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본드, 그대가 운전해주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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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본드, 그대가 운전해주지 않겠나!
  • 리처드 헤즐틴(Richard Heseltine)
  • 승인 2020.01.05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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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시리즈 신작이 나오기 전에, 범죄와 싸우는 영화 속
가장 오랜 파트너인 제임스 본드와 애스턴 마틴 이야기를 해보자

희미한 오렌지색 물체가 쏜살같이 룸미러를 가득 채운다. 그것은 맥라렌이고, 누군가 한껏 몰아붙이고 있다. 에른스트 스타브로 블로펠트이거나, 그가 거느린 전문 킬러 중 한 명임에 틀림없다. 어쨌든, 당신에게는 살인면허가 있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TV 앞에 앉은 당신이 어떻게 상상하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다. 현실 세계에서는 총을 가진 악당이 여러분을 죽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오히려 콜레스테롤 과다와 길을 건너면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쪽이 더 위험하다. 그러나 비현실적 세계로 돌아가 보면, 당신은 거친 추격전을 기대하고 있다. 그렇다. 최신 하이퍼카에 비하면 애스턴 마틴 DB5는 노인이나 마찬가지지만, 모나코 너머 산간도로에서 제니아 오나토프가 모는 페라리 355와의 경쟁에서 이겼던 것이 떠오르지 않나? 당신은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

007 시리즈와의 관계는 멋진 모습에 매력을 더한다<br>
007 시리즈와의 관계는 멋진 모습에 매력을 더한다
DB5는 사진의 ‘썬더볼 작전’(Thunderball)을 비롯해 <br>여덟 개의 007 시리즈에서 주역을 맡았다<br>
DB5는 사진의 ‘썬더볼 작전’(Thunderball)을 비롯해 
여덟 개의 007 시리즈에서 주역을 맡았다

사실, 이런 경험은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연료계가 작동하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는 매연 속에서 달리고 있다. 맥라렌에 타고 있는 친구는 친근하게 손짓하고는 멀리 사라져 버린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당신이 제임스 본드가 아니라는 뜻이다. 사실, 당신은 어느 수요일에 연료주입구 레버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하며 서리(Surrey)에 있는 시험주행장에 갇혀 있는 얼간이일 뿐이다.

실버 버치 색 DB5의 눈부시게 멋진 모습을 마주쳤을 때, 감정적으로 흥분하지 않은 상태로 쳐다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DB5가 영화 007 시리즈에 나온 네 대의 후손들과 함께 있으니, 스크린에 크고 작은 모습으로 스쳐 지나가던 기억이 떠오르며 낭만적인 충동은 더욱 커진다. 영화 역사상 한 브랜드에 관해 이보다 더 밀접한 관계를 맺은 허구적 캐릭터는 없었고, 그런 관계는 애스턴 마틴이 세계 무대에서 입지를 지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유명한 배지<br>
유명한 배지
대시보드는 라디에이터 그릴 모습을 닮았다<br>
대시보드는 라디에이터 그릴 모습을 닮았다
고전적인 와이어 휠<br>
고전적인 와이어 휠
타덱 마렉이 설계한 영광스러운 6기통 엔진<br>
타덱 마렉이 설계한 영광스러운 6기통 엔진

1963년 영국 국제 모터쇼에서 DB5가 소개되었을 때, 모터스포츠에서 거둔 성공을 반영하는 빛은 서서히 사그라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틈새에 끼어든 것이 애스턴 마틴을 몰며 악에 맞서는 새로운 정의의 사도였지만, 만화 속 슈퍼 영웅은 아니었다. 제임스 본드에게는 결점이 있었다. 도구는 빈약했지만, 그것을 다루는 존재는 용감했다. 게다가, 그는 근본적으로 영국인으로서 나중에 잉글랜드 사람, 스코틀랜드 사람, 웨일즈 사람, 아일랜드 사람, 호주 사람이 연기하게 될 주인공이었다.

