다. 그리고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기껏 본전이었고, 최악의 경우 참담한 굴욕이었다. 나는 날마다 승리에 집착하는 생활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좀 압력을 덜고, 무언가를 돌려주고 싶었다. 개인적인 목표에 너무 오랫동안 집착하고, 그 목표를 달성할 행운을 누렸다. 그러면 무언가를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 과정은 이미 시작됐다. 토드는 모터스포츠 활동시절에 뇌‧척수연구소를 세웠다. “사양 교수가 연구소를 이끌었다. 내 측근과 일하던 그를 만났다” 토드가 말했다. 그와 함께 연구소를 창설한 동지의 한 사람이 미하엘 슈마허였다. 그들은 함께 연구소를 오랫동안 후원했다. 현재 사양은 스키 사고로 의식을 잃은 슈마허 치료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FIA를 운영할 기회가 왔을 때 토드는 또다시 인생의 전기를 맞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이처럼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한데 무엇을 하든 내 모든 정력을 쏟아 붓고 있다. FIA는 145개국의 250개 클럽으로 이뤄졌다. 나는 그들 모두와 함께 일하고 있다. 그 일만으로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6주일을 보내야 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오늘까지 토드의 회장 활동은 전임자 막스 모즐리보다 훨씬 폭이 넓어 주목을 받고 있다. 가령 그는 스포츠카 월드 챔피언십을 창설했고, 랠리크로스를 전례 없이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1인승 레이스의 복잡한 위계를 해결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또한 가장 두드러진 사업이 있다. 그는 FIA의 도로안전과 교통 프로젝트를 힘차게 밀었다. 그래서 매스컴의 주목을 받으려 허둥대던 활동에 자연스럽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처음 회장에 취임했을 때 도로안전이나 교통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받은 적이 없었다. 요즘은 늘 질문을 받는다” 그는 FIA의 역할을 선명하게 금을 긋기는 어렵다고 인정했다. 회원조직을 통해 로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은행, 세계보건기구, 유엔, 각국 정부 등등과 협력해야 한다. 그리고 한층 직접적으로 활동한다. 무상원조를 제공하고 각종 기업이 우리와 함께 일하도록 설득한다” 토드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 과제는 얼마나 폭이 넓은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일부 국가는 교통정책에 역점을 둔다. 다른 국가는 그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우리 역할은 그들을 각성시키고 도와주는 데 있다. 각성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에이즈 퇴치운동을 보라. 30년 전에는 바이러스가 존재한다는 것만 알았을 뿐 어떻게 싸울지를 몰랐다. 이제 완치할 수는 없어도 치료하는 방법은 알고 있다. 적어도 도로안전에 대해서는 완치법을 정확히 알고 있다.”

토드는 선진국의 도로 사망 통계를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근거로 내놨다. 앞으로 자동차 숫자가 점차 늘어나기 때문에 사상자가 줄기보다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시인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FIA가 수천수만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말하면 미친놈으로 볼 거다. 도로안전이라는 난제는 서로 다른 수많은 해법을 요구한다. 어느 나라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교육이 중요하다. 안전띠를 매거나 헬멧을 쓰는 일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사고를 줄일 자동차 기술일 경우도 있다. 안정컨트롤에서 장차 완벽한 자율 자동차에 이르는 첨단기술이 필요하다. 어느 사회나 많은 해답을 갖고 있다. 하지만 개별 국가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게 열쇠다.”

FIA에서 안전은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에 관련된 문제의 일부일 뿐이다. 그와 동시에 다양한 문제의 해법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가령 전 세계적으로 장애 운전자들을 위한 푸른 배지 보급사업이 그중 하나다. 거기서 나아가 세계적으로 연료절약 운동을 벌이고, ‘안전하고 지속가능하며 접근하기 쉬운 교통체계’ 확산운동을 벌이고 있다.

불가피하게 토드는 이런 분야에서 모터스포츠의 역할을 찾고 있다. “F1은 어떤 문제를 널리 인식시킬 수 있는 대단히 훌륭한 무대다” 토드는 FIA의 도로안전 행동 캠페인을 가리켜 말했다. 아울러 F1의 신형 터보 엔진을 연료절약 기술을 전파하는 수단으로 거론한다. 그리고 올해 9월 베이징에서 창설개막전을 여는 포뮬러 E에 격찬을 보냈다. 도시에서 전기차 교통을 확산하는 선구적 노력으로 평가했다(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시내에서만 하기로 했다. 제 정신이라면 당장 파리에서 런던까지 전기차 레이스를 하자고 제안할 사람은 없으니까”).

토드는 올해 67세. 대다수는 인생을 되돌아보고 만년에 대비할 때지만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무엇을 하든 제대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복잡한 조직안의 복잡한 일이다. 나는 선거를 통해 임명됐고, 250개 클럽을 대표한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을 즐기고, 전임자와는 다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장 토드의 약력
1966년 아마추어 코-드라이버로 데뷔
1969년 직업적인 코-드라이버로 생애 시작
1981년 월드 랠리 챔피언십(WRC) 랭킹 2위. 1954년 WRC 데뷔 이후 4승
1982년 푸조 레이싱 감독 취임
1984년 푸조 팀을 이끌고 WRC 복귀. WRC 데뷔와 동시에 연속 2년 타이틀 쟁취
1987년 그룹 B 랠리 폐지에 따라 푸조 205 T16은 오프로드 랠리 경기로 전향. 파리-다카르 랠리에서 4연속 우승
1992년 푸조 팀을 이끌고 르망 24시간 우승. 뒤이어 1993년 르망 24시간 1-2-3위
1993년 페라리 총감독 승진
2000년 페라리 팀에서 첫 F1 세계타이틀 획득. 미하엘 슈마허를 앞세워 4회 타이틀을 휘어잡고, 키미 라이코넨이 타이틀을 하나 추가했다. 아울러 8회에 걸쳐 워크스팀 타이틀을 따냈다
2004년 페라리 CEO 취임
2009년 페라리를 완전히 떠나 FIA 회장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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