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규어 E 타입, 브라운스 레인에서 추억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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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규어 E 타입, 브라운스 레인에서 추억의 길로
  • 아이오토카
  • 승인 2012.11.22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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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0월 21일 벨기에의 자베케. 재규어 엔지니어이면서 레이스 드라이버 노먼 더위스가 XK120의 콕핏에 미끄러져 들어갔다. 새로 건설한 자베케 고속도로에서 양산차 속도 신기록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양산’이라는 낱말에 주목하기 바란다.

더위스는 바닥에 깔린 기포고무 조각 위에 앉았다. 만일 좌석을 갖췄다면 동료들이 그의 머리 위에 덮을 비행기 캐노피가 제대로 보디에 닿지 않기 때문이었다. 승객 공간은 단단한 금속제 좌석이었고, 밑바닥의 모든 장비도 덮여있었다. 수준 높게 엔진을 조율했고, XK의 오른쪽 헤드램프를 제거하여 터보의 공기밀도를 높였다. 안개 낀 선선한 이른 아침이었다. 더해진 힘이 굉장히 소중했다. 더위스는 제1차 주행에 들어갔다. 몇 분 뒤 폐쇄된 고속도로에 들어가 왕복주행에 도전했다. 그의 왕복 평균인 시속 277.4km는 신기록이다. 벨기에 왕립자동차클럽이 그 기록을 공인했다.

<오토카>는 2개의 짧은 문단으로 그 사실을 보도했다. 이때 독자들은 XK의 캐노피와 언더트레이가 옵션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둘은 포드가 로드카 몬테오에 달게 된 스포일러‧언더트레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0년대 알파로메오가 윙과 스플리터를 달고 나오자 몬데오가 영국투어링카선수권(BTCC)에 나가기 위해 달게 됐다.

아무튼 시속 277.4km는 현지 경찰이 보기에 충분히 빨랐다. 그들이 자베케 고속도로의 공식 속도시험을 심판했다. 당연히 속도가 약간 과도하게 높다고 평가했다. 더위스는 재규어 드라이버로 계속 모터스포츠에 나갔다. 거기에는 참사가 벌어진 1955 르망 24시간도 들어 있었다. 게다가 수십 년간 재규어 수석 엔지니어의 자리를 지켰다. 다가오는 그의 100회 생일에 XJ13(고속질주하던 MIRA에서 뒹굴었지만 무사히 빠져나온)을 시속 160km로 몰아보고 싶다고 했다.

한편 자베케 고속도로는 자동차 전용도로로 되돌아갔다. 현지 주민들에 따르면 재규어 고속주행 시험은 완전히 새로운 고속도로 구간에서 벌어졌다. 자베케와 해안도시 오스텐데를 연결하는 신설 도로였다. 한데 이 도로는 다른 지역으로도 뻗어나갔다. 소도시 알터를 지나 동쪽으로 겐트와 이어졌다. 자베케-알터 구간은 이전에도 속도기록에 쓰였다. 고속도로의 한쪽을 막아 시험구간으로 돌리고, 다른 쪽을 왕복차선으로 나눴다. 그 뒤 그 구간에서 속도시험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8년 뒤 1961년 3월 제네바모터쇼 불과 몇 주 전에 재규어가 되돌아왔다. 아니 정확히 말해 재규어 한 대가 돌아왔다. <오토카>는 시승용으로 신형 E타입 한 대를 받았다. 제네바에서의 첫선을 몇 주일 앞둔 때였다. 쿠페형의 등록번호는 9600HP. 똑같은 고속도로 구간에서 시속 240km를 돌파했다. <오토카>의 최대 라이벌 <더 모터>(The Motor. 뒷날 우리 <오토카>에 흡수‧통합됐다)가 같은 목적으로 로드스터 한 대를 빌렸다. 이탈리아 고속도로 한 구간에서 한 방향으로 시속 240km를 냈지만, 양방향 기록 작성에는 실패했다.

