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인 성능, 제로백의 세계
상태바
원초적인 성능, 제로백의 세계
  • 나윤석 칼럼니스트
  • 승인 2016.05.31 10: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성능을 상징하는 광고. 단순한 것에서만 느낄 수 있는 원초적인 흥분의 본능. 제로백의 세계에는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열정이 공존한다

0→시속 100km 가속(0→ 100km). 일명 ‘제로백’. 지역에 따라서는 0→60mph. 정확하게는 발진 가속 성능 시험. 자동차 경주의 세계에서는 드래그 레이스(Drag race).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또는 60마일)까지 최대한 빠르게 가속하는 시험이다. 이처럼 아주 단순한 시도가 사는 지역, 보는 관점, 하는 목적 등에 따라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비추어지는 경우도 흔하지 않다. 자동차 제작자들에게는 개발한 모델의 동력 성능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되고, 마케터들에게는 해당 모델의 고성능을 상징하는 훌륭한 광고 거리이며, 자동차 애호가들에게는 자신의 차량을 과시할 수 있는 마초적인 방법이 된다. 단순한 것에서만 느낄 수 있는 원초적인 흥분의 본능. 불과 십 여 초 또는 몇 초 동안 분출되는 아드레날린의 홍수 뒤에 남는 것은 순수한 카타르시스.
 

그런데, 포르쉐 918 스파이더가 세상을 뒤집어놓았다. 2.5초. 역사상 가장 빠른 0→100km 기록이었다. 라 페라리나 베이론까지 다 물리친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놀랐던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것은 차량과 노면의 상태만 확실하다면 우리 같은 일반인도 이 기록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유명한 해외 자동차 평론가 한 명은 콜라를 마시면서 같은 테스트를 하는 동영상을 온라인에 올리기까지 했었다. 차종은 달랐지만 적용된 기술은 같았다.


포르쉐 918 스파이더, 정확하게는 포르쉐의 론치 컨트롤(launch control)은 엔지니어들에게는 승리였지만 마니아들에게는 배신이었다. 드래그 레이스에서 레이서를 지워버린, 즉 뜨거운 가슴이 들어가 앉을 자리를 없애버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콜라를 마시면서도 이길 수 있는 드래그 레이스라면 그것은 자율주행차, 아니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시속 1,000km에 육박하는 속도에서 스테이크를 먹고 침대에서 잠드는 여객기보다 나을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제로백의 세계에는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열정이 공존한다. 지금부터 그 세계를 알아보도록 하자.
 

제로백의 의미
자동차의 성능은 ‘얼마나 빠른가’를 뜻하는 동력 성능, ‘얼마나 말을 잘 듣는가’를 뜻하는 조종 성능, 그리고 ‘얼마나 잘 멈추는가’를 의미하는 제동 성능의 세 종류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동력 성능의 주요 지표는 최고속도와 가속 성능으로 나눌 수 있다. 제로백은 가속 성능 중에서도 정지 상태의 차량이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 것, 즉 발진 가속 성능에 해당된다. 이외에도 가속 성능에는 일정 속도로 주행하다가 앞 차량을 추월할 때처럼 가속페달만 밟아서 가속하는 추월 가속 성능, 그리고 가속페달을 밟지 않고 브레이크만 해제하여 차가 굴러가는 상태에서 급가속을 시도하는 일명 ‘롤링 스타트’가 있다.


최고속도는 차량이 만들어내는 에너지와 반대로 차량이 외부로부터 받는 각종 저항이 같아져서 더 이상 속도가 올라가지 않는 지점에서 결정된다. 즉, 속도는 에너지 대 에너지의 대결인 것이다. 자동차에서 만들어지는 에너지는 엔진의 마력이다. 마력은 마치 ‘힘’을 뜻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물리학적으로는 힘이 아니다. kW, 즉 일률 또는 에너지이다. 혼동하지 말자.
 

사실 엔진의 출력 가운데 진짜 힘은 토크다. Nm 또는 kg.m/s2의 단위를 사용하는 토크는 그 단위 자체가 ‘몇 kg짜리 물체를 몇 초 만에 초속 몇 미터의 속도까지 가속하느냐’라는 뜻을 갖고 있다. 즉, 글자 그대로 가속 성능은 차량의 중량, 그리고 토크와 직결된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변속기와 최종 감속기에서 결정되는 기어비다. 감속이 크면 바퀴로 전달되는 토크는 더 커지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요소는 타이어와 노면 사이의 접지력이다. 바퀴로 전달된 토크가 차체를 가속하는 데에 사용되지 못하고 휠 스핀으로 낭비된다면 당연히 가속 성능은 떨어진다. 또한 접지력과 가속 시의 안정감을 위하여 서스펜션을 비롯한 섬세한 튜닝도 필수적이다. 여기까지가 자동차 제작사와 소속 엔지니어들이 책임지는 영역이다.


