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식한 완벽주의자, 앙드레 시트로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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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식한 완벽주의자, 앙드레 시트로엥
  • 존 프레스널(Jon Pressnell)
  • 승인 2019.11.25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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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기 전, 역동적인 선구자 앙드레 시트로엥이 자신의 사치스러운 사업 기법을 통해 프랑스 자동차 산업을 뒤흔들었다
더블 쉐브론을 움직인 사람, 앙드레 시트로엥<br>
더블 쉐브론을 움직인 사람, 앙드레 시트로엥

앙드레 시트로엥(André Citroën)은 자동차 역사상 가장 특이한 인물 중 한 명이고, 당대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은 사업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자동차 업계에서 했던 일은 다른 자동차 업계 거물들이 따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개 시트로엥은 가장 먼저 그 일을 했고, 그런 일을 더 크고 더 뛰어나고 더 화려하게 했다.

기술자로 훈련을 받기는 했지만, 그는 직접 기술자로 일하지는 않았다. 허버트 오스틴(Herbert Austin, 오스틴의 창업자)은 기차 여행 중에 직접 앞 차축 배치를 스케치했고, 훗날 너필드 경(Lord Nuffield)이라는 칭호를 받은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모리스의 창업자)는 골프장 클럽 하우스 주차장에서 골프 파트너의 카뷰레터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가장 좋아했던 것과 달리, 앙드레 시트로엥은 요란스럽게 자신을 내세우거나 카지노에서 엄청난 금액을 걸고 도박을 하는 쪽에 더 가까웠다.

시트로엥 타입 A가 케 드 자벨 공장에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br>
시트로엥 타입 A가 케 드 자벨 공장에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많은 주목을 받은 이 마지막 열정은 아마도 과장된 것이었으리라. 시트로엥은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았던, 이야기를 통해 알려진 것보다 더 신중한 도박사였다고 한다. 게다가, 그의 가족은 번영을 누리며 살았던 것이 틀림없지만 파리에 있는 그의 집과 도빌(Dauville) 해변 리조트에 있는 그의 별장 모두 그의 소유는 아니었고 요트 같은 사치품도 갖지 않았다. 잘 나가는 자본가처럼 보이기는 했겠지만, 이는 너필드 경이 자신의 거대한 모리스 사업을 내세우지 않았던 것보다 시트로엥이 자신의 회사에서 가져간 것이 훨씬 더 적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시트로엥의 사업은 그의 인생 자체였고, 이익을 회사에 재투자한 것은 사업상 반드시 해야 하는 일처럼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시트로엥은 호화로운 독점 판매업체와 전시장에 상당한 비용을 투자했다<br>
시트로엥은 호화로운 독점 판매업체와 전시장에 상당한 비용을 투자했다

시트로엥은 파란만장하고, 역동적이고, 화려함이 빛나는 사람이었고, 홍보에 타고난 소질이 있었다. 지적으로 예민하고, 깔끔하며, 조직적이고, 엄청난 기억력이라는 축복을 받은 그는 충동적이고, 훌륭한 경험을 바탕으로 재빨리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직원들을 가르칠 때에는 간결하게 지적하면서 좀 더 다가가기 쉽고 상냥하며 전혀 쌀쌀맞지 않은 편안한 모습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오랜 시간 일하며 매일 조립 라인을 살펴보기로 유명한 회사 사장으로서 존재감이 큰 사람이기도 했다.

그에게서 비롯된 충성심은 그가 성공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대리인들이 마치 커다란 가족의 일원인 듯 느끼게 만들어 그들이 제공한 재정지원으로 자신의 사업을 일굴 수 있었던 것이다. 매년 딜러와 독점 판매업자들을 위해 열었던 전설적인 연회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 수는 있었겠지만, 그런 사람들의 충성심을 지키고 그들이 기꺼이 회사의 자금 조달을 이어나가도록 지갑을 열게 만드는 데 쓰는 비용으로서는 충분히 지불할 만한 것이었다.