소설 속 본드가 처음 애스턴 마틴을 만난 것은 ‘골드핑거’(Goldfinger) 속에서였다. 첩보 기관이 그에게 준 것은 ‘배틀십 그레이’색 DB III이었다. 실제로는 그런 모델이 없었기 때문에, 저자 이안 플레밍이 참고한 것은 DB3 스포츠 경주차가 아니라 DB Mk III 쿠페(박스 기사 참조)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1964년에 영화화되면서, 007은 특수효과 전문가 존 스테어즈(John Stears)가 만든 신기한 무기들을 실은 최신 DB5로 무장했다. 시리즈 첫 번째 영화인 ‘살인번호(Dr. No)’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는 한편, 두 번째 시리즈는 논란을 일으켰다.

윌리엄 타운즈가 빚은 날렵한 모습은 애스턴 마틴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다<br>
윌리엄 타운즈가 빚은 날렵한 모습은 애스턴 마틴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다
‘여왕폐하 대작전’에서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은 조지 레이전비<br>
‘여왕폐하 대작전’에서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은 조지 레이전비

애스턴 마틴 워크스(Aston Martin Works)가 갓 복원한 <오토카>의 DB5 밴티지는 사출좌석과 다양한 무기를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작품이다. 특히 특별한 느낌이 드는 부분은 실내다. 페데리코 포르멘티(Federico Formenti)가 디자인한 윤곽은 당대의 것이지만, 실내 분위기는 다른 시대를 떠오르게 한다. 검은색 바탕에 흰 글씨가 들어간 스미스(Smiths) 계기가 라디에이터 그릴의 윤곽을 반영한 전형적 대시보드에 모여있는 모습에서는 그보다 10년 앞선 시절의 분위기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곳에는 제대로 된 GT에 어울리는 수준의 안락함과 정중함이 담겨 있다.

1964년에 <오토카>가 이른바 ‘언론 친화적인’ 밴티지 스펙 DB5로 측정했을 때, 1단 기어로는 시속 69km, 2단 기어로는 시속 106km를 기록했다. 10분의 1 정도 낮은 속도로 달리더라도, 가속감은 만족스러울 것이다. 트윈캠 흡기 밸브의 우렁찬 작동음 덕분에 직렬 6기통 3995cc 엔진은 화려한 소리를 내고, 토크는 풍부하다. 낮은 회전영역으로부터 가속은 느긋하게 이루어진다. ZF 5단 수동변속기를 빠르게 조작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클러치 역시 무거운 편이고, 느린 속도에서는 스티어링도 마찬가지다. 고속 커브에서는 정확하게 무거워지지만, 급커브에서는 반응이 손끝보다는 어깨를 통해 전달된다. 몰기에는 체력이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사로잡는 차다.

깔끔하고 넉넉한 실내<br>
깔끔하고 넉넉한 실내
뒤 필러에 있는 공기 배출구<br>
뒤 필러에 있는 공기 배출구
초기에 만들어진 차에는 카뷰레터 세 개를 단 6기통 엔진이 쓰였다<br>
초기에 만들어진 차에는 카뷰레터 세 개를 단 6기통 엔진이 쓰였다

DBS도 마찬가지지만, 이유는 다르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숀 코너리가 중고차 매매업자 출신 배우 조지 레이전비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새로운 본드가 등장했다. 한편, 애스턴 마틴은 스스로 변신하고 있었다. DB6이 발표된 1965년, 후속 모델이 이미 창조의 진통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디자인 협력업체인 카로체리아 투링(Carrozzeria Touring)은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고 머지않아 침몰하게 된다.

투링의 불행은 디자이너 윌리엄 타운즈(William Towns)가 경력을 쌓는데 도움을 주게 되는데, 그에게는 라인업을 채울 세 가지 모델에 대한 개요를 따르라는 지시가 내려진다. 기준이 되는 길이의 패스트백(DBS), 휠베이스가 짧은 쿠페, 길이를 늘린 4도어가 바로 그것이었다. 1966년 가을에 승인이 떨어지자 그는 1년 동안 첫 번째 과제의 윤곽을 완성했다. 1967년 7월이 되자 시제차가 완성되어 주행할 수 있었고, 애스턴 마틴은 신형 V8 엔진이 나올 때까지 DBS 시리즈의 첫 모델을 직렬 6기통 엔진으로 버텼다. 007 영화에서 이 애스턴 마틴 최신 모델이 맡은 역할은 홍보 담당이었다.