출시와 동시에 E타입은 자동차계에 상당한 충격파를 던졌다. 그 같은 최고시속이 원인으로 꼽혔다. 실제로 당시 모터스포츠는 자동차 발전에 큰 영향을 줬다. E타입은 르망에서 우승한 D타입에서 빌려온 것이 많았다. 스타일이 센세이셔널했을 뿐 아니라 이례적으로 가치가 높았다. 그 성능에 힘입어 1960년대 후반에 태어나는 슈퍼카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생산이 계속된 13년간 E타입은 당대 영국 자동차산업의 장단점을 모두 갖췄다. 출시 때는 혁명적이었고, 그 뒤 정성껏 손질하여 몇 가지 결함을 덜어냈다. 한데 때로는 큰 손질을 하느라 생산이 중단됐다. 차는 점점 더 길고 무거워졌다. 결국 제 수명보다 더 오래 시장에 나왔다. 마침내 E타입은 약간 해괴한 시리즈 Ⅲ에 도달했다. 게다가 섀시가 결코 감당할 수 없는 V12를 얹었다.

재규어는 그 1961년형을 실제로 대체할 후계차를 개발하지 않았다. 그와는 달리 E는 1975년 드디어 2+2 XJ-S로 넘어갔다. 더 크고 더 호사스러운 그랜드 투어러였다. 솔직히 현행 XK가 좋은 차지만 1960년대 말 이후 E타입의 진정한 후계차를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그 후계차가 F타입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전혀 그럴 필요가 없을 때였다. XF, XK와 XJ 라인업은 재규어의 역사상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게다가 XF 바로 아래 중역형이 대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재규어의 부활은 빈틈없이 완성된다.


따라서 E타입을 다시 찾아보기에 지금보다 좋은 때가 없다. 지금 당장 어떤 과제나 구체적인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알파벳 순서로 F타입을 들어서게 만든 차를 고속으로 신바람 나게 몰아보고 싶을 따름이었다. 현재의 상태를 보고 과거 전성기의 실체를 상상해보기로 했다.

<오토카>가 시승했던 가장 이름난 쿠페 9600 HP는 개인의 손에 들어갔다. 한데 재규어는 지금도 <더 모터>의 시승차 로드스터 77RW를 갖고 있다. 게다가 상태도 아주 좋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그 차를 빌려 벨기에를 갔다 올 수 있을까? 자베케 고속도로로?” “물론” 원더플!

그리하여 어느 가을날 아침, 사진기자 스튜어트 프라이스와 나는 코번트리의 브라운스 레인에 있는 재규어 역사센터를 찾았다. 누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우리는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갔다. 이사를 하느라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 대지는 몇 년 전에 팔렸다. 따라서 테일러 윔피는 주택건설업자가 으레 하는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재규어는 떠나야 하고, 이 시설을 떠나는 마지막 작업이 벌어지고 있었다. 차들은 모두 떠났고, 재규어의 기록과 서류가 상자에 들어가 다른 작업장과 창고로 실려 갔다. 재규어 역사센터 총수의 사무실 의자가 우리 앞을 지나갔다. 그럴 때 가슴 아픈 감상에 젖기 쉽지만 나는 그러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옛날이 반드시 ‘더 좋았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규어가 대중에게 보여줄 영구 역사자료 센터를 잃게 된다니 안타까웠다.

우리는 77RW를 만났다. 이 로드스터는 프로토타입의 하나이고, 초기 E타입의 장단점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아남았다. 등받이가 낮은 버킷시트에 미끄러져 들어가자 폭이 좁으면서 상쾌했다. 작은 도어를 닫고 단순‧매력적인 대시보드를 마주했다. 스티어링은 레이크가 컸고, 운전위치는 조금 빡빡했다. 페달은 옵셋으로 자리 잡았다. 엔진은 쉽게 점화됐다. 나는 조심스레 1단에 들어가 교외 주택가로 차머리를 돌렸다. 브라운스 레인을 등지고 벨기에로!

처음 몇 백 미터 사이에 차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페달은 간격을 잘 잡았고, 무게가 골랐다. 스티어링은 정확하고 묵직했고, 허술한 느낌이 거의 들지 않았다. 그 나이에 비해 정말 뛰어난 실력이었다. 그보다 E타입의 승차감이 그럴 수 없이 좋았다. 현행 메르세데스 S클래스만큼 험악한 노면을 매끈하게 달렸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액셀반응도 놀라웠다. 일반적으로 대형 카뷰레터형 엔진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회전대에서 액셀을 내리밟자 기침을 하며 가볍게 키들거렸다. 하지만 그밖에는 깔끔하게 뻗어나갔다.

그러나 4단 기어박스는 솔직히 절망적이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역사센터 엔지니어들에 따르면 처음부터 그랬다고 한다. 1단에는 싱크로가 없었다. 2단에는 더블 디클러칭 또는 접속을 위한 3초 간격이 없었다. 3단과 4단은 좋았지만 오버드라이브가 없었다. 성능 면에서는 아주 큰 약점이었지만 켄트에 있는 유로터널 터미널에 도착할 무렵에는 어느 정도 길이 들었다.

