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C F로 달린 서산의 깊고 푸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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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C F로 달린 서산의 깊고 푸른 풍경
  • 최주식
  • 승인 2021.08.20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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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은 넓고 깊은 땅 만큼이나 드라마틱한 풍경을 보여준다. RC F의 달리기도 그와 같았다

 V8 5.0L 자연흡기 가솔린 엔진의 웅혼한 배기 사운드가 젖은 노면에 스며든다. 그리고 도시의 풍경은 시나브로 사이드 미러 속으로 사라져간다. 

서산 여행의 시작점은 삼길포항이 좋을 듯하다. 서울 예술의 전당을 기점으로 120km 남짓. 시간은 여유 있게 2시간 반 정도 잡으면 된다. 서산이란 어감이 주는 느낌보다 가까이 있어 큰 부담 없이 다녀올 만한 거리다. 하지만 서해의 작은 도시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행정 구역상 면적은 서울보다 크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길의 상태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여로를 RC F는 굳건하게 달렸다. 빗길에서도 안정적인 그립이 자신 있는 달리기를 뒷받침했다. 바다를 가로지르며 곧게 뻗은 방조제는 서해의 흔한 풍경 중 하나. 대호방조제를 건너자마자 만나는 삼길포항은 한눈에 보기에도 작지 않은 규모의 포구다. 우럭으로 유명한 항구여서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다. 회색 바다 위로 낮게 드리운 먹구름이 한 폭의 수묵화 같은데 붉은 등대와 기중기, 파란색 RC F가 흑백영화 속 컬러로 등장하는 사물처럼 독특한 분위기를 만든다.

작은 고깃배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설 다리가 놓여 있고 사람들이 손에 비닐봉지 같은 것을 들고 오간다. 입구에 ‘회뜨는 선상’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가까이 가보니 우럭, 놀래미, 도다리, 광어, 아나고 따위를 파는 선상횟집이다. 이곳에서 회를 떠서 근처 횟집으로 가져가면 한 사람 당 5천 원에 매운탕과 함께 먹을 수 있다고. 여기 정박한 배들은 새벽 4시에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 돌아와 아침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장사를 한다. 인근에 선상좌대가 많은데 지붕이 있으면 낚시, 없으면 양식하는 배라고 일러준다. 

삼길포항의 ‘회뜨는 선상’
벌천포해변에는 ‘뭍으로 올라오는 황발이’가 있다

관광안내소에서 서산 지도를 하나 구해 펼쳐본다. 내비게이션이 아무리 편리하다해도 종이 지도를 보는 묘미를 따라올 수는 없다. 예정에 없던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재미도 지도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가게 된 곳이 벌천포해변이다. 벌말포구를 지나 탁 트인 바다를 만나면 저절로 탄성이 나오는데 이게 전부는 아니다. 조금 더 들어가 보면 갯벌 가에 게를 형상화한 조각들이 나타난다. 집게발을 쳐든 모습이 흥미롭다. ‘뭍으로 올라오는 황발이’라는 작품 제목이 붙어 있고 작가는 어린시절 놀이터였던 갯벌의 소중함과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세상을 표현하고자 했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갯벌 저 너머로 케미컬공장의 저장탱크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벌천포의 남쪽 작은 섬 웅도를 찾은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뭍에서 섬을 잇는 다리 위에서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함이었는데 물때를 맞췄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다리 아래로 아치형 수로가 길게 회랑처럼 이어지고 어느새 땅 위에 서 있는 배가 익숙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서둘러 차머리를 돌린 것은 흐린 날의 오후는 시간의 흐름을 알기 어려운 까닭이었다. 간월암까지 거리가 50km. 지방도로임을 감안하면 1시간 20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계산이다. 서산을 작은 도시로 봐서는 안 되는 이유다. RC F의 고삐를 죈다. 그렇지만 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 RC F는 힘을 조절하는 능력이 좋다. 와인딩 로드를 빠르고 정확하게 감아 돌아가는 핸들링이 자칫 지치기 쉬운 여정에서 운전 재미를 일깨워준다. 

간조에는 육지가 만조에는 섬이 되는 간월암
간월항 등대 너머 저녁노을이 마치 들불같다

도로의 진행 방향에 따라 멀리 산등성이로 붉은 노을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윽고 도착한 간월암은 물이 차지 않아 걸어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시간이 늦은 것이다. 비 그친 바다 건너 구름 사이로 마지막 노을이 불타고 있다. 온통 어두워지는 사위에 불빛이 더 강렬하게 타오른다. 

