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속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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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속 자동차
  • 안민희 에디터
  • 승인 2016.04.06 1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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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틀리는 좀처럼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 차다. 그래서 더 일상 탈출에 걸맞다. 오쿠다 히데오의 이야기 속 벤틀리를 살펴보자

일본의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는 현대 사회와 부조리와 모순을 이야기하는 작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이라부 연작에서는, 이라부 종합병원의 정신과 의사 ‘닥터 이라부’가 등장한다. 이름이 병원 이름과 같은데 아버지가 세운 종합병원의 후계자이기 때문. 하지만 그는 일반적인 의사와는 거리가 멀다. 로봇 애니메이션인 건담에 빠진 오타쿠인데다 마마보이다. 철이 없는데다 하는 짓 대부분은 이상하다. 주사를 놓는 장면을 보며 흥분한다던지, 아이랑 같은 수준으로 열심히 싸우곤 한다. 하지만 규율에 얽매여 사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꽉 막힌 속을 뚫어주는 바보짓이 빛나는 주인공. 평소에는 진상인데 하는 짓이 통쾌하다보니 밉지가 않다. 그런데, 시속 200km를 넘나드는 광란의 질주를 하는 것도 용서가 되나?

 

“면장 선거”
-구단주-
벤틀리 아주르
현실에서 벗어나야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구단주 편의 주인공인 다나베 미쓰오는 78세의 나이지만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는 신문사 회장. 야구를 무척 좋아해 야구단 구단주도 맡고 있다. 주변은 은퇴를 권유하지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며 이를 늘 거절한다. 열정으로 볼 수 있겠지만, 사실은 미숙한 사회를 본인이 바꿔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결국 그는 패닉에 빠지고 정신과 의사 이라부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때맞춰 터지는 야구단 합병 문제와 이라부와 얽히며 일어나는 기행들로 매스컴의 집중포화를 맞게 된다. 점점 우울해지는 기분을 바꿀 겸 이라부가 모는 벤틀리 컨버터블을 얻어 타는데, 그를 집중적으로 따라붙는 매스컴과 추격전에 휘말리게 된다.

“자동차 여러 대가 따라붙더니 양 옆과 뒤를 에워쌌다. 다른 차들에게 폐를 끼치며 도로에서 상식 없이 플래시를 터트리는 족속까지 있었다. 또다시 여러 대가 다가오자 이라부가 있는 힘껏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커다란 벤틀리가 굉음을 울리며 질주했다. 요란하게 타이어를 긁으며 코너링을 했다. 이라부가 차를 몰고 수도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차는 무서운 속도로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아슬아슬한 차선 바꾸기로 차체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엔진 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 울려퍼졌다. 대도시의 야경이 360도 파노라마로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빌딩들이 숲처럼 늘어서 있고, 수만 개의 조명이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SF 영화가 따로 없군. 긴박한 상황에서도 미쓰오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색색의 네온 불빛, 자동차들의 붉은 후미등, 조명이 밝혀진 레인보우 브리지. 도쿄는 밤이면 밤마다 빛의 퍼레이드를 펼치고 있었다. 불현듯 제정신이 들었다. 이것이 바로 미래. 예전에 상상 속에 그리던 과학도시 아닌가.”

 

벤틀리 마니아라면 어떤 차일지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서는 400마력 터보 엔진과 컨버터블의 두 가지. 일단 폭스바겐의 품에서 새로 나온 모델들은 아니다. 전부 500마력 이상이기 때문이다. 벤틀리의 모델 라인업 중 400마력에 가까운 터보 엔진을 얹은 컨버터블은 단 하나. 벤틀리 아주르(Azure)의 1세대 모델이다. 아주르의 V8 6.75L 터보 엔진은 최고출력 390마력을 4,000rpm에서, 최대토크 76.5kg·m을 2,000rpm에서 냈다. 변속기는 GM의 자동 4단. 뒷바퀴에 모든 힘을 보냈다.

6.75L의 커다란 엔진에 터보차저를 더해 400마력을 낸다는 것은 이론상 낮은 출력으로 보인다. 이는 1959년 등장한 L410 엔진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벤틀리는 전통을 위해 L시리즈 V8 엔진을 지속적으로 개량해 사용하고 있다. 현대 벤틀리의 기함인 뮬산이 V12 엔진이 아닌 V8 엔진을 얹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아주르는 0→시속 100km 가속에 6.5초가 걸렸고, 최고시속은 241km였다. 출력에 비하면 살짝 느려 보이겠지만, 아주르의 크기와 무게를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 아주르의 크기는 5,340x1,880x1,480mm. 휠베이스는 3,060mm나 됐다. 공차중량 2,610kg의 차체를 4단 변속기만으로 몰아붙인다는 것을 생각하면 분명 빠른 차가 맞다.

 

결말로 넘어가자. 추격전 끝에 마주한 도쿄의 풍경을 보며 다나베 미쓰오는 사회는 훌륭하게 발전했으며, 자신이 없어도 지속적으로 발전할 것임을 깨닫고 은퇴를 결정한다. 그를 묶어왔던 ‘사회 발전’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멍에를 끊어버린 셈이다. 이 순간을 위해 벤틀리 아주르는 일상을 탈출하는 상징이자 도구로 기능한다. 벤틀리를 탄다는 것 자체가 보통의 일상과는 거리가 멀다. 즉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상징한다. 또한 초고속 추격전을 통해 정형화된 삶을 깨는 도구가 된다. 얻어 탔다지만 어떤 회장이 지붕을 열고 시속 200km 넘는 추격전을 벌일까. 평소 있을 수 없는 일의 끝까지 몰린 끝에 그는 객관적인 관찰 속 결론을 내린다. 평소의 자신을 벗어나야 객관적인 시각을 갖출 수 있다는 은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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