에펠탑을 밝힌 것은 마케팅의 쾌거였다<br>
시트로엥 로고로 에펠탑을 밝힌 것은 마케팅의 쾌거였다

어두운 사업 세계에서는 그런 사람이 불편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키가 작고 머리가 벗겨진 시트로엥은 대하기 쉬운 그의 매력 덕분에 늘 보기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그는 복잡한 신용거래로 재정을 마련했고 주로 재고를 확보한 중고차를 담보로 하는 방법을 썼다. 이는 위험한 일이었다. 신용을 유지하기 위해 판매 시장에 신경 쓰지 않고 자동차 생산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이는 회사와 프랑스 자동차 시장이 계속 확장해야만 유지될 수 있었고, 시트로엥의 야심찬 본성과는 달리 재정적인 관점에서는 카드로 지은 불안한 집처럼 언제든 무너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구적 모델인 타입 A는 프랑스 최초의 양산차로 알려졌다<br>
선구적 모델인 타입 A는 프랑스 최초의 양산차로 알려졌다

이 취약성을 악화시킨 것은 시트로엥이 높은 이자율과 회사의 매출을 바탕으로 하는 보너스와 연계해 10년 만기 저축채권을 공모해 2차 자금을 조달한 것이었다. 은행권 밖으로 나가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는 은행을 통하는 대신 딜러들을 통해 그런 계획을 실행했다. 은행들과의 친분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이런 것을 추천하기는 어려웠지만, 불황이 생기면 높은 이자율이 회사에 심각한 피해를 줄 위험이 있었다.

이런 배경에 맞선 것은 홍보담당자 역할을 한 시트로엥 본인이었다. 조금은 솔직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던 윌리엄 모리스가 광고에 대한 비용을 아꼈던 것과 달리, 시트로엥은 자신의 제품을 홍보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프랑스 전역의 도로 표지판 10만 개에 회사 이름과 로고를 넣는 비용을 지불했다. 그는 파리 하늘에 비행기로 '시트로엥'이라는 거대한 글씨를 썼다. 그의 대담한 광고 중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 그의 아이디어는 아니었지만 - 에펠탑에 시트로엥이라는 이름을 빛나게 한 것이었다.

저렴한 1922년형 5hp는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단종되었다<br>
저렴한 1922년형 5hp는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단종되었다

이처럼 대담한 계획들은 엄청난 비용을 들인 어리석은 짓으로 여겨져 왔다. 사실, 초기 전기 작가인 샤를 로체란(Charles Rocherand)이 확인한 대로 매출에서 광고비가 차지하는 비율 관점에서 보면 시트로엥의 지출은 미국 자동차 업체들과 비교하면 양반이었다. 로체란은 에펠탑 조명의 연간 비용을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문 100개에 하루 동안 전면 광고를 내는 데 드는 비용의 대략 두 배 정도로 계산했다.

그런 모험은 시트로엥이 1922년부터 시트로엥-케그레스(Citroën-Kégresse) 반궤도차로 이루어진 세 차례의 탐험에 재정지원을 한 것에 비하면 빛이 바랬다. 대중이 식민지 개척에 매료되었던 당시에는 아프리카 및 아시아 횡단 오지 탐험을 통해 만들어진 홍보효과가 엄청났고, 시트로엥은 모든 가치를 뽑아냈다. 1924년 사하라 사막 횡단에 처음 쓰인 르노의 이중 뒤차축 경트럭이 무겁고 복잡하며 몰기 까다로운 반궤도차보다 더 실용적이었다는 사실은 왠지 간과되었다. 사실, 한 관찰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그런 일을 하기에는 오스틴 세븐이 더 나았으리라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세계 언론을 차지한 영상, 전시회, 칼럼이었다.

