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혜의 영화와 자동차 <쩨쩨한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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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의 영화와 자동차 <쩨쩨한 로맨스>
  • 아이오토카
  • 승인 2011.04.28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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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로맨스는 쩨쩨함이 진실 아닐까

정배. 그는 만화가다. 화가였던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아 그림체 좋고 철학도 있지만 스토리가 약하다는 둥 만화가 너무 어렵다는 둥 하는 사람들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다. 그에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너무도 소중한 꿈이 있다. 아기 때 돌아가신 어머니와 자신의 모습이 담긴 그림, 아버지의 그림. 돈이 없어 아버지 친구가 소장하고 있는 그림. 하루빨리 성공해서 돈을 벌어 그 그림을 가져와야 한다.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어머니와 재능을 물려주신 아버지와 정배, 자신을 잇는 단 하나의 매개, 아버지의 그림.

다림. 그녀는 칼럼니스트이며 번역가다. 정확히 말하면 자칭이다. 사실 다림은 친구의 소개로 근근이 잡지에 실리는 칼럼을 손보는 일을 하고 있는데 영 방향을 엉뚱하게 잡아 잘리거나 말도 안 되는 자신의 상상력에 의지해서 모든 것을 뒤죽박죽 만들어 놓는 선수다. 번듯한 직업과 아파트가 있는 쌍둥이 남동생은 걸핏하면 무시하고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기 일쑤다.

두 사람이 만났다. 엄청난 상금이 걸린 프로젝트가 발표되고 정배는 그림을 찾기 위해 자신의 전공이 아닌 성인만화를 그리려 하지만 스토리, 그놈의 스토리가 문제다. 그래. 스토리 작가를 쓰자. 그렇게 만난 다림. 허풍 심하고 계획도 없이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를 하면서도 있는 척, 아는 척 하기에 바쁜 그녀. 뭔가 좀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정배는 다림의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그림을 그려 나간다. 두 사람. 당연히 티격태격이다. 잘 맞을 리 없다. 로맨스?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볼 법한 로맨스는 글자 그대로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로맨스다. 우리의 현실의 로맨스는 어쩌면 쩨쩨하고 어쩌면 소심하고 어쩌면 느닷없다. 정배와 다름의 로맨스가 바로 그러해서 두 사람은 서서히 상대를 인정하고 사랑을 시작한다.

두 사람의 마음이 열리고 두 사람이 서로를 인정하기 시작한 건 함께 떠난 취재여행 이후다. 여행 자체가 설레고 들뜨기 마련이지만, 함께 작업을 진행하면서 삐지고 화내고 다투는 사이였기에, 사사건건 의견이 다르고 무시하는 사이였기에 로맨스를 기대하기는 좀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행은 또, 사람을 알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아니던가.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면 자기 자신을 더 잘 알아가고 누군가와 떠나는 여행이라면 함께 떠나는 상대를 더 잘 알아가는 좋은 방법이 된다. 정배와 다림도 그랬다. 취재여행을 가서 열린 마음으로 주위를 바라보고 상대의 장단점을 융화시키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게 되고 사랑을 시작할 준비를 마친다.

두 사람이 여행을 떠날 때 타고 간 차는 엘란트라. 이제는 거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그 차는 정배의 친구 만화가가 빌려준 차다. 사실 이 친구. 실력은 별로 없지만 역시 큰 프로젝트에 솔깃해 구상을 하고 있었는데 옆방의 정배가 젊은 여자 스토리 작가를 구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 사이에 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엉뚱한 상상을 하다가 두 사람의 관계가 언제까지나 미지근하고 건조하고 재미없는 관계로 남아있자 저도 모르게 그만 덜컥 차를 빌려주며 여행이라고 다녀오라고 소리치고 만다. 마음은 고마운데, 이 차, 나름 ‘선더볼트’라고 이름 지은 이 차, 참 오래된 엘란트라다. 차체에 그려진 강력한 그림하며, 시동도 잘 걸리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고 수리비가 꽤 들 것 같은 차. 어쨌든 정배와 다림은 그 엘란트라를 타고 여행을 떠나고 차가 고장 나 덜덜거리는 바람에 더욱 친해졌고 함께 웃으며 마음을 열 수 있었으니 친구가 빌려준 엘란트라야말로 그 오랜 수명 누리던 중 가장 행복하고 가장 값진 일을 해낸 것이리라.

글·신지혜(아나운서. CBS-FM <신지혜의 영화음악> 제작 및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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