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4,000m 아타카마에 도전한 미니 컨트리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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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4,000m 아타카마에 도전한 미니 컨트리맨
  • 아이오토카
  • 승인 2011.07.12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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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느낌이 들어?” 사진기자 폴 하머가 물었다. 그랬다. 그도 마찬가지로 사지가 쩌릿하고, 머리가 멍했고, 숨이 가빴다. 하머는 자신이 공황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나는 혈전증에 걸렸다고 투덜대고 있었다. 우리는 에어컨이 달린 미니 컨트리맨의 편안한 실내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칠레 아타카마 사막 중심부의 험악한 도로를 올라가고 있었다. 어떤 증세든 곤란한 장소였다. 제일 가까운 병원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문득 여행에 무디어진 우리의 뇌가 번쩍 깨어났다. 바로 고산병이 일어날 고도였던 것이다. 우리는 해발 3,900m의 정상에 접근하고 있었다. 가압장치가 되지 않은 비행기라면 산소마스크가 뚝 떨어질 고도에 가까웠다.

우리 신체가 고도에 적응하기에는 너무 빨리 올라가고 있었다. 하머는 우리가 올라가는 장면을 촬영하려다 졸도할 뻔했다(그는 마치 코미디를 연출하듯 픽 쓰러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칠레에서 미니를 타고 무얼 하려고 했을까? 남북으로 좁고 길게 뻗은 칠레. 우리는 그곳의 중심 산타아고에서 출발하여 페루 바로 남쪽인 아리카로 올라갔다. 우리의 여로는 아타카마 사막을 꿰뚫고 눈이 쩍 벌어지는 황량한 풍경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떤 차라도 벅찬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우리는 이 네바퀴굴림 컨트리맨을 극한상황에서 시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오리지널 미니의 역사에 있어 또 하나의 특별한 페이지를 탐색하고 싶었다. 그것은 바로 글라스파이버 보디의 미니. 미니가 조립된 나라로는 호주, 이탈리아, 스페인과 남아공이 있다. 그중 아마도 제일 독특한 나라 중 한 곳은 칠레일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리카. 그렇지만 칠레의 미니는 그다지 이례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단지 이들 남미 버전은 보디를 철이 아닌 글라스파이버로 만들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현지 규정을 통과하기 위한 이유가 있었다. 어쨌든 이는 우리가 칠레에서 컨트리맨을 몰고 본격적으로 험악한 2,740km의 도로를 돌파하는 구실을 제공했다. 그리고 이 대장정의 희생자는 네바퀴굴림의 컨트리맨 쿠퍼 S. 공황증세와 심각한 혈전증까지는 아니더라도 궁지에서 우리를 구출할 구원자였다.

우리 빛나는 컨트리맨이 601km를 달렸을 때 산티아고의 자동차대열 속으로 뛰어들 채비를 마쳤다. 그때 이미 우리는 매력적인 흑백 페인트 색상, 가죽 시트와 상당히 큰 선루프를 마음껏 즐겼다. 매혹적인 도시 산티아고는 세계의 수많은 수도와는 달리 번들거리는 금속이 시선을 가득 메우는 체증으로 우리를 가로막지 않았다. 그럼에도 차들이 분주하게 오갔고, 우리 여행 중 이런 대열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우리 여행은 팬아메리칸 하이웨이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 이름만으로도 아주 먼 거리를 암시하고 있었다.

산티아고 북쪽의 창고들이 사라지고 곧 산악지형이 나타났다. 메마른 양피지 색깔의 풀과 기이한 나무가 주위를 에워쌌다. 뒤이어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아름다운 엘퀴 계곡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은 공기가 너무나 맑아 하늘을 겨냥하는 우주관측소의 중심지가 됐다. 하지만 우리는 위를 쳐다보기도 전에 아래를 살펴야만 했다. 마치 정원의 스프링쿨러처럼 칙칙칙칙 소음이 들렸다. 그것은 여행을 비트는 소리였다. 미니의 앞 타이어 한쪽이 어느 축구팀이 패배했을 때처럼 김이 새고 있었다.

우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하지만 칠레의 B급도로는 생각과는 달리 별로 힘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는 런플랫 타이어를 신고 있었다. 우리는 미니 칠레 관계자들을 설득하려했지만 스페어타이어를 마련하지 못했다.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호텔을 그대로 찾아가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대신 긴 태평양 해변으로 이름난 라 세레나로 차를 돌렸다. 그곳에 미니 딜러가 있어 새 타이어를 구하기로 했다.

따라서 야영을 하지 않으려면 런플랫 타이어를 짓이긴 우리를 호텔로 안내할 현지인 카를로스를 만나야했다. 우리는 산티아고의 미니 딜러가 새 타이어 2개를 보낼 때까지 이틀을 기다려야 했다. 또 다른 바퀴가 불룩 솟아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요구한 스페어타이어는 오지 않았다. 우리는 타이어를 걷어차고, 일단 칠레의 글라스파이버 보디의 오리지널 미니를 찾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산티아고에서 오너를 찾으려던 희망은 깨지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는 한때 칠레의 미니 레이서였던 후안 반드를 만나는 소득을 거두었다.

