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닝엄의 영광을 다시 한 번, 르망 클래식 도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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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닝엄의 영광을 다시 한 번, 르망 클래식 도전기
  • 줄리언 밤(Julian Balme)
  • 승인 2020.07.24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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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함으로 인기를 얻은 커닝엄의 오리지널 모델은 박물관에 있지만, 개인 자격으로 출전할 때 쓴 캐딜락 차들은 성실한 애호가 한 명의 손에 의해 다시 달리고 있다

히스토릭 경주에서 이제 데릭 드링크워터(Derek Drinkwater)에 견줄만한 사람은 없다. 출발선에 도열하는 사람들은 이제 부유한 애호가의 자녀들이 아니라면 자신의 이력을 더 풍부하게 채우기 위한 또 하나의 수단으로서 빈티지 경주를 바라보는 프로 선수들이다.

두 부류의 사람들은 가능한 가장 경쟁력 있는 차를 몰고 싶어 한다. 그럴 만한 사람들의 후원과 지지를 받는 만큼, 이런 상황은 레플리카(복제차) 제작을 사실상 부추겨 왔다.

흐름은 빠르고 맹렬할지언정, 경주의 진정성이나 다양함은 부족한 편이다. 그래서 요즘은 쉘비 코브라나 포드 GT40을 봐도 출처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한창 쌩쌩한 시기를 지나 보내고, 납득할 만하지만 대단하지는 않은 예산을 갖고 있으면서, 못생겼을 뿐 아니라 처음 경주를 시작하기에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차를 원하는 사람을 보면 신선하다는 생각이 든다.

드링크워터는 ‘정말 르망 경주에 출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비싸서 살 수 없었던 차들을 모두 둘러보면서, 우리는 커닝엄이 처음 출전했을 때 탔던 것처럼 캐딜락을 사기로 결심했죠.” ‘우리’란 데릭과 그의 아내 팻(Pat)을 말한다. 팻은 미국산 대형차에 대한 애정에 있어서는 남편 못지 않다.  “주최측이 호의적으로 대할 만큼 뭔가 특별한 차를 원하기도 했죠.”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기존 형태의 운전석이지만 현대식 안전 키트가 더해졌다
계기판은 보기 힘들다
오리지널 커닝엄 차량과 완전히 일치하는 스트랩
많이 사용되는 V8

데릭은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던 브릭스 스위프트 커닝엄(Briggs Swift Cunningham)처럼 젊은 시절에는 스포츠에 열성적이었고, 수상 스포츠도 그 중 하나였다. 오하이오 출신인 커닝엄이 아메리카 컵에 출전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그 역시 실력 있는 조정 선수였고 국가대표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가 정말 즐겼던 것은 보트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 사이클링에서도 마찬가지로 장비는 경쟁만큼 큰 매력거리가 되었다.

드링크워터가 젊었을 때 자동차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 그가 모터스포츠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은 로버 V8 엔진을 얹은 카프리로 그 엔진을 쓴 차들이 출전하는 드래그 경주 시리즈에 출전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제 ‘팀’ 이름은 KMA 레이싱이었어요. ‘엿 먹어라’(Kiss My Arse)는 뜻이었는데, 열여덟 살짜리의 장난이었죠. 셰이키(Shakey, 셰익스피어), 더 포드(The Pod)는 물론이고 멀리 떨어진 요크(York)에 이르기까지 어디든 갔어요. 요크까지 갔을 때에는 첫 라운드에서 탈락했지만요.” 

빠른 미국산 승용차들이 그의 손을 거쳐 갔고, 마침내 2013년에 그는 히스토릭 경주에 출전했다. 처음에는 포드 머스탱으로, 그 다음에는 1964년형 갤럭시로 출전했다. “스파 6시간은 늘 출전하고 싶었던 경주였기 때문에, 2015년에 출전은 물론이고 완주까지 한 것이 정말 기뻤어요. 절반쯤 지났을 때 브레이크 패드를 교체했지만, 하려고 했던 일의 성과를 거둔 거죠.”

그와 팻은 푹 빠졌고, 그해가 끝나기 전에 그들의 다음 모험을 향한 배는 이미 물 위에 떠 있었다. 1950년 형 2도어 캐딜락을 얻은 것이다. “팻이 제 탐색기 역할을 합니다.” 데릭의 고백이다. “인터넷을 뒤져서 가장 가능성 없는 차들을 계속 찾아내죠.” 브릭스 커닝엄이 르망에서 썼던 것과 비슷한, 희귀하기 그지없는 3단 수동 캐딜락 쿠페 같은 차들 말이다.