아주 희귀한 DB10을 포함해, 007 시리즈에 출연한 애스턴 마틴에는 곧 발할라가 더해진다<br>
아주 희귀한 DB10을 포함해, 007 시리즈에 출연한 애스턴 마틴에는 곧 발할라가 더해진다

‘여왕폐하 대작전’(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에서 보여준 레이전비의 연기는 당시에 혹평을 얻었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새로운 관점에서 비평이 이루어졌다. 분명한 것은 그가 넘어지지 않고 걸으며 말하는 것을 제대로 익혔다는 점이다. 영화 일곱 편에 출연하는 계약을 거부한 그의 결정은 처절한 결과를 낳았지만 말이다(007 영화 이후 그의 경력상 정점은 영화 ‘에마뉴엘 부인’(Emmanuelle) 시리즈에 출연한 것이었다). 비록 특별한 장치가 없는 DBS는 반짝 모습을 드러내는 데 그쳤지만, ‘여왕폐하 대작전’은 007 시리즈 중에서 자살 시도로 시작해 가장 우울한 결말로 끝을 맺는 이야기로 정리되었다.

타운즈가 디자인한 이전 모델인 DBS를 쫓고 있는 밴티지<br>
타운즈가 디자인한 이전 모델인 DBS를 쫓고 있는 밴티지

우리가 만난 DBS 밴티지는 제임스 본드가 탔던 것과 같은 올리브 그린 색으로, 영국식 정교함과 머슬카의 강력함이 잘 어우러진 차를 대표한다(타운즈는 미국 머슬카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다). 실내를 보면, 로커 스위치와 깊이 파인 스티어링 휠이 이전 DB 애스턴 마틴과는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제법 앙증맞은 차인데도, DBS의 달리는 느낌은 마치 큰 차를 모는 듯하다. 가속할 때 내는 소리 역시 제법 굵직하다. 익숙한 직렬 6기통 엔진은 백파이프에서 귀족적인 차에서만 낼 수 있는 공격적인 울부짖음을 내뱉는다. 차의 움직임은 너무 뚜렷하고 도그레그(dog-leg, 기어 레버 1단 위치가 왼쪽 아래인 배치)식 5단 수동변속기는 무기력하지만, 기어비는 완벽에 가깝고 파워 스티어링은 가벼우면서도 바퀴로부터 적당한 피드백을 전달한다. 승차감 역시 단단하지만 거칠지 않다. 이 차는 가장 솔직한 감각의 세련된 GT이고, 아주 묘한 매력이 있다. 영국 남부에 있는, 나무가 늘어선 서킷을 더 이상 달리고 싶지 않을 정도다. 대신, 석양 속에 머큐리 쿠거를 모는 아름답지만 골치 아픈 백작부인을 쫓으며 포르투갈의 긴초(Guincho) 해안도로를 달리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스포일러가 달린 공격적 앞 부분<br>
스포일러가 달린 공격적 앞 부분

DBS V8은 1969년 9월에 뒤늦게 출시되었지만, 1971년 말에 회사가 컴퍼니 디벨롭먼츠(Company Deveolpments)로 매각되면서 변화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새로운 관리자들이 이전 소유주인 데이비드 브라운(David Brown)과의 연결고리를 없애려고 했기 때문에, DBS라는 이름은 희생양이 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듯한 혼란을 거치며, 타운스의 산물인 DBS는 1989년까지 살아남아 마침내 비라지(Virage)로 대체되었다. 그때까지는 한 대도 제임스 본드의 차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레이전비가 떠난 뒤, 그의 뒤를 이은 로저 무어는 007의 ‘로터스 시대’를 거쳤다. 네 번째 공식 본드였던 티모시 달턴은 더 배려하고 나누는 - 여성과의 밀회는 적었던 - 007이었지만, 장르의 공식은 거의 따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애스턴 마틴을 출연시키는 결정은 막판에 이루어졌다. 그래서 차를 투입하는 데에는 어쩔 수 없이 문제가 있었다(촬영 중 최대 11대가 쓰였고, 그 가운데 일부는 모형이었다). 1987년에 개봉한 ‘리빙 데이라이트’(The Living Daylights) 초반부에 등장한 차는 V8 볼란테(Volante)였다. 나중에는 Q의 부서 내부에서 ‘겨울용 개조’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지붕을 씌운 상태였다)으로 등장하고, 영화 후반에는 스키, 미사일, 로켓 추진장치, 수많은 무기를 더한 모습을 드러낸다.