하지만 드라이버의 영역이 남아 있다. 출발 신호에 얼마나 빠르게 반응하고, 얼마나 재빠르게 그러나 휠 스핀이 과하지 않게 클러치를 연결하며, 얼마나 동력의 단절을 최소화하며 매끄럽게 변속하는가 등은 빠른 기록을 위하여 운전자가 책임져야 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차가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나가려 할 때도 이를 미리 억제하지 못하면 최소한 나쁜 기록이고 최악은 대형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바로 이런 위험을 책임지고 섬세한 조절로 단 몇 초 만에 결판나는 승부를 드라이버가 책임진다는 것이 제로백의 원초적 쾌감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또한 제로백은 체감할 수 있는 성능의 지표라는 점에서 더욱 친근하다. 제원표 상의 최고시속이 200km를 넘는 차들은 이제 드물지 않다. 하지만, 그 속도를 실제로 체험하는 것은 불법이거나 매우 위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실제로 느껴볼 기회가 거의 없다. 하지만, 가속 성능은 극단적인 제로백이 아니더라도 신호등 앞에서 출발할 때처럼 일상생활에서도 실제로 체험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다. 또한 가속 성능이 좋은 차는 손쉽게 교통의 흐름을 따르거나 앞 차를 추월할 수 있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운전하기에 편리하고 안전하다. 한가한 도로에서 열리는 사설 드래그 레이스가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을 정도로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제로백 또는 발진 가속 성능의 의미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동차의 동력 성능을 판단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최고시속에 비해 소비자들이 직접 체험하기 쉽고 실생활에서 실용적이기도 하다.
-짧은 순간에 강렬한 흥분을 느낄 수 있는 원초적 쾌감의 세계이다.
 


지역적 특징
드래그 레이스는 미국이나 호주 등 영국 연방 지역에서 인기가 높다. 지형적으로 넓고 평평한 곳, 그리고 큰 소음에도 문제가 없을 한적한 지역을 쉽게 찾을 수 있는 나라에서 주로 발달한 것이다. 또한 드래그 레이스와 더불어 자동차 경주도 높은 속도와 그 속도에서의 한계 주행 안정성을 다투는 타원형 오벌 트랙 레이스인 인디카 레이스와 스톡카 레이스가 대표적이다. 이에 비해 산악 지형이 많은 유럽은 다양한 코너들이 포함되는 경주용 트랙에서 정교한 조종 성능과 급제동 및 급가속을 주로 사용하는 포뮬러 및 투어링카 레이스가 발달하였다. 1960년대에 미국으로부터 드래그 레이스가 도입되기는 했으나 크게 대중화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유럽에서도 드래그 레이스가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미국처럼 정식 드래그 스트립에서 이루어지는 공식 드래그 레이스는 아직 많지 않지만, 폐쇄된 공항 활주로 등에서 약식으로 이루어지는 스타일의 경주가 점차 대중화되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대부분의 고성능 스포츠카들과 스포츠 세단들이 유럽에서 만들어지고 있으며, 둘째 기술의 발전으로 이전보다 훨씬 고성능임에도 차량을 다루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그리고 셋째로 유튜브 등의 인터넷 동영상 매체의 발달로 개인 미디어가 활발해지면서 자기 차가 얼마나 빠른가 제로백 계기반 영상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일반인들끼리 모여서 누구 차가 더 빠른가 서로 경쟁하는 장면을 인터넷에 올리는 사이트와 동영상 채널도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고성능이면서 운전하기 쉬운 차와 인터넷이 만난 오늘날, 이제 제로백은 전 세계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경쟁하고 즐기는 매우 대중적인 자동차 놀이의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를 평가하는 기준으로는 드래그 레이스가 인기가 높은 지역에서는 여전히 0→100km 또는 0→60mph의 발진 가속 성능, 또는 시속 100마일까지 가속했다가 정지할 때 필요한 시간과 거리를 측정하는 ‘0→100→0’이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사용된다. 이에 비하여 유럽 등지에서는 뉘르부르크링 노르트슐라이페나 호켄하임링의 숏코스처럼 표준 서킷을 정해놓고 랩타임을 비교하는 것이 여전히 더욱 인정받고 있다.

