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W 3시리즈 40주년 - 3시리즈 투어링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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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W 3시리즈 40주년 - 3시리즈 투어링의 아버지
  • 짐 홀더 (Jim Holder)
  • 승인 2015.06.30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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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30 3시리즈는 막스 라이스뵉에게는 충분히 넓지 않았다. 그래서 BMW에서 일하던 그는 자신만의 왜건을 만들었다. BMW의 히트 상품은 그렇게 우연히 탄생했다. 그에게서 3시리즈 탄생 비화를 들었다

1982년 출시한 E30 3시리즈는 이전 세대보다 많은 종류의 보디 스타일을 만들 예정이었다. 하지만 왜건을 라인업에 추가할 계획은 없었다. 당시 BMW는 왜건(특히 콤팩트 왜건)은 프리미엄 이미지에 맞지 않을뿐더러, 사려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뮌헨에서 BMW 프로토타입 엔지니어로 일하던 막스 라이스뵉에겐 걱정거리가 있었다. 1984년 당시 그는 결혼해서 가정이 있었고, 자녀 둘이 있었다. 앞으로 아이들의 여러 짐들을 싣고 가족을 태우기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동기는 그저 더 큰 트렁크를 갖춘 차를 만드는 데 있었다. 당시 3시리즈 왜건은 없었고, 다른 차는 너무 작았다. 다만 4도어 모델이 있었기 때문에, 내 머릿속에서 3시리즈 왜건을 만드는 프로젝트는 굉장히 간단해 보였다. 필요한 것은 단지 시간과 돈이었다. 나는 C필러부터 시작했다.” 라이스뵉의 말이다.
 

먼저 상태 좋은 중고 323i 세단을 구입하고, 친구 작업장으로 옮겨 비밀리에 작업을 시작했다. 라이스뵉은 도면조차 그리지 않았고, 틈틈이 시간을 내 그가 가진 도구들로 완성했다. “작업노트는 없었다. 내 머릿속에만 있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차를 사기 전, 네다섯 달 동안 머릿속으로 프로젝트에 대해 다각적으로 검토했다. 그리고 나서 3만 마르크(현재 화폐가치로 약 1천153만원)를 쓰는 것에 대해 아내의 허락을 받았다. 나는 내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 기존의 것을 활용해야 했다.”

그가 작업을 마치기까지는 6개월 가량 걸렸다. 라이스뵉은 C필러를 코너 끝으로 옮겼고, 길어지게 될 루프 패널과 새로운 뒷문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먼저 차체 형상을 떴다. 뒷좌석 옆 유리는 플렉시 유리(Plexiglas)를 잘라내 만들었다. 칠도 다시 했다. 그런데 뒤 유리가 문제였다.
 

“법적으로 유리는 반드시 인증된 제품이어야 했다. 하지만 차에 들어맞는 인증 제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곳 뮌헨의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큰 축구 경기가 열렸다. 사람들이 경기를 보는 동안 나는 주차장으로 가서 모든 차의 뒤 유리창들을 쟀다. 그리고 폭스바겐 파사트의 것이 정확히 내가 찾던 것임을 알게 됐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도중 그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다는 사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회사가 공식적으로 승인하지 않은 것을 만들면 안 된다는 근로계약이었다. 그는 “회사에 차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만약 허락 없이 만들어서 도로로 가져나갔다간 큰 문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차를 처음 본 회사의 반응이 긍정적이어서 안심이 됐다. 그러나 임원 1명이 다음날 오전 7시에 다시 보러 왔을 땐 놀랐다”고 덧붙였다.
 

임원들은 라이스뵉의 결과물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현장에서 바로 차를 가져갔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그 당시를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임원들 가운데 1명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좋은 소식은 차가 아주 멋지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다시는 회사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차에 대해 보상을 받았다. 아내는 기뻐했고 나는 자랑스러웠다. 그건 돈 문제가 아니었다.”

3시리즈 투어링 개발에는 약 3년이 걸렸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빠른 개발기간이었다. 실제로 작동하는 실제 크기의 모델이 있었으니 많은 도움이 됐을 것이다.
 

“디자인 팀원 1명이 차를 훑어보더니 곡률과 비례를 손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임원들이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말했다. 회사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 프로젝트를 통해 굉장히 많은 것을 배웠다. 그때 이후로 내가 속한 프로토타입 엔지니어 팀이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실제 크기의 모형이 지닌 가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2008년에 은퇴했는데, 내가 있는 동안 모든 BMW, 미니, 롤스로이스 차는 반드시 시험용으로 프로토타입을 한두 대 만들어본 뒤 생산에 들어갔다.”

양산형 3시리즈 투어링은 약간의 손길을 거쳐 라이스뵉이 만들었던 것과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1987년에 출시됐다. ‘맥주 상자’(beer crate)라고 부르는 해치의 움푹 팬 모양도 그대로다. 라이스뵉은 가족을 태우기 위해 폭스바겐 미니버스를 구입한 일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는 3시리즈 투어링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신차를 구입할 형편이 못됐다. 그러나 1994년 2월 2일(우연하게도 그의 생일이었다), BMW는 마지막으로 생산한 E30 투어링을 그에게 선물로 줬다. BMW가 7년 동안 10만대 이상의 투어링을 팔았으니, 충분히 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라이스뵉은 그의 발명품이 대단한 성공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울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도 내 손주와 조카들은 길에서 3시리즈 투어링을 볼 때마다 내 차라고 부른다. 그럴 때마다 정말로 자랑스럽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나는 1973년부터 2008년까지 BMW에서 일했고, 우리 부서가 성장하면서 맡은 일도 많아졌다. 우리에겐 환상적인 기회가 많이 주어졌다. 투어링이 그것을 가능하게끔 해줬다. 나는 평생토록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일을 해왔다. 나는 아주 행운아였다.”

글 · 짐 홀더 (Jim Hol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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