밴티지의 엔진에는 웨버 카뷰레터 네 개를 달았다<br>
밴티지의 엔진에는 웨버 카뷰레터 네 개를 달았다
대대적으로 손질한 실내<br>
대대적으로 손질한 실내
느린 변속기<br>
느린 변속기
강력한 V8 엔진은 406마력의 힘을 낸다<br>
강력한 V8 엔진은 406마력의 힘을 낸다

비무장 상태인 이 1984년형 밴티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떼어낸 그릴과 두툼한 앞 스포일러가 알맞게 위협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단호하다’라는 말이 더 적합하겠지만 말이다. 실내는 호두나무 목재와 버건디색 가죽으로 도배되어 있고, 몇 가지 인체공학적으로 이상한 것이 있기는 하지만 편안하다. 목재와 가죽을 쓰기는 했지만, 허세를 부리는 차는 아니다. 무게는 1780kg 정도지만, 그럼에도 무시무시할 만큼 빠르다. 잡지 ‘패스트 레인’(Fast Lane)에서는 시승차를 정지 상태에서 시속 161km까지 12.2초 만에 가속했다. 너무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앞으로 나가려는 추진력은 수그러들지 않는 느낌이다. 변속이 둔하기는 해도, 고전적인 V8 5340cc 엔진은 부드러움 그 자체다.

이 차에 쓰인 파워 스티어링은 림이 가는 스티어링 휠을 통해 풍부한 감각이 전해진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달리 말하면, 차의 덩치를 항상 느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접지력은 좋은데, 거대한 타이어 때문에 아스팔트 위로 솟아오른 곳을 지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덜컹거리기는 한다. 차체가 옆으로 많이 기울기는 하지만 움직임이 변덕스러운 느낌은 아니다. 다만 그런 움직임은 민첩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대단히 재미있지만, 결코 민첩하지는 않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타운즈’ 애스턴 마틴은 영화 속 007의 차로 돌아올 것이다.

제임스 본드가 독일 차를 몰던 삭막한 시기가 지나고, 뱅퀴시가 돌아와 자리를 차지했다<br>
제임스 본드가 독일 차를 몰던 삭막한 시기가 지나고, 뱅퀴시가 돌아와 자리를 차지했다
자오가 모는 재규어 XK가 ‘투명’ 애스턴 마틴을 쫓고 있다<br>
자오가 모는 재규어 XK가 ‘투명’ 애스턴 마틴을 쫓고 있다

피어스 브로스넌이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에 제임스 본드 역으로 출연한 것은 신세대 애스턴 마틴의 등장을 예고했다. 프로젝트 밴티지(Project Vantage)는 1998년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관람객을 놀라게 했고, 이언 컬럼이 디자인한 양산 버전 V12 뱅퀴시(Vanquish)는 2001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세계적 법규를 따르기 위해 처음으로 탄소섬유 충돌안전구조를 쓴 것이 특징이었고, 거기에 알루미늄 압출 부품과 강판을 더해 차체를 만들었다. 차에 쓰인 5.9L 엔진은 DB7 밴티지에서 가져온 것이었지만, 내부 관계자들이 ‘2세대’라고 부르는 개조를 거쳤다. 최고출력은 6500rpm에서 466마력을 냈고, 55.3kg·m이 넘는 최대토크는 5000rpm에서 나왔다.

