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세데스-벤츠 T 80, 도전 기회를 놓친 지상 최고속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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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벤츠 T 80, 도전 기회를 놓친 지상 최고속도의 꿈
  • 임재현 에디터
  • 승인 2015.06.16 0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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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인한 국가적 어려움 속에서 집권에 성공한 아돌프 히틀러는 자동차 경주를 적극 장려했다. 그는 경주대회 우승을 통해 독일 기술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독일 국민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했다.

히틀러가 총통에 오른 1934년부터 메르세데스-벤츠와 아우토 우니온은 각종 경주대회에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전통의 강호들을 꺾으며 모터스포츠 세계를 지배했다. 독일이 각종 경주대회에서 우승컵을 쓸어 담고 있을 때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영국인 말콤 캠벨이 지상 최고속도 기록을 매년 경신하고 있었다.

캠벨은 1932년 사상 처음으로 시속 250마일(시속 402km)의 벽을 깨며 영국 왕 조지 5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1935년에는 시속 300마일(시속 483km)의 벽마저 처음으로 넘었다. 이에 자극받은 독일은 지상 최고속도 기록용 자동차인 레코르트바겐(rekordwagen) 개발에 나서게 된다.
 

1936년 8월, 당시 아우토 우니온 엔지니어였던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와 아우토 우니온 소속 경주선수 한스 슈툭은 빌헬름 키셀 다임러-벤츠 회장을 설득해 레코르트바겐 개발계획을 성사시켰다. 히틀러는 국가적 자존심이 걸린 속도 경쟁에서 영국을 누르고자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메르세데스-벤츠 T 80(타입 80)이다.

T 80의 설계를 맡은 포르쉐 박사는 처음에는 시속 550km를 목표로 정했다. 그러나 영국인 조지 유스턴이 1937년 미국 보네빌 평원에서 시속 500km를 넘고, 1938년에는 시속 560km에 가까운 기록을 수립하자 목표를 시속 600km로 올려 잡았다.

차체는 공기역학에 최적화한 형태다. 폐쇄형 콕핏, 낮은 보닛, 물방울 모양의 펜더, 트윈 테일핀, 한 쌍의 날개가 특징이다. T 80의 공기저항계수는 0.18에 불과한데, 이는 양산차 가운데 공기저항계수가 가장 낮은 폭스바겐 XL1(2013년 출시)의 0.19보다 낮은 수치다.
 

엔진은 독일 주력 전투기 메서슈미트 Bf 109에서 가져왔다. Bf 109의 다임러-벤츠 DB 601 엔진을 개량한 V12 44.5L DB 603은 최고출력이 자그마치 3,452마력이었고, 엔진 무게만 807kg에 달했다. 연료는 메탄올 63%, 벤젠 16%, 에탄올 12%, 기타(아세톤 4.4%, 니트로벤젠 2.2%, 항공용 휘발유 2%)를 혼합한 특제연료를 사용했다. 연료를 가득 채웠을 때 T 80의 무게는 2.9톤에 육박했다.

동력은 유압식 토크 컨버터를 통해 총 6개 바퀴 중 4개로 전달되는 구조. 트랙션 확보를 위해 앞뒤 바퀴 4개에는 각각 기계식 휠 스핀 방지장치를 달았다. 개발이 끝났을 때 T 80의 최고시속은 당초 목표보다 훨씬 빠른 750km로 추정됐다. 총 개발비는 60만 마르크(현재 화폐가치로 약 450억원)였다.
 

T 80의 기록 주행은 보네빌에서 이뤄질 계획이었다. 하지만 T 80을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히틀러는 독일 영토를 고집했다. 결국 장소는 베를린 서남쪽 데사우 인근의 평평하고 곧게 뻗은 아우토반의 10km 직선구간으로 결정됐다. 시기는 1940년 1월로 정했다.

그러나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해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T 80의 기록 도전의 꿈은 좌절됐다. 이후 T 80은 엔진이 제거된 뒤 1940년 2월에 오스트리아 남부 케른텐의 창고로 옮겨졌고, 종전 후 연합군에 의해 발견되기까지 무사했다. 현재 T 80은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벤츠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전시공간에는 차체만 놓여 있고, 섀시는 박물관 창고에 별도로 보관 중이다.

글 · 임재현 에디터 (jlim@iautoca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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