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상을 향한 롤스로이스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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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정상을 향한 롤스로이스의 도전
  • 힐튼 홀로웨이 (Hilton Holloway)
  • 승인 2015.10.2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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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스로이스의 품질에 관한 명성은 오리지널 실버 고스트로부터 시작됐다. 특히, 1907년 고난이도의 스코틀랜드 내구 레이스에서 성공을 거두며 명성은 한층 올라갔다. 우리는 최신형 고스트와 함께 다시 옛길을 찾았다 
 

1907년, <오토카>는 겨우 열두 살이었고 영국의 자동차산업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해 7월, <오토카>에서는 당시 롤스로이스의 우수한 제작기술을 증명한 행사를 직접 취재했다. 

당시 롤스로이스는 무려 4일에 걸쳐 진행된 스코틀랜드 내구 레이스(Scottish Reliability Trial)에 출전했고, 고도의 내구성으로 최악의 난코스를 돌파하며 라이벌을 압도하는 기술을 선보였다. 스코틀랜드의 가장 험악한 도로구간에서 벌어진 랠리였다.
 

108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아직도 남아 있는 그 구간의 일부를 찾았다. 도로 조건은 당시에 비해 훨씬 좋아졌고, 최신형 롤스로이스 고스트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다. 당시 자동차산업은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자동차들은 대체로 모터사이클과 자전거 업체에서 만들어졌고, 조잡하고 내구성이 좋지 않았다. 

그때 헨리 로이스가 등장했다. 그의 정밀한 전기기술은 라이벌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차를 만들어냈다. 당시의 자동차 메이커들은 대장간 수준의 공작기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로이스와는 지극히 대조적이었다. 로이스는 건강을 해칠 만큼 끈질긴 완벽주의로 이름을 떨쳤다.
 

로이스는 1904년에 처음 자동차를 만들었다. 그리고 같은 해, 사업가인 찰스 롤스를 만났다. 롤스는 서부 런던에 있는 자신의 전시장에서 차를 팔고 있었고, 로이스가 만드는 차를 사들이기로 했다. 당시 갓 태어난 메이커가 시장에 들어가기 위해 거치는 과정이었다.

1906년에 이르러 로이스는 이미 맨체스터 공장에서 50마력의 6기통 엔진을 완성했다. 아울러 엔진 12호는 차체를 제작하는 외부업체가 만든 오픈카에 사용됐다. 롤스로이스의 전무 클로드 존슨은 자신이 '실버 고스트'라 이름 지은 차를 몰고 런던으로 갔다. 차를 홍보하기 위해서였다. <오토카> 1907년 4월 20일호를 보면 실버 고스트의 매끈하고 조용한 성격에 찬사를 보낸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저속에서 이 차는 우리가 지금까지 몰아본 것 중 가장 매끈했다.”라고 적혀 있다. 
 

당시에는 자동차 제조사들이 늘어나면서 제품의 명성을 높이고 성능을 증명하려는 경쟁이 점점 치열해졌다. 특히, 신뢰성 시험과 힐 클라임에서의 성적이 중요한 지표가 됐다. 때문에 존슨과 롤스는 스코틀랜드 내구 레이스에 실버 고스트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4일간 1,200km를 달리는 열전이었다. 글래스고를 출발하여 애버딘, 인버니스와 피트로크리를 거쳐 다시 글래스고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1906년 6월, 'AX201호'로 등록된 실버 고스트가 런던을 떠나 스코틀랜드로 달려갔다. 찰스 롤스가 운전대를 잡고 <오토카>의 해리 스윈들리가 동행했다. 스윈들리는 이 랠리에 참가한 4대의 서로 다른 모델을 취재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스코틀랜드 랠리 둘째 날은 퍼스에서 애버딘 구간을 달렸고, 진흙탕으로 변한 도로에서 '레스트 앤드 비 쌩크플' 힐 클라임을 치르기 위해 순서를 기다렸다. 지금은 케언곰스와 글렌쉬를 통과하는 올드 밀리터리 로드(A93)로 알려진 구간이다. 스윈들리가 쓴 기사 내용 중 “우리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사이 폭우가 쏟아졌다. 날씨는 더욱 나빠져 도로는 문자 그대로 물속을 헤엄쳤다.”라는 대목에서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당시 <오토카>의 사진기자는 제일 험악한 코스를 오르는 차를 포착했다. 그리고 우리는 108년 뒤, 사진 속의 바로 그 지점을 최신형 고스트로 통과했다. 그 옛날 이 길을 달렸던 드라이버들이 어떤 기분이었겠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날 그 도로는 최신형 고스트가 전혀 힘들이지 않고 달릴 수 있을 정도로 시원스럽게 뻗어 있다. 제한속도를 지키는 것이 더 힘들 정도. 긴 오르막길을 통과할 때도 거의 눈치를 챌 수 없다. 롤스로이스의 완벽주의는 기계적 성능을 넘어서는 경지에 도달했다.