<오토카>는 이 차를 ‘맥라렌 F1 다음으로 뛰어난 영국 슈퍼카’라고 말했다. 발표한 최고속도는 시속 315km, 0→시속 100km 가속은 4.6초였던 이 차는 동급에서 비슷한 성능을 찾기 어려웠지만, 애스턴 마틴에게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2004년 파리 모터쇼에 등장한 뱅퀴시 S는 신중한 디자인 손질과 함께 최고출력을 521마력으로 끌어 올림으로써 시속 320km의 벽을 깼다. 그러나 애스턴 마틴은 공식적으로 ‘적응형 위장’을 내놓은 적은 없었다. 제임스 본드의 DB5에 대한 경의 표시로서, 영화에 등장한 버전에는 차체 앞에서 발사하는 로켓과 사출좌석을 단 것이 특징이었다. 007은 얼어붙은 호수에서 뒤집어진 차를 바로잡을 때 사출좌석을 제대로 써먹었다.
한편, 애스턴 마틴 본사에서는…. 

실내 곳곳에는 포드 부품이 쓰였다<br>
실내 곳곳에는 포드 부품이 쓰였다
V12는 두 개의 포드 V6 엔진을 크게 손본 것이다<br>
V12는 두 개의 포드 V6 엔진을 크게 손본 것이다

뱅키시는 스릴을 보여줄 만큼의 능력을 잃지 않았다. 우리가 시승한 2003년형 모델은 무게 1845kg짜리 차로서는 대단히 빠르지만, 놀랄 정도는 아니다. 뱅퀴시가 구배, 가속, 경사 변화를 수월하게 감당하는 능력은 정말 놀랍다. 턴인은 지극히 정밀하고, 속도대응형 파워 스티어링은 느린 속도에서는 가볍지만 중요할 때에는 충분히 탄탄하다. 플라이 바이 와이어(전자식) 변속 패들은 달리고 있을 때에는 잘 작동하지만, 과격하게 달릴 때에는 변속하는 사이에 약간 덜컥거린다. 배기 바이패스 밸브가 열리는 순간에는 가속이 정말 빠른 차를 몰 때 익숙하게 느낄 수 있는 멀미가 난다. 중독성이 있다.

2006년에 다니엘 크레이그가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에 출연하면서 영화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리고 차도 바뀌었다. 007 시리즈가 TV 시리즈 ‘24’를 의식하고 영화 ‘본’ 시리즈와 비슷한 분위기로 다시 시작한 것과 아주 비슷하게, 애스턴 마틴의 새 기함은 역사적으로 큰 획을 그은 흔적들의 늪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브랜드의 과거를 이어받았다. 마렉 라이히만(Marek Reichman)의 지휘 아래에서 디자인한 첫 모델인 DBS V12는 DBR9와 DBRS9 GT 경주차의 특징적 요소를 반영했다. 화려한 치장은 없지만, 르망 경주차에 뿌리를 두었음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앞 스플리터, 보닛 공기 배출구, 공격적으로 부풀린 차체 뒷부분 때문만은 아니다. 이 차에는 고풍스러운 매력이 있다.

공격적인 모습의 슈퍼 GT<br>
공격적인 모습의 슈퍼 GT
‘퀀텀 오브 솔라스’에서 부서진 DBS를 쫓고 있는 알파 로메오<br>
‘퀀텀 오브 솔라스’에서 부서진 DBS를 쫓고 있는 알파 로메오

그렇다고 해서 장인정신을 담은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6.0L V12 48밸브 엔진은 손으로 조립했고, 6500rpm에서 517마력의 최고출력을 낸다. 1696kg으로 적잖이 무거운 데도, DBS는 4.3초 만에 시속 97km까지 가속하고, 공식 발표 수치가 믿을 만 하다면 시속 307km까지 속도를 낼 수 있다. 그리고 그러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른 것은 몰라도, DBS는 ‘퀀텀 오브 솔라스’(Quantum of Solace)에 나온 것처럼 알파 로메로 159쯤은 거뜬히 능가한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물결 무늬 가죽과 알칸타라 내장재, 브러시드 알루미늄 센터 콘솔, 크롬 도금 스위치를 갖춘 DBS는 2007년에 생산을 시작할 당시에는 현대적 세련미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이모션 컨트롤 유니트’(진짜로 이런 이름을 붙였다)를 넣으면, 소프트웨어로 제어하는 신호가 당신의 존재를 알린다. 애스턴 마틴의 터치트로닉(Touchtronic) 변속기를 갖춰, 기어 변속은 즉각적이면서 작동을 거의 알아차릴 수 없고, 구동계는 느리게 움직일 때 거친 느낌이 없다.