반궤도차 탐험 – 니제르 진더(Zinder)에 도착한 크로와제르 느와르(Croisière Noire)의 모습 - 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br>
반궤도차 탐험 – 니제르 진더(Zinder)에 도착한 크로와제르 느와르(Croisière Noire)의 모습 - 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택시와 버스 사업을 시작하는 것에서부터 양철판으로 만든 시트로엥 장난감 차를 파는 것에 이르기까지,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도 무시하지 않았다. 앙드레 시트로엥은 아이가 처음 하는 말은 ‘아빠’, ‘엄마’ 그리고 ‘시트로엥’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1925년까지 프랑스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 가운데 30퍼센트에 가까운 수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파리와 지방에 호화로운 전시장이 만들어져 은행을 실망시켰다. 리옹의 판매상은 ‘유럽 최대의 서비스 센터ʼ라 불렸고 그 건물은 나중에 역사적 기념물로 공표될 만큼 웅장했다. 해외 자회사에도 자금을 쏟아 부었다. 파리에 제 2공장을 세울 때에는 운영비용이 불필요하게 많이 들 것임에도 최대한 사치스럽게 만들기 위해 모든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낡은 설비 때문에 1931년형 C6은 보수적인 모습으로 만들어졌다<br>
낡은 설비 때문에 1931년형 C6은 보수적인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적어도 대중의 관심은 끌었던 화려함 뒤에는 미래를 내다보는 생산 기술자로서 시트로엥이 가진 뛰어난 강점이 있었다. 그는 V자 모양 기어를 한 번에 절삭하는 기술을 완성함으로써 부를 쌓았다. 그는 모스(Mors) 자동차 공장에서 생산 공정을 개선하는 일을 했고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박격포 포탄 대량 생산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나중에 이 기술들을 자동차 생산에 반영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그의 영악함만큼이나 가차 없이 모델 수를 한정적으로 유지하며 한 가지 기본 설계로 여러 모델을 만들었다. 불과 1년 만에 작은 5hp 모델을 단종하면서, 그는 수익성이 낮고 독자적인 기계요소가 채산성을 떨어뜨린다면 상징적이고 잘 팔리는 모델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버드(Budd)의 전금속 차체 구조 제작법에 관한 권리를 매입하면서 처음으로 큰 발전을 이루었다. 그는 목재 프레임 제작의 노동 집약적 특성 때문에 생기는 생산 병목현상을 없애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통적인 차체 생산은 병목현상을 일으켰다<br>
전통적인 차체 생산은 병목현상을 일으켰다

그는 늘 그랬듯 1925년형 모델에 반영하기 위해 - 모리스보다 2년 앞선 것이었다 - 설치할 차체에 맞춰 섀시를 유연하게 만드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전금속 차체 생산을 서둘렀다. 초기 자동차에서 차체를 변형하는 대재앙을 겪은 것은 유익한 경고였다. 시트로엥은 작은 단계를 거치는 것보다 큰 발전을 취하하는 것이 만족스러운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지만, 그런 철학은 위험으로 가득한 것이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그는 작은 프레스 부품들을 용접하거나 볼트나 리벳으로 결합하는 모듈 구성으로 차체를 만드는 대신, 큰 프레스 부품을 활용하도록 더 진화된 시스템을 택했다. 이는 그가 실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연간 생산율을 크게 높여야 비용을 상쇄할 수 있을 만큼 값비싼 기계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차는 제조비용이 높았고, 그는 덜 야심찬 차체 구조를 택했을 때보다 오랫동안 같은 설비를 활용해야했다.

별도 섀시를 없앰으로써 무게를 줄였다<br>
별도 섀시를 없앰으로써 무게를 줄였다

마찬가지로, 훗날 1933년부터 불꽃 용접으로 만든 ‘단일체’(monopiece) 철체 차체를 쓴 것은 적절한 것이었다. 스폿 용접한 패널로 만든 차체보다 튼튼하고 가벼운 이 새 차체는 일체형 철제 바닥을 갖춰 생산 비용이 저렴했고 경량 모노코크를 만드는 데 이상적이었다. 그러나 의도한 경제성은 높은 설비비용을 갚고 난 뒤에야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시트로엥은 생산 규모가 미국 수준에 이르러야만 채산성이 생긴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다시금 최신 기술의 유혹에 희생양이 되었다. 공정이 계속되어 비용을 지불할 수 있으려면, 설비를 활용한 차의 생산량을 늘려야만 했다.

