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비시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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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의 두 얼굴
  • 임재현 에디터
  • 승인 2015.09.2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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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을 즈음해 한국인 피해자만 외면하는 미쓰비시의 이중 잣대, 국적 논란이 불거진 롯데그룹, 주어가 모호한 일본 총리의 담화를 지켜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미쓰비시 머티리얼이 지난 7월 19일(현지 시간) 미국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노동에 징용된 미군 포로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기무라 히카루 미쓰비시 머티리얼 상무를 비롯한 회사 대표단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징용 피해자 900여 명이 미쓰비시 탄광 등 4곳에서 강제노역을 했다”며, “미국 전쟁포로들과 그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했다. 
 

이어 7월 24일에는 2차 세계대전 기간에 강제노역을 한 중국 노동자들에게 사과하고, 보상금을 제공키로 중국 측과 합의했다. 피해 보상금은 강제노역에 동원된 노동자 3,765명을 대상으로 1인당 10만 위안(약 1천880만원)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국인 징용 피해자에 대해서는 “법적인 상황이 다르다”는 입장을 되풀이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바로 다음날인 25일에는 미쓰비시자동차가 오는 11월 미국 현지생산을 중단하고 공장을 폐쇄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지난 2012년 유럽에 이어 미국 생산도 중단하기로 결정한 것. 일본 자동차회사가 유럽과 미국에서 현지생산에 나섰다가 철수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편, 미쓰비시자동차는 지난 2008년 랜서 에볼루션과 아웃랜더로 국내시장에 진출했으나, 판매부진으로 2013년 철수한 바 있다. 
 

미쓰비시자동차는 대표적인 전범기업인 미쓰비시그룹 소속이면서 현대자동차의 성장과 기술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회사다.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미쓰비시그룹이 일제 강점기에 강제 징용한 조선인 수는 10만 명을 넘어선다. 이는 전범기업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인원으로, 미쓰비시가 1급 전범기업으로 꼽히는 이유다.

미쓰비시그룹은 수백 개의 자회사를 거느린 초거대 기업 집단으로, 미쓰이그룹, 스미토모그룹과 함께 일본의 3대 재벌이다. 핵심기업으로는 미쓰비시상사, 미쓰비시중공업, 미쓰비시도쿄UFJ은행이 있다. 미쓰비시상사는 2015년 3월 31일 기준으로 398개 자회사(관련 회사를 모두 합하면 614개에 달한다)를 거느린 종합무역회사이고, 미쓰비시중공업은 일본 최대 중공업회사, 미쓰비시도쿄UFJ은행은 총 자산 규모가 세계 9위인 일본에서 가장 큰 민간 시중은행이다. 
 

미쓰비시는 근대 일본의 탄생과 함께 등장했다. 창업자는 이와사키 야타로. 하급 무사 계급 출신으로 봉건 영지에서 재정 관리를 담당하던 인물이었다. 1868년에 들어선 메이지 정부가 봉건 영지인 한(藩)을 해체하자, 한에 속했던 해상 운송권을 이와사키가 양도받아 3척의 화물선으로 해운 사업을 시작한 것이 미쓰비시그룹의 기원이다.

미쓰비시에서 미쓰(三)는 삼이고, 비시(菱)는 마름모다. 즉 ‘세 개의 마름모’라는 뜻. 3개의 마름모가 좌우 대칭형으로 삼각형을 이루는 미쓰비시의 로고는 이와사키 가문의 문장을 변형한 것이다. 
 

이와사키는 메이지 유신 실세들과 유착해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고, 다양한 분야로 사업영역을 넓혀나갔다. 미쓰비시조선(현 미쓰비시중공업)은 1917년 피아트 티포 3을 기반으로 한 4도어 7인승 세단 ‘모델 A’를 선보였는데, 이것이 일본 최초의 양산차다. 직렬 4기통 2.8L 엔진으로 35마력을 냈고, 최고시속은 32km였다. 1922년까지 5년간 고베 조선소에서 총 22대를 제작됐다.

창업 초기부터 정경유착으로 성장하며 일본의 근대화에 공헌한 미쓰비시는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일본제국의 전쟁 수행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주력 함상전투기 A6M(일명 제로센)은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에서 설계한 것이다. 
 

이곳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의 배경이 됐는데, 1944년 5월 전남과 충남 출신 13~14세 소녀 300여 명이 끌려가 강제 노역을 한 곳이기도 하다.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84) 등 8명은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나고야 지방재판소에 소을 제기했으나, 지난 2008년 최종 패소 판결을 받았다.

이후 한국에서 소를 제기했고, 광주고등법원은 지난 6월 미쓰비시중공업이 원고들에게 총 5억6천208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미쓰비시중공업은 판결에 불복하고 상고해 현재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강제 징용의 상징 하시마 섬(일명 군함도)은 미쓰비시광업(현 미쓰비시 머티리얼)이 경영한 탄광이었다. 논란 끝에 지난 7월 5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노동을 강요당했다’(forced to work)라고 표현하며 국제무대에서 처음으로 강제징용 사실을 인정하는 듯했으나, 등재가 확정되자 ‘일하게 됐다’는 의미라며 말을 바꿨다.

미쓰비시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해체됐다. 미쓰비시그룹 웹사이트의 역사 페이지를 보면, 4대 총수였던 이와사키 고야타가 당시 “미쓰비시는 국가정책에 따라 국민으로서 해야 할 의무를 다했을 뿐이며, 돌이켜 부끄럼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식민 지배 피해자인 우리 정서와는 동떨어진 발언이다. 
 

강제 해산됐던 미쓰비시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이후에는 한국 군사정부에 정치자금을 제공하면서 국가사업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서울지하철 사업, 포항종합제철소 건설, 경인선 전철화 사업, 당인리발전소(현 서울화력발전소) 건설 등 대규모 계약을 독차지하며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1급 전범기업이 1960~70년대 한국 현대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며 한국 경제성장의 최대 수혜자가 된 것이 역설적이다. 1963년 당시 1조엔(약 9천430억원) 수준이었던 미쓰비시상사의 거래량은 크게 증가해 1970년에 4조엔(약 3조7천720억원)을 넘어섰다. 이는 1960년대 일본의 평균 경제성장률 10%를 훨씬 웃도는 수준으로, 다른 일본 기업에 비해서도 압도적인 성장세였다. 
 

미쓰비시그룹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다. 다목적 관측위성인 아리랑 3호는 지난 2012년 미쓰비시중공업 H-2A 로켓에 실려 발사됐다. 지상 123층으로 국내 최고층빌딩인 롯데월드타워에는 미쓰비시엘리베이터가 국내 최초로 더블데크 엘리베이터를 설치한다. 최근에는 미쓰비시중공업이 2011년부터 올 상반기까지 한국전력 자회사로부터 수주한 가스터빈 프로젝트 규모가 38기, 총 5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됐다. 
 

■ 미쓰비시연필은 미쓰비시그룹과 무관
‘유니볼’ 등 필기구로 유명한 미쓰비시연필은 자본, 인맥 등 미쓰비시그룹과 전혀 관련이 없지만, 동일한 한자명과 같은 로고를 쓰는 탓에 계열사로 혼동되곤 한다. 사실 ‘쓰리 다이아몬드’ 로고는 미쓰비시연필이 먼저 사용했다. 경쟁 사업이 없었기 때문에 같은 상표를 이용하기로 합의한 것. 대신 영문표기는 ‘MITSU-BISHI’로 하이픈을 넣어 미쓰비시그룹과 구별하고 있다.

글 · 임재현 에디터 (jlim@iautoca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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