랠리 넷째 날, 스윈들리는 실버 고스트에 올랐고 인버니스에서 피트로클리로 가는 구간에서 승객에게 어떤 배려를 했는가를 자세히 설명했다. “목요일에 우리는 남서 코스를 따라 출발했다. 존슨이 운전대를 잡았고, 나는 호화로운 뒷좌석에 몸을 묻었다. 재치 있게 만든 에이프론이 나를 아늑하게 감쌌다. 날씨가 나쁠 때는 승객의 바지가 젖지 않게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다른 차에서는 흔한 결점이었다.” 
 

이 행사의 규정에 따라 최고점은 1,000점이었고, 신뢰성의 최고점은 750점이었다. '타이어 고장을 제외하고 정차할 경우' 시간에 따라 감점했다. 그 밖에도 '경기구간에서 시간이 너무 걸렸거나 승객을 줄인 경우', '지원을 받거나 아침 출발 이후 연료와 물을 추가했을 경우', '돌발 시험에서 브레이크 성능이 떨어지고, 지시한 대로 정차와 재출발을 할 수 없을 경우' 감점 대상이 됐다. 

1,200km에 달하는 랠리를 끝냈을 때 104대 중 14대가 탈락했고, 채점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클로드 존슨이 몰고 나온 콘듀잇 스트리트 14~15번지의 롤스로이스는 976점을 받았다." 고난의 행군에서 실버 고스트는 단 한 가지 결함을 드러냈는데, 연료주입구 마개가 헐렁해진 것이었다. 
 

로이스가 가져간 비장의 무기, 실버 고스트는 동급(섀시와 타이어 값이 약 145만원이 넘는)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하지만 종합 순위에서는 995.4점을 받은 애리얼 심플렉스에 뒤졌다.

물론 존슨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후 무정차 주행에 도전해 11,421km의 기록을 세웠고, 그 뒤 8월 8일에는 영국자동차클럽(Royal Automobile Club=RAC) 감독관의 입회 아래 24,135km에 도달하며 기록을 다시 썼다. 로이스는 기록을 세운 차를 RAC에 맡겨 검사를 받았다. 전문검사관들은 7개 항목에 걸쳐 정밀 테스트를 한 뒤, '새차와 거의 동일한 상태'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제작기술의 승리'를 거둔 로이스를 축하했다.
 

이로써 로이스는 자신의 실력을 입증했고,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들겠다는 그의 노력을 RAC가 뒷받침했다. 오늘날 세계 정상의 메이커가 된 롤스로이스의 명성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최신형 고스트를 몰고 올드 밀리터리 로드에 들어섰다. 잠시 황홀한 추억에 잠겼다. RAC의 극찬을 받은 뒤, 로이스는 다시 한 번 천재적 제작기술을 발휘하여 항공기 엔진을 만들게 됐다. 그 순간 108년 전 롤스가 어떤 역사적 드라마를 연출했던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글 · 힐튼 홀로웨이 (Hilton Hollo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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