그것은 매년 더 많은 차를 만들거나 - 경제 불황 시기에는 어려운 일이다 - 차를 바꾸지 않고 오랜 기간에 걸쳐 생산하는 것을 의미했다. 둘 다 할 수 있다면 이상적이겠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금세 식상해지지 않아 오래 생산할 수 있는 모델이 필요했다. 이는 기술적으로 앞서는 차여야 경쟁자 대비 장점이 오래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앞바퀴 굴림 방식으로 시트로엥은 경쟁자들을 앞섰다<br>
앞바퀴 굴림 방식으로 시트로엥은 경쟁자들을 앞섰다

앙드레 시트로엥이 모노코크 구조를 앞바퀴굴림 방식을 비롯해 다른 여러 첨단 기능을 결합한 차를 만들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트락숑 아방’(Traction Avant)을 통해 엔지니어와 사업가로서 시트로엥이 가진 모든 강점들은 물론 그의 모든 약점들도 볼 수 있었다.

생산 비용을 낮추기 위해, 그는 항상 원자재 사용량을 줄이면서도 생산 공정을 단순화하는 방법을 탐구했다. 별도의 섀시를 쓰지 않음으로써 두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할 수 있는 한편, 앞바퀴굴림 방식으로 전환하면 프로펠러 샤프트와 뒤 차축을 없앨 수 있어 차에 쓰이는 금속의 양을 더 줄일 수 있었다. 실제로, 차 무게를 30% 줄이면 차의 단가가 20% 낮아진다는 계산이 나왔다.

트락숑 아방을 위한 새 공장은 지나치도록 결벽스럽게 설비를 갖췄고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br>
트락숑 아방을 위한 새 공장은 지나치도록 결벽스럽게 설비를 갖췄고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그보다 더 뚜렷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있었다. 게임은 계속되고 있었고, 무척 평범한 차를 만들고 있던 시트로엥은 경쟁에서 뒤처진 상태였다. 그의 주요 경쟁자인 르노는 늘 그랬듯 지나치게 보수적이어서 대가를 치르게 되지만, 다른 업체들은 새로운 해법을 지지하고 있었다. 독립식 앞 서스펜션의 시대가 올 것은 분명했고, 푸조는 1932년형 모델에 독립식 앞 서스펜션을 쓴 차를 내놓음으로써 프랑스 3대 업체 가운데에서도 선도적 역할을 했다. 심지어 독립식 뒤 서스펜션을 내놓는 것도 망설인 것과 달리, 오버헤드 밸브 엔진과 유압식 브레이크처럼 다른 나라에서 앞서 선보인 혁신성이 낮은 기술들을 프랑스 업체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마티스(Mathis)처럼 별 볼일 없는 회사가 네 바퀴 독립 서스펜션을 쓴 차를 전시하고, 오스틴 세븐을 재탕한 것으로 더 잘 알려진 로젠가르트(Rosengart)가 독일 아들러(Adler) 차의 기술에서 파생된 슈퍼트락숑(Supertraction)을 내놓았을 때에도, 시트로엥의 튼튼하지만 상상력이 부족한 제품들이 제법 교활한 푸조 사람들은 제쳐두고서라도, 업계의 하찮은 회사들 때문에 난처한 상황에 놓였음을 깨닫기는 어렵지 않았다.