실내는 뱅퀴시보다 좀 더 맞춤 제작한 느낌이다<br>
실내는 뱅퀴시보다 좀 더 맞춤 제작한 느낌이다
DBS라는 이름이 새 기함 모델을 통해 부활했다<br>
DBS라는 이름이 새 기함 모델을 통해 부활했다
강력한 힘을 내는 V12 엔진<br>
강력한 힘을 내는 V12 엔진

이 차는 전형적 그란 투리스모이면서도 조향감각은 민첩하고, 승차감은 거대한 20인치 휠에 초저편평비 타이어를 끼웠는데도 적당히 여유가 있다. DSC 설정을 조절해 제멋대로 움직이게 만들려면 어느 정도 자극이 필요하다. 그리고 용감해야 한다. 이 차는 크고, 일단 화끈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면 007의 기술이 있어야 길들일 수 있다.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제임스 본드를 우러러볼 만하지만 현실과는 관계없는 과거의 잔재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핵심을 놓친 것이다. 007의 마력은 절대 사그라지지 않았다. 애스턴 마틴도 마찬가지여서, 가장 유명한 소설 속 첩보원처럼 낯선 존재면서도 폭넓은 대중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요즘에는 애스턴 마틴이 아닌 다른 브랜드 차를 모는 제임스 본드를 상상할 수 없을 듯하다. ‘스펙터’(Spectre)에 등장한 DB10이 영화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처럼 말이다(박스 기사 참조).

부드러운 스타일은 신형 밴티지에 영향을 주었다<br>
부드러운 스타일은 신형 밴티지에 영향을 주었다

우리가 만나본 애스턴 마틴 중 어느 차가 가장 훌륭한 지를 따지는 것은, 누가 가장 훌륭한 제임스 본드였는지를 따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은 숀 코너리가 본보기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내년에 개봉할 ‘노 타임 투 다이’(No Time to Die)에 등장할 예정인 발할라(Valhalla)를 포함해, 007 시리즈에 등장한 모든 애스턴 마틴은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리라는 것과도 비슷하다. DB5는 55년에 걸쳐 8개 007 시리즈에 모습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캐논볼’(Cannonball Run)로부터 ‘001 첩보원 솔로’(Return of the Man from U.N.C.L.E. - 조지 레이전비가 까메오 출연하기도 했다)에 이르는 여러 영화에 조연으로 등장했다. 애스턴 마틴은 심지어 25대의 복제차를 생산할 계획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처럼, 007 시리즈 속 DB5의 매력은 변치 않는다.

시승차 협조: 애스턴 마틴 오너스 클럽 (www.amoc.com); V8 밴티지 제공 - 헥사곤 클래식스 (www.hexagonclassics.com); DB5 제공 - 애스턴 마틴 워크스  (www.astonmartinworks.com) 

 

 

007 시리즈 최고의 악당 차 다섯 대

라살 영구차
영화 속 차들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이 공식이나 다름없던 시절이 있었고, 이국적인 차들의 경우에는 비슷한 모습에 좀 더 값싼 차로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1939년형 라살 영구차는 어땠을까? ‘살인번호’에서, 제임스 본드가 모는 선빔 알파인을 쫓다가 ‘앞 못 보는 세 마리 쥐’에 의해 자마이카 블루 마운틴에서 떨어진 차가 그런 경우로, 길에서 벗어나는 순간 험버 장의차로 바뀌었다.

롤스로이스 팬텀 III
오릭 골드핑거(거트 프로브 분)가 슈퍼 악당의 시초로서 등장한 ‘골드 핑거’는 훌륭한 007 시리즈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차는 아주 멋진 스포츠카는 아니었다. 대신, 그에게는 코치빌더 바커 세당카(Barker Sedanca)의 드빌 차체를 입힌 롤스로이스와 함께 운전사인 오드잡(Oddjob)이 있었다. 오드잡은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중절모로 끔찍한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롤스로이스는 금으로 만들었고, 해외로 밀반출된 뒤 녹여버렸다고 한다.