 


시대별 제로백 발전사
제로백을 측정하는 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최고속도가 시속 100km를 훨씬 넘어야 한다. 이런 기준을 충족시킨 최초의 브랜드는 미국의 고성능 럭셔리 브랜드였던 듀센버그(Duesenberg)였다. 직렬 8기통 6.9L 엔진으로 최고출력 265마력을 발휘했던 1928년식 듀센버그 모델 J는 최고속도 119mph(192km)와 11초대의 0→60mph 가속 성능을 기록했고, 슈퍼차저가 추가된 모델 SJ는 최고출력 320마력으로 최고속도 약 140mph(225km), 0→60mph 가속 성능 약 8초를 보였다. 1930년대에는 최고속도가 시속 100km를 넘지 못하는 차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듀센버그가 얼마나 고성능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2차대전이 끝난 뒤, 재규어와 애스턴 마틴 등 영국의 럭셔리 스포츠카 브랜드들은 전성기를 맞는다. 애스턴 마틴 DB4GT는 1950년대의 제왕이었다. DOHC 직렬 6기통 3.7L 엔진은 314마력으로 1,200kg의 가벼운 차체를 최고속도 153mph(246km), 0→60mph 가속 성능 6.1초로 맹렬하게 몰아붙였다. 1960년대 이후는 페라리를 필두로 슈퍼카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페라리 365 ‘데이토나’는 드디어 제로백 5초대에 진입하였고 최고속도는 280km를 능가했다. 이전 세대의 경량 스포츠카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절대적 고성능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적당한 중량으로 뒷바퀴의 접지력을 강화하고 더 높은 출력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다.
 

1980년대는 페라리 F40과 포르쉐 959로 대변되는 슈퍼카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두 모델 모두 400마력 이상의 터보 엔진으로 F40은 최고속도 200마일의 벽을, 포르쉐 959는 제로백 4초의 벽을 최초로 허물었다. 하지만 레이싱 카의 도로 주행용 버전과 같은 F40과 각종 첨단 기술로 무장한 959는 그 설계 사상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특히 959의 사륜구동 시스템 채용은 아우디 콰트로와 더불어 이전에는 오프로드용으로만 간주되었던 사륜구동 시스템이 자동차의 고출력화에 의한 접지력의 한계를 해결하는 해결책을 제시한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21세기 들어서는 제로백 4초를 위협하는 세단들이 드물지 않다. 해치백 모델들도 5초대를 기록하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엔진의 고출력화다. 해치백 모델들이 300마력대, 세단들은 500마력대 이상의 모델들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두 번째는 듀얼 클러치 변속기의 대두다. 자동변속기의 편리함에 수동변속기보다도 민첩한 변속으로 끊김 없는 가속을 가능케 했다. 세 번째는 단연 사륜구동 시스템의 대두다. 네 번째는 론치 컨트롤이다. 론치 컨트롤의 순기능은 기록 단축과 위험 감소인 반면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운전자의 역할을 극단적으로 축소시켰다. 
 

미래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제로백 진화의 다음 단계는 전기모터다. 테슬라 모델 S P90d, 그리고 포르쉐 918 스파이더와 페라리 라 페라리, 맥라렌 P1 등의 하이브리드 슈퍼카들이 보여준 맹렬한 발진 가속의 이면에는 내연 기관이 흉내 낼 수 없는 전기모터의 즉각적인 응답성과 강력한 저속 토크가 있다. 이런 고성능 모델이 아니라 우리 근처의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타보면 전기모터의 도움으로 초기의 발진 가속과 추월 가속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쉽게 체험할 수 있다. 포르쉐 918과 BMW i8, 렉서스 RX 하이브리드 모델들은 사륜구동 시스템을 구성하면서 프로펠러 샤프트를 사용하지 않는다. 엔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바퀴는 모터가 독립적으로 구동하기 때문이다. 즉, 전기차는 뛰어난 응답성과 강력한 저속 토크에 더하여 이제는 우수한 발진 가속 성능에 필수적 요소가 되어버린 사륜구동 방식을 손쉽게 구축할 수 있다는 장점까지 있는 것이다.

자동차의 미래가 자율주행차 등에 의하여 재미가 없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비록 엔진 소리는 사라지거나 인공의 것으로 대체될지라도, 맹렬한 가속감은 더욱 강렬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