 

데릭 드링크워터와 팻 드링크워터 부부

커닝엄이 1950년에 르망 24시간 경주에 처음 출전했을 때, 그는 제너럴 모터스의 기함 브랜드인 캐딜락 차를 두 대 가지고 나갔다. 부유한 명문가 출신의 미국인 기업가였던 그는 예일대 동기였던 마일즈와 샘 콜리어(Miles, Sam Collier) 형제와 오랫동안 경주에서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 형제는 SCCA의 전신인 미국자동차경주클럽(Automobile Racing Club of America)을 설립한 사람들이다. 세 사람이 나눈 대화가 커닝엄이 13년 동안 전통 있는 프랑스 내구 레이스에 이름을 올리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전설이 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신발상자’ 포드 쿠페에 캐딜락의 V8 5.4L 엔진을 얹어 만든 핫 로드인 포딜락(Fordillac)으로 출전할 생각이었지만, 르망 경주를 주관하는 서부자동차클럽(Automobile Club de l’Ouest)은 양산 모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개념을 거부했다. 당시 캐딜락 사장이던 에드 콜(Ed Cole)은 커닝엄이 출전한다는 소문을 듣고 선택사항인 3단 변속기를 단 시리즈 61 쿠페(휠베이스가 3099mm로 당시 캐딜락 풀사이즈 모델 중 가장 짧았다) 두 대를 그에게 내어 주었다.

포딜락을 만든 프릭태핏 모터스(Frick-Tappet Motors)를 막 사들인 커닝엄은 그 회사에게 캐딜락 두 대를 준비하도록 맡겼다. 한 대는 출고된 차체를 그대로 쓰고, 다른 하나는 로드스터로 만드는 것이었다. 원래 섀시와 구동계를 유지하는 한, 주최 측은 출전을 허락할 것이었다.

프릭태핏 가까이에는 항공 분야에서는 상당한 거물 업체인 그루먼 에어크래프트 엔지니어링 코퍼레이션(Grumman Aircraft Engineering Corporation)이 있었다. 열정적인 전문가들이 가득했던 그 회사에서 열두 명이 하룻밤에 세 시간씩 투자해 날렵한 차체를 특별히 제작할 셈이었다. 옆모습은 마치 비행기 날개 단면처럼 보였고, 조금은 공기역학적인 모습이기는 했지만 예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프랑스 언론은 그 로드스터를 ‘괴물(Le Monstre)’이라고 불렀다.

결승 이틀 전, 로드스터가 다른 곳도 아닌 아나지 코너에서 불운한 사고에 연루되었다. 경주 선수 필 월터스(Phil Walters)와 동승자가 탄 상태에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던 농부와 그의 수레에 부딪친 것이다. 동승자는 ACO 총무였던 레이몽 아카트(Raymond Acat)의 딸이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지만, 팀 스스로 경주에서 명예롭게 오명을 벗으려면 서둘러 수리를 해야 했다.

 

콜리어 형제가 운전한 '괴물'(Le Monstre)은 팀 동료를 이끌며 순위를 올린 끝에 각각 10위와 11위로 체커기를 받았다

콜리어 형제는 당시 ‘쁘띠 빠또(Petit Pataud)’라고 알려진 일반 세단을 몰고 종합 10위를 차지했다. 쁘띠 빠또는 대략 ‘작은 골치덩이’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월터스와 커닝엄은 11위에 올랐다. 브릭스가 마일즈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 차에 접이식 삽을 실어 놓았다면 더 나은 성적을 거뒀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바퀴에서 그는 뮬산 코너에서 모래 언덕에 멋지게 차를 처박아, 맨손으로 차를 파내느라 30분을 소비했다. 두 차 모두 다시 경주에 출전하지는 않았지만, 정중한 미국인들과 프랑스 애호가들 사이의 친밀감은 두터워졌다. 커닝엄 박물관을 세울 때, 1950년대 경주에 출전했던 선수들이 커닝엄 배지를 달고 캐딜락과 크라이슬러 엔진을 얹은 차들은 물론, 그 덕분에 유명해진 파란색과 흰색으로 차체를 칠한 재규어와 마세라티 경주차를 몰고 모여들었다.

커닝엄은 엄청난 클래식카 수집가였고, 그가 2003년에 세상을 떠난 뒤에는 마일즈 콜리어가 전시물들을 넘겨받았다. 콜리어는 플로리다에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포르쉐 콜렉션을 꾸려 놓고 있었다. 최근에 그곳은 레브즈 인스티튜트(Revs Institute)로 바뀌었고, 그곳에서 드링크워터 부부는 실제 경주에 출전했던 캐딜락 차들을 처음 보았다.

