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혜의 영화와 자동차] 보이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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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의 영화와 자동차] 보이후드
  • 신지혜
  • 승인 2015.01.1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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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후드 - 아빠의 페라리 GTO, 엄마의 볼보240 D, 돌아보면 반짝이는 우리의 유년기

메이슨 주니어는 이제 여섯 살. 메이슨에게 장난을 치고 시침을 뚝 떼는 누나 사만다와 일과 학업을 병행하느라 늘 바쁘고 힘든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 남매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놀아주는 아빠는 현실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게다가 엄마의 일 때문에 자주 이사를 다녀야 하는 메이슨은 언제부턴가 외로운 시간을 보내며 조금씩 성장해 간다.

12년의 시간 속에서 사만다는 똑똑하고 자립심 강한 소녀로 성장해 나가고 메이슨 주니어는 고독을 품은 내향적인 소년으로 자아를 확립해 간다. 12년의 시간 속에서 지적이고 매력적인 엄마는 몇 명의 새 아빠와 함께했지만 결국 홀로 남게 되고 12년의 시간 속에서 비현실적인 몽상가였던 아빠는 새로운 결혼으로 평범하고 현실적인 가장이 된다. 그리고 문득 돌아보았을 때 12년의 시간이 흘러 있고 아이들은 성장했으며 아빠와 엄마는 서로의 삶을 찾아가며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고 세월의 흔적이 쌓인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12년이다. 이 영화가 시작되어 관객들에게 보이기까지 걸린 시간이 말이다. 물론 영화 속 시간도 12년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메이슨 역을 맡을 꼬마 엘라 콜트레인과 사만다 역을 맡을 자신의 딸 로렐라이 링클레이터와 함께 엄마 아빠가 될 패트리샤 아퀘트와 에단 호크를 섭외해 12년간에 걸쳐 영화를 찍었다. 그 시간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영화를 보면 그 시간이 주는 힘이야말로 실로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 꼬마들과 그 어른들이 일 년에 며칠씩 모여 몇 개 장면씩 찍어 완성했다는 이 영화 〈보이후드〉는 글자 그대로 누군가의, 우리의, 나의 유년기이다. 누구나에게 유년기는 있고 슬쩍 돌아보았을 때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장면들이 있지 않은가. 영화는 더도 덜도 아니고 딱 그 지점에서 영화를 보는 우리 모두와 동화되어 버린다.
 

영화 속에서 엄마와 아빠의 성격과 삶에 대처하는 방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그들 각자의 자동차다. 영화의 시작, 풀밭에 누워 하늘을 보는 꼬마 메이슨의 귀엽고 섬세한 얼굴은 곧 엄마의 부름으로 현실로 돌아와 엄마의 차에 탄다. 오래도록 아이들을 학교로 데려다주고 함께 쇼핑을 하고 엄마의 직장을 오가며 엄마와 메이슨과 사만다의 일생의 일부분을 함께했을 이 차는 볼보 240 DL이다. 이미 새 차가 아닌 볼보, 아마도 아이들이 더 어렸을 때부터 타왔을 볼보, 그 볼보는 이미 아이들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담고 있다.

어쩌면 엄마와 아빠가 가정을 이루었을 그 즈음부터의 기억이 묻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빠와 헤어지고 경제적으로도 넉넉지 않은 지금, 공부와 일을 병행해야 하는 싱글맘의 입장에서 새 차를 구입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았을 테다. 그래서 엄마의 차는 메이슨과 사만다가 꽤 클 때까지 조금은 낡아버린 볼보 240 DL이다.
 

메이슨은 아빠의 차를 탐낸다. 좀 낡긴 했지만 유선형의 모습이 날렵하고 세련된 페라리 GTO. 아빠는 어린 메이슨에게 열일곱 살이 되면 차를 주겠다고 했고 소년은 그 말을 간직했지만 정작 소년이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아빠는 그런 말쯤 까맣게 잊은 지 오래고 GTO를 팔아버렸다. 분명 그 GTO는 아빠의 형편에 어울리지 않는 차였겠지만 그래도 아빠는 하고 싶은 걸 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영혼이었기에 일주일에 한번 아이들을 GTO에 태우고 삶을 즐겼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중산층의 모습을 갖추며 아빠는 GTO를 처분하고 자신의 가정에 걸맞은 새 차를 탄다.

엄마의 낡은 볼보와 아빠의 GTO는 이제 소년과 소녀의 유년기의 기억 속에 묻힌 차. 마치 돌아보면 ‘이런 때가 있었지. 이런 게 있었네’ 정도의 오브제가 되어버렸지만 그 또한 소년과 소녀의 유년기를 채워준 기억이 아니겠는가.

글 · 신지혜 (시네마토커, CBS-FM [신지혜의 영화음악] 제작 및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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