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와 경계에서, 아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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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새와 경계에서, 아슬란
  • 최주식 편집장
  • 승인 2014.12.29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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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란은 앞바퀴굴림 고급 세단 수요를 노린다. 타깃이 명확한 만큼 그 성격에 맞는 장점을 잘 살려내고 있다. 부드러운 달리기는 때로 지나친 느낌마저 든다

하나의 현상이 대세가 되면, 너도나도 그 흐름을 쫓게 된다. 국내 승용차 시장에서 하나의 현상은, 바로 디젤이다. 그것도 디젤을 쓰는 고급 세단이 인기라는 점에서 달라진 현상을 보여준다. 독일산 디젤 고급 세단은 대개가 뒷바퀴굴림. 국내 고급차 시장에서 뒷바퀴굴림이 차지하는 비중은 70% 이상이다. 현대가 주행성능에 초점을 둔 뒷바퀴굴림 제네시스를 개발한 배경이다. 현대는 또한 그랜저에도 디젤 모델을 추가하면서 시장의 흐름에 대응하고 있다.
 

한때 그랜저는 대형 고급차의 상징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고급차이기는 하지만 그 상징적 지위는 예전보다 많이 내려왔다. 이제 아슬란이 등장함에 따라 그 지위는 한 단계 더 떨어지게 되었다. 왜일까. 표면상 이유는 쏘나타, 그랜저 이후 옮겨 탈 앞바퀴굴림(FF) 대형차가 없다는 것. 제네시스와 에쿠스 모두 뒷바퀴굴림(FR)이고 기아도 오피러스 단종 이후 앞바퀴굴림은 K7에 머물고 있다. 수입 대형 세단 역시 대부분 뒷바퀴굴림이다.
 

대세라고 해서 모두가 그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틈새시장이 있는 것이다. 아슬란은 그랜저와 제네시스 사이의 틈새에 자리한다. 어쩌면 중·대형 세단 세그먼트에서 휘발유 앞바퀴굴림 차와 디젤 뒷바퀴굴림 차의 틈새에 자리하기도 한다. 아무튼 틈새를 노리기 위해서는 기존의 이름보다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슬란이 차세대 그랜저 또는 그랜저 고급형이 아닌 새 이름을 달고 나온 이유가 아닐까?
 

이런 혐의(?)는 아슬란의 프로젝트명이 AG라는 데서 나온다. 과거 그랜저의 프로젝트명이 XG, HG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 세그먼트에서는 같은 플랫폼을 쓰므로 파생 모델의 하나로 해석할 수 있다. 현대는 아슬란을 공개하는 자리에서 “다운사이징 모델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앞으로 모델 라인업이 더 다양해질 것임을 예견할 수 있다. 촘촘한 라인업 전략은 독일계 브랜드들이 현재 구사하고 있는 전략으로 이미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말하자면, 보다 다양한 메뉴들을 구비해 단골손님을 다른 식당에 뺐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랜저와 사이즈를 비교했을 때 아슬란은 길이만 60mm 커졌을 뿐 너비와 높이는 같다. 휠베이스도 같아, 늘어난 길이가 실내공간으로 가지는 못했다. 아슬란은 V6 3.0 GDI와 V6 3.3 GDI 두 가지로 나온다. 모두 예전 그랜저에 있던 엔진이고 제원상 성능 수치도 똑같다. 다만 현행 그랜저에는 3.3 모델이 빠지고 2.2 디젤이 새로 들어왔다. 이에 따라 그랜저와 아슬란의 역할 분담은 더 또렷해졌다. 아슬란이 그랜저의 수요를 일부 잠식하더라도 그다지 손해 볼 상황은 아닌 것이다.
 

키를 받고 차에 다가가자 도어 핸들 쪽에 불빛이 반짝하며 사이드 미러가 스르르 열린다. 무언가 반겨주는 이 느낌은 언제나 좋다. 아슬란은 또한 키를 갖고 트렁크 앞에 서면 3초 후에 자동으로 트렁크 문이 열린다고 했다. 초를 재보니 3.3초 정도에 열렸다. 양손에 짐을 들고 있을 때 유용한 기능이다.

