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노 공항 어딘가에서 본 이 문구는 낯선 여행지의 성격을 어렴풋이 설명해주는 듯했다. 그런데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은 어쩌면 어떤 위험 또는 모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2차 대전 당시 영국 왕실의 대국민 슬로건으로 ‘Keep Calm And Carry On'이란 말이 나온 배경처럼 말이다. 그런 한편 ‘Keep Calm’이란 말에는 어떤 일에 대한 의지를 되새기는 힘이 있다.
공항청사 내에서 만나는 카지노 머신들은 이곳이 자본주의의 심장인 미국이고, 도박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품고 있는 네바다 주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마중 나온 지프 직원을 만나 숙소로 가는 길,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에는 사람의 손길이 잘 닿지 않은 거친 자연이 휴양지로 변모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노곤한 기운이 스며 있었다. 장거리 비행 뒤의 피곤함이 눈꺼풀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아침 8시, 숙소를 출발한다. 루비콘 트레일에 도착하기까지 온로드 드라이빙은 올 뉴 그랜드 체로키와 함께한다. 시승차는 최고급 모델인 서밋. 그랜드 체로키는 세대를 거듭하며 보다 다양한 목적의 지프에서 프리미엄 SUV로 거듭났다. 그랜드 체로키 서밋은 고급스런 스타일부터 품질감 높은 실내에 이르기까지 확실히 럭셔리 SUV의 반열에 올라선 느낌이다. 여기에 콰트라 리프트 에어 서스펜션, 셀렉 터레인 트랙션 관리 시스템 등 뛰어난 오프로드 성능이 그만의 매력을 더한다.
아침 10시 30분, 이윽고 루비콘 트레일 출발점에 도착했다. 이제 평탄한 길은 끝났다. 그랜드 체로키에서 지프 랭글러로 짐을 옮기며 마음의 벨트를 조여 맨다. 바위산이라 숲의 청량함은 없다. 푸르고 높은 하늘, 태양은 뜨겁다. 어느새 휴대전화의 신호는 꺼져 있다. 1박2일 동안 문명과 단절된 채 이 산을 오롯이 견뎌내야 한다. 믿을 것은 지프 루비콘뿐이다.
지프 루비콘 10주년 에디션은 2도어 지프 랭글러, 4도어 랭글러 언리미티드 두 종류로 나온다. 선라이더 소프트톱이 기본이고, 검정색 3피스 프리덤 하드톱, 차체 색상의 하드톱 모델 등이 있다. V6 3.6L 285마력 휘발유 엔진에 수동 6단 기어가 기본이고, 자동 5단 기어를 선택할 수 있다. 10주년 에디션은 일반 랭글러 루비콘보다 지상고가 127mm 높아졌다. 타이어는 BF 굿리치 265/70 R17을 달고 알루미늄 휠 테두리에 랭글러 아이콘 로고를 새겼다. 펜더에 새겨진 10주년 기념로고가 특별함을 더한다.
나와 등정을 함께할 파트너는 검정색 4도어 3피스 하드톱으로 루프를 떼어내 트렁크에 실어놓은 상태였다. 변속기는 수동 6단. 중국 팀에서 수동 기어에 난색을 표하는 바람에 한 대뿐인 수동 6단 모델은 자연히 한국 팀의 차지가 되었다. 실내에서는 붉은색 가죽시트와 등받이에 자수로 새겨진 10주년 기념 로고가 특별함을 더한다. 파워 윈도 버튼은 센터 페시아에 모여 있는데, 도어를 떼어내고 주행할 경우를 대비해서다. 실제 미국의 도로에서 도어를 떼어내고 달리는 지프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루비콘 트레일은 타호 호수 서쪽에 자리한 길이 35km 구간의 험난한 코스를 말한다. 구간 중에는 일부 도로를 포함하고 있는데 맥킨니 루비콘 스프링스 로드라 불린다. 원래 1890년대~1920년대 이 지역 리조트 호텔로 가는 역마차를 위한 길이었다. 자동차로 처음 이 길을 달린 것은 1908년이었고, 195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프로드 마니아들의 성지로 각광받고 있다.