어쨌든 다른 곳에서 글라스파이버 미니를 찾아야 했다. 하루의 여유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한 대를 찾을 가능성이 있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말이다. 여행에 앞서 인터넷으로 남아있는 차를 알아봤다. 칠레는 커다란 나라지만 플라스틱의 유산이 널려 있지는 않았다. 광고를 통해 찾으려고 구글에서 ‘미니 인 파이버’(Mini in fibre)로 검색했다. 대다수의 상태가 형편없었다. 생산한 지 오래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라 세레나에서 괜찮은 한 대를 발견했다. 비닐 루프의 앞쪽이 이상하게 물결치고 있었지만 달릴 수는 있어 보였다. 카를로스가 전화를 걸었다. 영국인 2명이 이 낡은 중고차를 촬영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느라 애를 썼다. 안토니오라는 미니 오너는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고 놀랍게도 기꺼이 촬영을 허용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카를로스는 이 한 쌍의 어릿광대가 된 우리가 괴기한 촬영이유를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하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함께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15분 뒤 우리는 메탈 블루 플라스틱 미니 한 대를 찾아냈다. 안토니오 로메로의 1973년식 미니는 그의 할아버지가 사들인 차였다. 그가 차를 되살릴 때까지는 마당에서 썩고 있었다. 그의 컴퓨터에 실린 인상적인 엔진 개조작업의 사진들이 그의 노력이 어떠했던가를 알려줬다. 의심쩍은 루프 개조작업도 담겨있었다. 집에서 만든 선루프를 달려고 루프를 잘라내어 생긴 흔적이었다. GRP 보디에는 미니의 특징인 루프 거터가 없었다. 보닛도 모서리를 둥글게 손질했고, 휠아치의 립도 훨씬 두드러졌다. 실내 트림도 달랐다. 그러나 이 차는 글라스파이버 보디이던 아니건 미니가 틀림없었다. 도로에 나서자 감각은 철로 만든 미니와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와는 대조적으로 컨트리맨은 훨씬 성장되고 세련된 느낌이 들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컨트리맨이 유능한 장거리 여행용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고속 정속주행을 자신 있게 할 만큼 덩치가 컸고, 칠레의 빡빡한 도로를 달리기에 충분할 만큼 작았다. 빠르기도 했다. 터보가 합세한 184마력 엔진은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우리는 약간 긴장했다. 아타카마의 드라마틱한 심장부에서 어떤 고난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벌써 하루에 타이어 2개를 망가트렸고, 앞으로 갈 길이 멀었다. 이날 우리는 어제 이미 통과했어야 하는 엘퀴 계곡을 파고 들어갔다. 그 뒤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코피아포를 향했다. 칠레의 광부 33명이 69일간 갇혀있던 유명한 사건의 광산에서 제일 가까운 대도시. 궤도에서 벗어난 일정 탓에 천체관측소에서 밤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거대한 진주처럼 산꼭대기를 장식하고 있는 은빛 돔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비포장도로를 따라 선인장이 늘어선 들판을 누비고 지나갔다. 급한 헤어핀을 만나 미니의 네바퀴굴림이 요란하게 우리 뒷바퀴를 먼지 가득한 깊은 바퀴자국에서 끌어냈다.

우리가 다시 서쪽으로 팬아메리칸 하이웨이에 들어설 즈음 태평양이 해를 삼키고 있었다. 우리는 굉음을 울리는 트레일러트럭을 한 대씩 추월하느라 애를 썼다. 미니의 파워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엔진은 즐겁게 달릴 만큼 파워를 갖췄다. 하지만 고속도 팬아메리칸은 편도 1차선이라 추월이 쉽지 않았다. 우리는 자정쯤 호텔에 도착한다고 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내 형편없는 스페인어가 제대로 메시지를 전달했는지 의심스러웠다. 그 뒤 도로에는 추월 차선이 늘어나고 긴 오르막에 들어섰다. 거기서 르노스포르 클리오가 재미를 더했다.

알고 보니 르노 드라이버는 노련한 드라이버가 몰고 있는 시트로앵 C4 쿠페를 추월하기 위해 총력전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기로 했다. 우리의 큰 백색 미니는 여기서 제 세상을 만났다. 헤드램프는 눈부셨고, 터보는 열성적이었다. 우리는 장쾌하게 치솟은 오르막을 안정되게 타고 오르며 최고의 드라이브를 맛봤다. 가끔 급회전을 하느라 당황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약 100km를 갈 수 있는 연료밖에 남지 않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음 주유소와의 거리와 딱 맞아떨어졌다. 그런데 오르막이 내리막으로 바뀌면서 우리는 살아났다. 트립컴퓨터의 주행거리 추산은 점차 늘어났다. 곧 코피아포가 나타났고, 뜻밖의 멋진 카지노 호텔에 들어갔다. 카지노의 테이블에 고객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지쳐 테이블에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이튿날 달려야 할 장거리 여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로는 동쪽으로 트레스 크루세츠 국립공원을 통과하게 돼 있었다. 그곳으로 향하는 도로는 서스펜션을 망가뜨리는 길로 유명했다. 호텔 데스크의 파트리시오는 거기 가본 적이 없었고, 관광안내소는 문을 닫았다. 아무튼 우리는 가기로 했다. 타이어에 부담이 너무 크다면 언제든 돌아설 수 있었으니까.
 