트락숑 아방 차체의 모노코크 구조를 스폿 용접하고 있다<br>
트락숑 아방 차체의 모노코크 구조를 스폿 용접하고 있다

경쟁을 따라잡으려면 그처럼 많은 첨단 기능을 통합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벨(Javel) 공장에서 생산되는 시트로엥 차와 경쟁자들 사이의 격차를 확실히 벌리려면 앞바퀴굴림 장치를 넣어야 했다. 프랑스가 경제적 불황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시트로엥은 선택을 해야 했다. 경쟁차들에 비해 특별한 장점이 없는 차들로 르노와 푸조를 상대로 치열한 가격 전쟁을 벌이거나, 탁월한 제품으로 진흙탕이 된 시장에서 스스로 빠져 나와야 했다. 트락숑 아방을 생산해 1934년 봄에 서둘러 출시하기로 결정한 것은 내부 및 외부 요인들이 하나 둘 모여 만들어진 결과로,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었지만 그처럼 대담한 도약을 위해서는 아주 현실적인 사업적 결단이었다. 그것은 즉흥적 충동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1933년에 케 드 자벨(Quai de Javel) 공장 전체를 재건하기로 한 앙드레 시트로엥의 결정은 어떻게 된 것일까? 미국에서 본 것에서 영감을 얻고 그에게 큰 돈을 들여 새로 지은 비앙쿠르(Billancourt) 공장을 보여준 루이 르노(Louis Renault)에게 자극을 받은 시트로엥은 ‘슈퍼자벨ʼ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그는 자신의 경쟁자들을 능가해야 했다. 당시 차 생산대수를 고려하면 이미 존재하는 시설들의 생산능력이 적정수준 이상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래도 최신식 공장을 짓겠다는 생각에는 사업적인 논리가 있었다. 구식 작업장은 더디게 성장했고, 효율은 가능한 수준을 밑돌았다. 완전히 새로운 모노코크 모델이 개발 중인 상황에서 능률적인 생산 공정은 바람직한 것이었고, 놀라운 새차에 대해 예측한 수요를 충족하려면 공장은 확장이 가능해야 했다. 시트로엥을 너무 혹독하게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는 1960년대에 영국 자동차 산업이 그처럼 비효율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가 이전 수십 년 동안 허술한 방식으로 발전해 온 낡은 공장에 지나치게 많이 의존했던 것이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서둘러 생산한 트락숑 아방은 시트로엥(왼쪽에서 네 번째)을 무너뜨렸지만 회사의 성격을 정의했다<br>
서둘러 생산한 트락숑 아방은 시트로엥(왼쪽에서 네 번째)을 무너뜨렸지만 회사의 성격을 정의했다

그러나 시트로엥이 자벨 공장 재건을 통해 모범적 선견지명을 보여주었다면, 그 과정에서는 그의 끝없는 사치를 보여주기도 했다. 엄청난 가동 규모뿐 아니라, 모든 설비와 부속품들은 새것이었고 가능한 최상의 것이었다. 나아가, 공장 재건은 5개월이라는 빡빡한 일정으로 묶여 있었다. 시트로엥은 10월에 열리는 모터쇼에 맞춰 새 공장을 방문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랐다. 이 일정을 지키려면 엄청난 초과근무 수당이 필요했다. 새 자벨 공장은 건설과 물류 분야의 화려한 업적이었지만, 매출이 정체된 시기에 값비싼 단기 대출로 견디며 극단적 재정 고갈을 불러왔다.

앙드레 시트로엥은 재정적 구명대가 절실하게 필요했고, 그에게 그런 구명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빨리 자동차 세계에 선풍을 일으키고 그가 경쟁자들을 뛰어넘게 해 줄 모델을 출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트락숑 아방이 생산되도록 서둘렀고… 회사의 몰락에 아주 큰 영향을 준 끔찍한 문제가 되었다. 시트로엥은 회사의 미래를 자동차에 걸었다. 그가 그런 도박에서 진 것이 무책임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지만, 사실 그가 마지막 주사위를 던진 것에는 복잡한 논리가 있었다.

새로운 주인인 미쉐린에 의해 회사에서 쫓겨난 데 이어 1934년 말까지 청산 절차를 거친 시트로엥은 위궤양으로 괴로워하다가 1935년 8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회사가 내놓은 마지막 제품은 23년 동안 생명을 이어갔고, 시트로엥 브랜드의 기술적 정신을 정의했다는 점이 그 차의 탄생을 뒷받침한 사람의 용기와 비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찬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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