던햄 콜보라도
007 시리즈를 스쳐지나간 차들 중 가장 기괴한 것을 꼽자면, 운전석 사이드 미러에 총을 달고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에 등장한 콜보라도가 있다. 영화에서 사파리 복장을 입은 로저 무어는 죽은 사람이 몰고 있는 차에 타고 있다는 것을 알고 황당해 한다. 미국 뉴저지주에 있던 던햄 코치가 만든 콜보라도는 콜벳 섀시에 캐딜락 엘도라도의 차체 패널을 단 것으로, 7대가 만들어졌다.

AMC 매터도어
‘황금총을 든 사나이’(The Man with the Golden Gun)는 제품삽입광고(PPL) 면에서 AMC에게 교훈을 주었다. 제임스 본드는 방콕 매장에서 빨간색 호넷을 훔쳐 젖꼭지가 많은 암살자인 프란치스코 스카라망가(크리스토퍼 리 분)를 추격한다. 공중회전을 한 뒤에 스카라망가가 모는 AMC 매터도어 쿠페에서는 날개가 뻗어나와 비행기로 변신한다

(스포일러: 사실은 무선조종 모형이었다).

재규어 C-X75
비극적으로 태어나지 못한 재규어 C-X75는 시리즈 24번 째 영화인 ‘스펙터’에 깜짝 등장했다. 시제차 형태로만 존재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영화에 쓰인 차는 복제품이었다), 킬러이자 거인인 ‘미스터 힝크스’(Mr. Hinx, 레슬러 출신 배우 데이비드 보티스타)가 운전은커녕 차에 타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접어둬야 했다.

 

제임스 본드를 위해 만든 DB를 시승하다

재규어 C-X75를 따돌리는 DB10<br>
재규어 C-X75를 따돌리는 DB10

제임스 본드를 위해 유일하게 맞춤 제작한 차는 차체를 바꾼 4.7L 밴티지로, ‘스펙터’를 감독한 샘 멘데스(Sam Mendes)의 고집 때문에 수동변속기를 달았다. 밴티지라고는 했지만 한 대가 아니라 열 대가 만들어져 촬영과 홍보에 쓰였고, 촬영 중 스턴트로 희생되는 차에서 흠집 하나 없는 영웅의 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태로 바뀌었다. 일반 도로용으로 등록된 차는 하나도 없어서, DB10의 시승은 사설 시험용 트랙에서 이루어졌다.

안팎 모두 멋진 모습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양산차가 아니라 촬영용 소품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창문은 물론 트렁크도 열리지 않고, 트랙션 컨트롤을 끄려면 조수석 발밑 공간을 헤집고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달리는 느낌은 예상한 그대로다. 더 넓은 타이어와 더 가벼운 탄소섬유 차체 덕분에 구동력이 더 커질 것이라는 내 이론을 시험하기 위해 계측장비를 달아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바탕이 된 밴티지보다 실제로 더 빠를 것 같았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클러치는 살짝 미끄러지고 엔진 회전계는 고장나서, 소리를 기준 삼아 변속해야 했다. 그 점과 함께 내가 수백만 파운드의 값어치가 있는 무척 희귀하고 특별한 차를 몰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양산차보다 더 점잖게 차를 다뤘다. 그럼에도, 0→시속 97km 가속 5.7초라는 기록은 영화 속에서 주장했던 3.2초와는 차이가 무척 컸다. 내가 좀 더 거칠게 다뤘다면 밴티지가 기록한 4.6초를 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차를 몰아보고 즐길 수 있었던 것은 특권이었다. 내가 했던 것처럼 한계를 시험해본 사람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시속 241km가 넘는 속도에서 공기역학적으로 안정적이고 다른 모든 밴티지만큼 쉽게 미끄러진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그 차를 되돌려 주는 것이 가장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망가뜨려 Q의 부서로부터 분노를 사는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글·앤드류 프랭클(Andrew Frank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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