2시간이 지나자 매끈한 노면이 뚝 끊어졌다. 도로는 계속됐지만 바퀴자국이 깊은 자갈길과 먼짓길이었다. 이미 우리는 돌아갈 수 없을 만큼 깊숙이 들어갔다. 조심조심 앞으로 나가갔다. 핑크 바위의 얼어붙은 거품, 회색 혈암의 혀와 푸르스름한 산악 길을 누비며 끊임없이 올라갔다. 몇몇 산봉우리는 구릿빛 속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일대는 마치 거대한 광산 같았고, 대부분 채굴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 마치 딴 세상에 온 듯했다. 우리의 머리도 마찬가지. 모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미니는 고산병에 시달리는 우리보다 4,000m 고봉을 더 수월하게 타고 올랐다. 희박한 공기로 인해 1,500rpm 이하로 뚝 떨어진 파워를 터보가 벌충했다. 완전히 공기를 채운 4개의 타이어가 지면을 힘차게 긁었다. 이번에는 펑크 없이 좀 더 오래 달렸다. 이튿날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에 도달했다. 관광중심지이면서 화산지대이고, 소금 호수와 괴기한 라 루나 계곡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온갖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플라밍고?” 내가 호텔 데스크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손을 1m쯤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이처럼 크죠. 털은 핑크색에 다리가 길어요” 잠시 뜸을 들인 뒤 다시 물었다. 플라밍고를 보려면 얼마나 가야 하느냐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여유보다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아리카로 가는 데는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는 그곳에 가기 전에 지구상에서 가장 멋진 유령도시 험버스톤에 들르고 싶었다.

우리는 구덩이를 들이받고 다시 타이어가 터졌을 때 유령이라도 본 듯 화들짝 놀랐다. 그때 시속은 110km. 타이어 옆면에서 길이 5cm가 찢겨 나왔다. 이제 런플랫 타이어 2개가 내려앉았다. 우리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부풀어 오른 타이어를 써야 했다. 휠까지 비틀어놓은 충격을 받은 뒤에도 컨트리맨은 화살처럼 똑바로 달려갔다. 이때쯤 펑크 난 런플랫 타이어를 뒤 액슬에 달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미니 딜러까지 가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세계문화유산인 험버스톤에 도착했다. 한때 2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덥고 메마른 지역에서 비료용 염화나트륨을 캐내던 고장이었다. 거기서 무뚝뚝한 경찰이 우리에게 말했다. 험버스톤 바로 북쪽에서 “교통위반을 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우리가 경찰에 제지당한 것은 벌써 세 번째였다. 하지만 우리는 처음으로 더럭 겁이 났다. 칠레 경찰은 엄격하기로 유명했기 때문. 게다가 이번에는 실제로 과속을 했다. 경찰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만은 봐주겠소”
 
일단 문제가 해결되자 우리는 홀가분하게 아리카까지의 마지막 구간을 달렸다. 컨트리맨의 페이스를 보통 이하로 낮췄다. 어쨌든 주위의 풍광은 실로 경이적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본 가장 큰 계곡 2개를 에돌았다. 산비탈에는 달 표면과 같은 먼지가 두껍고 매끈하게 덮여있었다. 여기서 도로를 벗어나면 수백 미터를 미끄러져 망각의 세계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마치 그림엽서에서 보는 듯한 해넘이를 배경으로 아리카에 도착했다. 게다가 빵빵한 타이어 4개가 힘차게 굴렀다. 우리는 이튿날 미니 공장의 옛터를 찾기로 했다. 사진기자 하머가 호기심어린 호텔 포터에게 설명했다. “영국 릴런드? 우리 아버지가 그곳에서 일했어요” 포터가 반색을 했다. 우리는 운이 좋았다. 37년 전 그 공장에서 150~200명이 일했다. 자기 아버지가 내일 나와서 공장을 안내해줄 거라고 했다. 페드로 호퀠라의 회고담은 박스에 실었다.

페드로는 컨트리맨의 마지막 여로에 우리와 함께 했다. 칠레의 험로에서 잘 적응하던 타이어와 서스펜션이었지만 공장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힘이 들었다. 우리는 대장정을 함께 한 컨트리맨과 상당히 정이 들었다. 칠레에 수없이 널려있는 가파른 오르내리막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손쉬운 컴팩트 4x4였다. 결코 값싼 미니가 아니었지만, 골수 미니가 틀림없었다.
 
글 · 리처드 브렘너(Richard Brem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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