실내에서는 시트가 눈에 띈다. 도톰한 마름모꼴 박음질의 퀼팅패턴을 넣은 나파 가죽 시트는 응접실 소파처럼 편안하다. 시트 하나에서 확실히 업그레이드 된 감각이 묻어난다. 계기 배치는 간결하고 직관적이다. 자주 쓰는 기능들이 손닿기 좋은 위치에 다루기 쉬운 크기로 잘 배열되어 있다. 수납공간도 넓고 쓰기 좋다. 현대차의 장점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아슬란 시승차는 G330. V6 직분사 3.3L 294마력 엔진을 얹었다. 배기량이 큰 휘발유 엔진의 장점은 넉넉한 출력. 고회전을 쓰는 엔진인 만큼 액셀러레이터를 깊숙이 밟아야 하지만 이 과정의 부밍 소리가 거슬리지 않는다. 아슬란은 그랜저와 비교하면 하체의 움직임이 좀 더 진중한 듯하다. 그럼에도 움직임은 더 부드러운 느낌이다. 부드러움이 지나치면 가볍게 여겨진다. 아슬란은 작정하고 승차감을 중시한 세팅으로 보인다. 승차감을 중시한 만큼 핸들링은 뛰어난 수준은 아니다.
 

출발부터 조용한 달리기는 속도를 높여가도 계속 조용함을 유지한다. 시속 100km대를 넘어서도 풍절음은 크게 들리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주행소음을 억제한 노력이 역력하다. 19인치 미쉐린 타이어도 소프트한 성격으로 부드러운 주행 성격에 어울린다. 하체가 너무 말랑하다고 느끼는 순간, 주행모드 시스템의 ‘스포트’ 모드를 생각해낸다. 근데 버튼이 잘 보이지 않는다. 기어 레버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운전 중 이를 찾으면 전방 시야를 놓칠 수 있다. 미리 위치를 파악해 손끝의 감각으로 다루는 게 필요하다. 주행모드 버튼은 좀 더 위로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으면 좋겠다. 일단 스포트 모드로 바꾸면, 부드럽게만 느껴지던 차체 움직임이 제법 탄탄해진다. 사운드도 한층 박력이 있다. 노멀 모드에서 다소 불안했던 고속 코너링도 자신감이 붙는다.
 

주행모드는 에코, 노멀, 스포트 세 가지. 에코 모드에서는 확실히 가속이 억제되어 액셀러레이터를 깊숙이 밟아도 잘 나아가지 않는다. 스포트 모드는 이와 반대로 가속이 빠르고 핸들링도 향상된다. 대신 스포트 모드에서는 연비가 나빠지는 것은 감수해야 한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
 

뒷좌석은 적당히 파묻히는 자세다. C필러 뒤에도 작은 창이 나 있어 가을이 지나가는 풍경을 볼 수 있다. 비로소 실내의 대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스웨이드 재질로 뒤덮은 천장이 추워지는 날, 포근한 느낌을 준다. 앞 시트를 밀지 않아도 다리를 꼬고 앉을 만큼 뒷좌석 공간은 모자라지 않다. 앞 시트의 뒷부분과 머리 위 천장 부위를 움푹 들어가게 해 뒷좌석 승객을 배려한 모양이다.
 

아슬란은 뒷바퀴굴림이 부담스러운 이에게 분명한 대안이 될 수 있다. 특히 눈이 오고 빙판길이 생기는 겨울철은 뒷바퀴굴림에 대한 불편함이 커지는 시기. 아슬란은 적절한 시기에 FF 고유의 장점을 부각시키며 등장했다. 틈새시장에 대한 수요 예측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문제는 가격대가 틈새가 아닌 경계에 있다는 점. 특히 시승차처럼 각종 첨단장비를 가득 실은 최고급 익스클루시브 버전을 보면 가격대의 경계는 더욱 아슬해 보인다. 그리고 궁금한 한 가지는 다음 세대 그랜저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올까 하는 점이다.

글 · 최주식 편집장 
사진 · 김동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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