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혜의 영화와 자동차 > 비버 - 벤츠 300CD 터보 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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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의 영화와 자동차 > 비버 - 벤츠 300CD 터보 디젤
  • 아이오토카
  • 승인 2012.05.3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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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것, 잃어버린 것, 잊혀진 것


참, 애잔하다. 한 남자의 모습이. 언제부터인지 모를 우울증에 시달리는 그의 이름은 월터 블랙. 아버지의 장난감 회사를 물려받아 그런대로 잘 유지해왔고 지적이고 아름다운 아내와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형제를 둔 남자. 한때는 단란하고 따뜻했음이 분명해 보이는 가족 구성원과 집을 가졌다. 그런데 지금 그의 얼굴은 표정이 없고 그의 몸짓은 나른하며 그를 둘러싼 공기는 무겁기만 하다. 침대 위에서 일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잠으로 도피해버리는 그, 생각도 마음도 어딘가 빼앗겨버린 듯한 멍한 표정, 그 무엇도 그에게 활기를 줄 수 없고 그 무엇도 그를 구제할 수 없어 보인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우울증. 머지않아 우울증이 인류의 가장 큰 골칫거리, 가장 무서운 질병이 될 거라는 사람이 있을 만큼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것으로 인해 지금 월터는 좀비와도 같다.

어쩜, 저리도 저 남자와 닮아있을까, 저 벤츠는. 월터가 짐을 꾸려 집을 떠나며 차를 타는데 낡은 벤츠가 눈에 들어온다. 300CD 터보 디젤. 가만있자. 벤츠에서 5기통 디젤 엔진을 얹은 300 D 모델을 선보인 것이 1976년. 그리고 77년, 78년을 거쳐 터보 디젤 모델이 출시되었으니 월터의 벤츠는 아마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을 확률이 크군, 그래. 80년대 중반까지 터보 디젤이 양산되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이런, 못해도 20년은 된 차다. 한때는 잘 나가는 멋진 모델이었음에 틀림없는(물론 지금도 나쁘지 않다. 벤츠 아닌가), 하지만 이제는 월터만큼이나 나이 들고 노쇠한 모습의 벤츠 300CD는 월터 블랙이라는 남자를 소리 없이 강하게 대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남자, 월터가 비버 인형을 만났다. 왼손에 비버 인형을 끼고 물끄러미 바라보다 스스로 말을 하기 시작한 월터는 제멋대로 ‘인형처방’이라는 것을 생각해내고 집으로 회사로 복귀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우울증에 빠져 무기력하고 마치 생기라는 것은 뱀파이어에게 모두 빨아 먹힌 듯했던 그가 활기 넘치고 의욕 충만한 보스로 돌아온다. 어린 아들과 목공을 하다가 신선한 장난감 세트의 아이디어를 얻고 아내를 향해 웃어주고 아내를 안아주고 아내와 이야기를 한다. 직원들의 믿음을 다시 사고 매출을 올리고 그렇게 관계들을 하나씩 회복해간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왼팔을 감고 있는 비버 인형 덕분이다. 비버를 만난 후부터 비버는 월터의 대변인이 되고 월터의 상담자이고 월터의 절대자와 같은 존재가 된다. 하지만 비버는 비버일 뿐. 월터가 될 수는 없는 법.

처음 월터가 비버 인형을 팔에 끼고 나타났을 때는 그가 우울증을 극복하고 나아지는 모습으로 보이기에 아내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환영하는 분위기였고 ‘인형처방’에 기꺼이 동참해주지만 그 기간이 길어지면서 또 다른 의구심과 초조함을 가질 수밖에. 그리고 드디어 월터 자신도 언제까지나 비버의 뒤에 숨어서 세상과 대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다.

절망에 빠진 한 남자가 일상으로 복귀하기까지 깊은 심연에 빠진 내면을 그려내고 있는 이 영화는 어쩌면 인간의 내면을 다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낡은 벤츠 300CD를 보여주면서 월터의 이모저모를 짐작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비버를 만나 다시 활력을 되찾은 후 다시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벤츠. 월터와 꼭 닮은 낡은 벤츠는 월터가 지나온 시간, 잃어버린 것들, 잊어버리고자 하는 것들을 모두 안고 있는 일종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글 · 신지혜(아나운서. CBS-FM <신지혜의 영화음악> 제작 및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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