영불해협을 건너 프랑스의 칼레에 도착하면 거기서 자베케까지는 상당히 짧은 거리여서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E타입을 몰고 시내에 들어가기는 즐거웠다. 그곳에는 더위스와 재규어의 업적을 기리는 동판이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현지인들이 오래된 재규어가 사진을 찍기 위해 돌아다니는 깊은 뜻을 알고 있었다. 하룻밤을 쉬고 나서 우리는 곧장 자베케 고속도로로 달려갔다.

지금 와서 지난 20세기 중반 양산차의 도로속도 기록 돌파를 내세워 자베케나 그 도로의 의미를 되살리기는 쉽지 않다. 오늘날 영국의 A10은 분주한 도로구간이다. 그리고 비교적 쭉 뻗은 도로지만 1.5톤을 조금 넘는 E타입에게 더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기본형 E타입이 시속 240km에 도달했다고 해서가 아니다. 출시 때 E타입은 XK120S에서 가져온 3카뷰레터 3.8L 엔진을 갖췄다. 도로시승차에 달린 엔진을 날치기했다고 하면 좀 지나치지만 ‘최적화했다’고 하면 결코 과소평가했다고 할 수 없다. 9600HP의 현재 오너가 엔진을 해체했을 때 가스흐름 헤드가 나왔다. 당대의 엔진 튜너가 현대의 카센터를 넘어섰다고 할 수준이었다. 아무튼 어느 양산차보다 메이커가 주장하는 269마력에 가까웠다.

심지어 지금도 77RW 엔진은 상당히 강력했다. 토크대가 넓었고, 엔진의 5,500rpm 피크—내가 도전하고 싶지 않은 숫자—에 올라가지 않아도 충분한 파워가 나왔다. 당연히 재규어는 우리에게 보호자를 붙여 보냈다. 내가 멍청한 짓을 할까봐 감시했다. 그래서 상당한 속도로 정속주행하며 자베케를 오르내리는 걸로 만족했다. 이 도시의 서쪽 오스텐데로 갔다.

그곳 커다란 LED 화살표가 달팽이로 꾸민 로터리에서 도로 끝을 가리켰다. 빛의 속도에서 스피드를 확 떨어트리라는 신호였다. 뒤이어 이 도시의 동쪽으로 갔다. 한층 북적대는 3차선이었다. 당시 시승자들은 도로구간 전체를 이용했었다. 그런데 그날 사진기자 프라이스는 훨씬 차분하게 머리 위에서 정속으로 오가는 나를 잡았다. E타입은 똑 바로 달렸다. 한데 안전벨트도 없는 차로 고속도로에서 시속 240km에 도전할 생각은 없었다.

그때 프라이스가 촬영이 끝났다고 무전을 보냈다. 다음 인터체인지까지는 불과 몇 킬로미터. 재규어 측 보호자들과 스튜어트는 브리지 위에 서 있었고, 나는 혼자였다. 단지 나와 안전벨트가 없는 무한히 값진 51세의 클래식카가 함께 있을 뿐이었다. 루프도 롤오버 케이지도 없었다. 나는 의미 있는 일을 했다. 이럴 때 우리 모두가 하는 것. 3단에 들어가 지긋이 밟았다.

기침을 하며 멈칫하던 직렬 6기통이 폭발하며 죽도록 매끈하게 노래를 불렀다. 가령 밑바닥까지 내리밟은 클리오 컵만큼 빠른 느낌이 들었다. 당시로서는 실로 파격적인 속도였다. 3단에서 다시 4단으로 올라갔지만 스티어링은 안정됐고 보디는 흔들림이나 떨림이 없었다. 오버드라이브가 없는데도 E타입이 최고의 고속 머신이라는 명성을 얻은 이유가 여기 있었다.

불과 몇 초 만에 너무나 쉽고 힘들이지 않고 매끈하게 시속 160km와 그 이상으로 올라갔다. 차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제한속도를 존중해 액셀을 살짝 들었다. 이 차를 역사적 맥락에서 제대로 볼 때 여전히 대단한 머신이었다. 최신형이 거의 모든 면에서 날려버릴 실력이기는 하다. 그러나 재규어가 자신에 넘친 지금에야 진정한 후계차를 만들 용기를 냈다고 말할 수 있다.

글: 맷 프라이어(Matt Pr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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