어둠이 내려앉은 해미읍성

해미읍성에서 아침을 맞는다. 읍성 담벼락에 곱게 스며드는 아침햇살이 반갑다. 남문인 진남루를 비롯한 성벽은 오랜 풍상에도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고 수원 화성의 규모에는 못 미쳐도 성곽을 따라 한 바퀴 걸어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천주교 박해의 현장이기도 한 회화나무는 무심하게 서 있다. 

망루에서 보는 마을풍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걸어서 다니기 좋은 동네. 누군가 알려준 대로 철물점 옆 골목으로 들어가 보니 시간여행을 온 듯 어린시절 동네 골목길 그대로의 풍경이다. 하지만 TV 프로그램 골목식당에 나와 유명해진 음식점이 있고 소방도로를 내기 위해 한쪽 집을 허무는 등 변화의 바람도 불고 있다. 

해미읍성은 현존하는 평성 중 가장 잘 보존된 곳 중 하나다
느긋하고 정감 있는 성안 풍경
보원사터 당간지주.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오래된 골목을 빠져나와 다시 RC F의 479마력 심장을 깨운다. 이런 성격의 차는 파워 이전에 감성에 어필하는 차. 그래서 다른 렉서스와 똑같은 계기 작동방식보다는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는 계기의 디테일이 조금 아쉽다. 

햇살에 비친 ‘백제의 미소’ 마애삼존여래불

보원사터에 도착하니 또 비가 오락가락한다. 비포장도로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낡은 버스가 지나간다. 오래 전 저 버스를 타고 이곳에 왔던 기억이 아슴푸레하다. 당간지주 뒤로 오층석탑은 그대로다. 기단을 보면 아수라상 등 팔부신중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 칸마다 하나씩 모두 12마리의 사자상이 탑을 받치고 있다. 그 뒤로 법인국사 부도와 부도탑이 서 있다. 보원사의 유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려시대의 큰절로 짐작한다. 

천년고찰 개심사

보원사터에서 조금 내려오면 마애여래삼존상을 만날 수 있다. 오래 전에는 전각에 씌워져 있었는데 이제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백제의 미소’ 를 본다. 아침 햇살이 좋을 때 그 미소를 만나니 이 또한 행운이다. 세 부처는 법화경에 따라 가운데 본존이 석가여래로 현재를 나타내고, 왼쪽이 관음으로 과거, 오른쪽이 미륵으로 미래를 나타낸다고 한다. 가장 풍만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래의 미소는 벙긋벙긋 절로 따라서 미소짓게 하고, 반가사유의 상을 하고 있는 미륵은 옆에서 보아야 그 미소가 돋보인다. 

깊고 풍성한 사운드를 내는 V8

개심사 가는 길은 또 다른 분위기다. 2차선 도로 양옆으로 가야농장 등 초지가 드넓게 펼쳐지는데 마치 유럽에서 본 풍경과 흡사하다. 도로 상태도 매끈해서 느긋하게 달리기 좋은 길이다. 언덕 위에서 무리지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떼들이 마치 그림처럼 지나간다. 아마 지도에서 본 서산한우농장인 듯하다. 해미읍성에서 서산의 동쪽 구역은 바다가 있는 서쪽과는 완연히 다른 분위기다. 

서산의 동쪽 지대는 시원한 초지가 펼쳐진다

커다란 느티나무를 지나 안양루 앞에 서면 상왕산개심사라는 현판 필치가 장쾌하다. 안양루를 등지고 서면 정면에 651년에 창건되고 1484년에 중창된 대웅전이고, 왼쪽으로 심검당, 오른쪽에 무량수전이 에워싸고 있다. 그 안의 작은 마당은 그 크기로 가늠하지 못할 기품으로 그득하다. 탑 옆 지주 모양의 구조물은 바로 괘불화(야외에 거는 큰 부처 그림)를 걸기 위한 것으로 조선 영조 때 만든 괘불화가 이곳에 전해진다고 한다. 심검당 마루에 잠시 앉아 볕을 쬐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그림자도 없이 법당 앞을 휙 지나간다. 

서산은 땅이 넓고 깊은 만큼 드라마틱한 풍경을 드러냈고 렉서스 RC F는 그와 더불어 드라마틱한 달리기를 보여주었다. 때로는 흐린 날의 노을이 맑은 날의 그것보다 더 화려하다는 것도 우리가 여행에서 배우는 사소함의 하나일 것이다. RC F의 배기 사운드가 사이드 미러에 비치는 노을 속으로 힘차게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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