최초의 개척자는 마크 A. 스미스(Mark A. Smith)라는 사람. 그는 1953년, 155명의 친구들과 함께 각자 자신의 지프를 타고 캘리포니아 주 타호 호수로 가는 길에 거친 화강암 루트를 통해 시에라 네바다 산을 넘었다. 이것이 공식적인 최초의 루비콘 트레일 지프 횡단이자 최초의 ‘지프 잼보리’가 되었다. 이후 수만 명의 지프 마니아들이 자신의 지프와 함께 루비콘 트레일을 횡단해왔다. 마크 A. 스미스는 지금도 지프 브랜드와 함께 루비콘 트레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루비콘일까. BC 49년 로마의 줄리어스 시저는 로마 북쪽의 ‘루비콘’ 강을 건너며 운명적인 선택을 한다. 그 결과 로마의 역사는 달라졌다. 이 코스의 초기 개척자들이 그 이름을 따서 붙였다. 그것은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달린다는 지프의 정신과 부합하는 것. 실제 루비콘 트레일에 오르면 앞을 향해 나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무리 험한 길일지라도.
좁고 가파른 길을 십여 대의 지프가 줄지어 오르니 그 모습이 장관이다. 그것도 최신의 루비콘 10주년 모델들이니 시선을 끌 수밖에 없다. 트레일에서 저마다의 지프를 몰고 모험을 찾아 나선 이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길을 양보하며 서로 주고받는 따뜻한 시선에서 서로의 동질감을 확인한다. 말하자면 이곳은 지프의 성지. 지프 마니아라면 누구나 이곳을 등정하는 꿈을 꾸기 마련이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풍경은 넓어진다. 거대한 화강암 판 위로 큰 바위와 암석이 산재한 지대는 황량해보였다. 이곳을 자동차로 지난다는 사실은 무모해보였다. 낭떠러지가 보이기 시작할수록 아찔함은 더 깊어진다. 거의 45도에 가까운 기울기로 암벽을 통과할 때는 마치 차체가 전복될 것만 같은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가드레일도 없는 곳에서 구르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다. 난이도가 높은 구간을 하나씩 통과해낼 때마다 성취감이 쌓여간다. 이런 맛에 모험과 도전을 즐기는 것일 게다.
실제 지프 브랜드는 신차 개발을 위해 루비콘 트레일을 적극 활용해왔다. 이를 통해 락 트랙(Rock-Trac) 4:1 트랜스퍼 케이스, 콰드라-드라이브 II(Quadra-Drive II), 트루 락(Tru-Lok) 락킹 액슬 디퍼렌셜, 분리형 프론트 스웨이 바, 차체 하부 스키드-플레이트 보호장치, 프론트 데이나 44(Dana 44) 액슬, 롱-트래블(long-travel) 멀티링크 서스펜션 디자인 등 혁신적인 기술들을 개발, 적용해왔다.
차가 가야 할 방향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타이어의 위치 선정만 제대로 하면 나머지는 지프가 알아서 다 해준다. 그런 믿음이야말로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는데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그것은 어떤 길을 만나도 두렵지 않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진다. 때로 하체가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차체는 조금의 휘어짐이나 패인 곳이 나타나지 않았다. 프레임 섀시, 강철 보디의 강인함을 직접 체험하는 순간이다.
다음날 하산하는 코스는 쉬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더 깊은 급경사와 급강하가 이어졌다. 몸은 어제의 감각을 재빨리 찾아냈다. 하산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평지를 만나 질주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렸다. 어떤 사람의 숨은 재능을 발견하게 되면 그 사람이 달라 보이기 마련이다. 도로에서 만난 지프 역시 확 달라보였다. 그 차이는 정말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이다.
글: 최주식, 사진: 크라이슬러 A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