팻이 쿠페 경주차의 바탕으로 쓸 차를 찾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지만, 마침내 시애틀에서 한 대가 나타났다. 서둘러 송금한 뒤, 그들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주행거리가 짧고 아주 희귀한 개인 소유 캐딜락을 받았다. 그리고는 오리건 주에 사는 친구들을 만나러 달려갔고, 이어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배에 그 차를 실었다. 데릭은 실제로 차를 손에 넣기도 전에 이미 2016년 르망 클래식 경주에 참가신청을 해 놓았다.

또 다른 4도어 버전 캐딜락은 원래 예비용으로 샀지만, 부부가 시작한 또 다른 프로젝트를 위해 컨테이너에 실렸다. “그 차를 닦고, 브레이크를 점검하고 오일을 교환했어요.” 데릭은 기억을 되돌려 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차였고 1950년 이후로 1만3700km밖에 달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트레일러의 뒤를 따라 그 차를 몰고 르망으로 갔죠.”

 

데릭은 자동차 복원을 과장되게 다룬 TV쇼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금세 쿠페를 경주차로 바꿨다. “저는 뭐든지 급진적으로 일을 하지 않았고, 기본적으로 제가 가진 차를 가지고 작업하기 때문에 무척 간단했어요.” 그의 말이다. 그는 원래 차의 사진을 수백 장이나 찍어 놓았기 때문에 보닛 고정용 띠를 어디에 달아야할 지, 도어 패널이 어떤 색인지 정확히 알았다. 그는 꼼꼼한 세부 재현과 높은 정확성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다.

그가 후회하는 한 가지는 V8 5.4L 엔진의 재생과 준비 작업을 다른 곳에 맡긴 것이다.

“회사 평판이 좋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몰락한 것이나 다름없고 정말 실망스러웠어요.” 그의 말이다.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고 피트레인을 나설 뻔했죠. 실제로 한 바퀴를 돌고 되돌아왔어요. 흰색 옛날 자수 오버올을 입은 팀은 저에게 다시 달리라고 했지만, 던롭 브리지 바로 앞에서 멈춰 섰어요. 그리고는 출발선을 두 번 통과했으니 그것으로 예선이 끝났다는 거예요.”

엔진은 타버렸지만, ‘불굴의 의지’라는 표현이 딱 알맞게도, 망가진 엔진은 오히려 다가올 커다란 모험의 불씨를 당겼다. “캐딜락을 끌어와 캠프장으로 가져온 뒤, 우리는 계획을 세웠어요. 팻이 엔진 호이스트를 찾아서 사기 전까지 우리는 차에 얹을 엔진을 준비했죠. 새벽 세 시에 4도어에 있던 엔진을 2도어로 옮겨 얹었어요. 경주에 나갈 수 있게 된 거죠.” 그는 당연한 자부심이 섞인 목소리로 기억을 되짚었다.

쿠페로 출발선 상에 선 것에 흥분한 데릭은 트랙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방식의 전통적인 르망 스타트에서 세 번째로 출발했다. 시험을 거치지 않은 일반 양산차용 엔진이 커다란 캐딜락을 움직이게 하는 만큼, 느긋하게 달려 완주만이라도 하자는 생각이었다. 마지막 세션에 이르러서야 드링크워터는 제이슨과 루이스 케네디(Jason, Louise Kennedy)가 모는 란치아 아우렐리아와 접전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괴물’(Le Monstre)은 라 사르트 서킷에서 란치아 아우렐리아 B20과 희귀한 칼리스타 D120 라넬라와의 대결에서 선두에 서는 기묘한 광경을 보여줬다

그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마치 전함처럼 달리기는 했지만 저는 루이스를 따라잡았어요. 최고 랩타임을 17초나 줄인 것을 보면 벗어나려고 애쓴 것이 분명했지만, 계속 차이를 줄이며 쫓아갔죠. 추월하자마자 변속기가 망가지면서 저는 포르쉐 커브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스핀했어요.”

그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비틀거리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스티어링 컬럼에 달린 변속장치 수리작업을 마치고, 4도어 차를 트레일러에 실은 그는 자신의 경주차를 몰고 집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이런 경우에 늘 그렇듯, 웨스트 카운티에서 찾은 구동계 부품과 예비용 엔진을 포함한 섀시를 포함해 캐딜락 부품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데릭은 그것들을 가지고 대단한 계획을 세웠다. 팻이 이야기를 거든다. “그이가 ‘괴물’의 복제품을 만들고 싶다고 얘기했을 때, 저는 안 된다고 했어요. 몇 주가 지나고 난 뒤에 저희는 레브즈 인스티튜트에서 오리지널 모델의 사진을 찍고 있었죠. 매번 똑같이 반복되는 거예요!”

데릭은 뭔가에 일단 한 번 관심을 갖게 되면 그것에 대단히 집착하게 된다. 사진 한 장 보내지 않고도 2018년 르망 클래식에 참가신청을 할 정도로 말이다. 사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차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레브즈 인스티튜트 사람들은 훌륭해요. 폴 키어스타인(Paul Kierstein)이 더없이 큰 도움을 줬죠.” 데릭의 말이다. “그들은 트랙 모든 코너에서 몇 단 기어에 엔진 회전수를 얼마나 썼는지 기록한 주행 노트를 복사해 저에게 보내줬어요. 저희는 치수를 재고 사진을 찍었고 섀시 위의 종이에 투영해 비교했어요. 저는 밤낮 없이 일했지만 1월에 있었던 첫 참가신청을 놓쳤죠. 레브즈 사람들은 제가 차를 완성하리라 믿고 저에게 쉴 틈을 줘야한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써서 피터 오토(Peter Auto, 르망 클래식 주최자)에 보냈어요. 저는 2월 참가신청을 앞두고 있었고, 그래서 정말 차를 완성해야 했죠!”

데릭은 5개월 만에 직접 차 전체를 꾸몄다. 팻은 운전석에 쓸 희귀한 핫 로드용 부품들을 찾아냈다. 날개를 단 스튜어트 워너(Stewart Warner) 계기와 6000rpm까지 표시되는 선(Sun) 엔진 회전계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데릭은 카뷰레터 다섯 개가 연결된 독특한 흡기 매니폴드를 만들었다. 이는 에드 콜이 설계한 것이었다. 몇 가지를 타협하기는 했지만, 전동 연료 펌프와 냉각 팬, 16인치 타이어를 구할 수 없어 15인치 휠을 끼운 정도에 그쳤다. 헤드레스트는 원래 차에 쓰인 것보다 5cm 정도 더 높은데, 이는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을 때 운전자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롤 후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1950년 르망 24시 내구레이스를 앞두고 옛 던롭 커브에서 브릭스 커닝엄(왼쪽 앉아있는 사람)과 필 월터스(오른쪽)

1820kg이었던 시리즈 61 쿠페 드 빌과 비교하면 1678kg인 이 괴물은 가볍다고는 할 수 없지만, 데릭은 몰기가 훨씬 더 쉽다고 한다. “마치 카트처럼 회전하는 쿠페로 수없이 많은 코너를 달릴 것에 대비해 조율해야 합니다. 차동제한 디퍼렌셜도 없고 최고출력은 겨우 162마력이어서 저속 코너를 빨리 탈출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변속 레버가 스티어링 컬럼에 달려 있어서 변속은 고통스러울 만큼 느리죠. 빨리 다룰 수 없으니까요. 기어에 문제가 생기지 않으려면 연석이나 요철은 피해야 하지만, 차를 몰면 몰 수록 더 믿음이 갑니다.”

아쉽게도, 2018년은 2016년만큼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주말 이벤트를 마친 뒤에 팀 드링크워터와 괴물은 중도 포기했다. 집결 지역에서 마스터 킬 스위치(전기계통 전체를 차단하는 스위치)가 고장났지만, 관중 한 명에게서 스위스 군용 주머니칼을 빌려 교체하고는 제 시간에 출발선 뒤에 섰다. “시동이 걸리자 팬들이 환호성을 질렀어요.” 데릭이 회상한다. “우리가 즐기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해요! 경주선수용 장비 업체인 스탠드 21(Stand 21)에서 온 사람이 차에 앉아볼 수 있겠느냐고 물었어요. 그가 자리에 앉자 1950년의 원래 모습이 완벽하게 재현됐죠.”

차는 한 시간 동안 시계처럼 정확하게 달렸지만, 듀얼 마스터 실린더의 뒤 브레이크용 브레이크 액 탱크 틈새에서 브레이크액이 조금씩 새기 시작했다. 데릭은 야간 세션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달릴 수 있었지만, 이른 아침 동이 틀 무렵에 이르러 그의 교체 운전자가 앞 브레이크에서도 같은 현상이 생기기 전에 신중하게 중도 포기했다.

데릭과 팻, 그리고 그들의 팀원들은 프랑스에서 벌인 일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다음번에 우승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들의 도전이 지루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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