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 유품 국가기록원에 영구 보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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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 유품 국가기록원에 영구 보존
  • 정유정 기자
  • 승인 2017.08.08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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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원예특작과학원, 서거 58년 만에 유품 713점 일본인 아들 2년간 협조 받아 조국에 영구 보존

- 재일교포 2세 고(故) 우장춘 박사 그는 누구인가?
- ‘씨 없는 수박’을 처음 만든 주인공은 우장춘 박사다?

[한국농어촌방송=정유정 기자] ‘씨 없는 수박’으로 더 유명했던 세계적인 육종학자 고(故) 우장춘 박사(禹長春, 1898~1959)의 유품 713점이 그의 서거 58년 만에 국가기록원에 기증되어 영구 보존되게 됐다.

이를 위해 농촌진흥청(청장 라승용) 국립원예특작과학원(원장 황정환)은 오늘(8일) 초대원장이자 우리나라 원예연구의 기틀을 마련한 우장춘 박사 유품을 국가기록원에 전달하는 기증식을 국가기록원 서울기록관(경기도 성남)에서 가졌다.

농촌진흥청(청장 라승용) 국립원예특작과학원(원장 황정환)은 오늘(8일) 초대원장이자 우리나라 원예연구의 기틀을 마련한 우장춘 박사 유품을 국가기록원에 전달하는 기증식을 국가기록원 서울기록관에서 가졌다.(사진=농진청)

오늘 기증된 우장춘 박사 유품은 나팔꽃 조사기록장, 나팔꽃 표본, 연구노트, 일본 고서, 문화포장증과 관련 사진 등 총 713점이다.

1935년에 나팔꽃을 조사한 교배기록장은 26권에 2,580페이지에 달하며 나팔꽃 표본은 압화판 등 17종에 630장과 사진 3종에 14장 등이다.

연구노트는 나팔꽃(Pharbitis Hap: 1931∼1932) 등 13권에 1,400장이고, 일본 고서는 기순회잡지(奇蕣会雑誌) 제2호(明治36년12월) 등 14권에 978장이며, 문화포장증과 관련 사진(장례식 사진 등) 4종에 15장 등이 있다.

우장춘 박사의 유품 기증은 우리나라 원예 육종산업을 위해 헌신한 학문적 업적을 기리고 그동안 흩어져있던 우리 농업의 근간이 되는 주요 연구 자료를 한데 모았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동안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은 우장춘 박사 연구업적과 정신을 기리고자 유품을 찾아 한데 모으기로 결정하고, 2014년부터 일본에 있는 우장춘 박사의 장남인 스나가 모토하루(須永元春) 씨를 찾아가 2년에 걸쳐 협조를 구한 끝에 우 박사 유품 모두를 기증받게 되었다고 밝혔다.

우장춘 박사는 대한민국 정부 요청으로 1950년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했으며, 1953년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전신인 중앙원예기술원 초대원장으로 취임했다.

우 박사는 주로 품종개량 연구에 전념해 자본과 기술 부족으로 황폐화된 1950년대 우리나라 농업 부흥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또한 학위논문에서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해 새로운 식물인 유채를 만들어냄으로써 서로 다른 종이 교배를 통해 새로운 종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종(種)의 합성’ 이론을 제시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이론은 다윈의 진화론인 ‘종(種)은 자연도태의 결과로 성립된다’ 라는 내용을 수정한 계기로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종이 다른 식물들의 유전적 연관관계를 정리한 ‘우의 삼각형’은 세계 육종학 교과서에 실리고 있다.

이와 함께 ‘자가불화합성’과 ‘웅성불임성’을 이용해 배추, 양파 등의 일대잡종을 육성하는 등 우리나라 육종연구의 기틀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제주 감귤, 강원도 감자 등 다양한 품종을 개량해 보급함으로써 전쟁 후 식량문제를 해결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우 박사는 농업 분야의 많은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1959년 정부로부터 문화포장을 받기도 했다. 오는 8월 10일이 그의 서거 58주기다.

국가기록원은 유품을 서울기록관에 보존하면서 사진으로 볼 수 있도록 국가기록원 누리집(www.archives.go.kr)으로 제공할 계획이다.

농촌진흥청 황정환 국립원예특작과학원장은 “우장춘 박사의 친필 연구 자료와 결과물은 세계적인 육종학자로서의 업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물로 우리나라 육종 역사의 기반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재일교포 2세 고(故) 우장춘 박사 그는 누구인가?>

우장춘(禹長春, 1898~1959) 박사는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우리나라 육종학(育種學)의 황무지를 개척한 시대의 영웅이다.

우장춘 박사는 1898년 도쿄에서 아버지 우범선(禹範善, 1857~1903)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酒井)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성장했다. 어머니는 일본인이었지만 그에게 항상 조선인임을 강조했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도쿄제국대학교 부설 농학부 실과대학(일종의 전문대학)에 진학했다. 도쿄제국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일본 농림성 산하의 농사시험장에 들어가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따낼 수 없는 농사시험장 기수(기사와 서기·조수들의 중간 직책)에 올랐다.

1930년 겹꽃 피튜니아의 육종 합성에 성공해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하고, 1936년 5월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한〈종(種)의 합성(合成)〉이라는 논문으로 도쿄제국대학교에서 농학박사(원예육종학) 학위를 받았다. 종의 합성을 실증한 그의 이론은 세계 육종학 교과서에도 인용되고 있다.

1945년 광복 후 우리나라는 씨앗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육성할 만한 기술과 돈이 없었다. 갈수록 경제적으로 궁핍해 일본에 돈을 주고 씨앗을 수입하는 일도 점점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좋은 채소 씨앗을 생산할 수 있는 독자 기술을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이 문제를 해결할 중심에 우장춘 박사가 있었다.

정부는 농업 발전을 위해 그의 귀국을 전격 추진했다. ‘우장춘 박사 환국촉진위원회’의 주선으로 1950년 3월 어머니와 처자식을 일본에 남겨둔 채 홀로 고국으로 왔다. 그는 가족과 생이별하는 아픔을 육종 연구로 달랬다.

그가 조국에 돌아와 남긴 업적은 수없이 많다. 귀국한 그해 5월 부산 동래의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취임해 국내 연구 활동을 본격화했다.

1953년 국립중앙원예기술원 원장을 맡아 제주도에 귤 재배를 보급했다. 1954년 한국 땅에 맞는 무와 배추의 새 품종을 생산하는 데 성공하면서 1957년부터는 국내 자급이 가능하게 했다.

1958년 원예시험장 초대장장에 취임해 강원도 감자로 알려진 무병 씨감자를 생산했다. 무병 씨감자는 한국전쟁 이후 식량난을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농림부장관직 제의도 거절하면서 오로지 종자 개발에만 헌신했다. 늘 고무신을 신고 있어 ‘고무신 박사’로도 불렸다. 우리나라 근대 농업을 개척한 공적을 인정받아 1957년 12월 23일 제1회 부산시 문화상(과학상), 1959년 8월 7일 병상에서 건국 이래 두 번째(첫 번째는 음악가 안익태)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았다.

우 박사는 1959년 8월 10일 향년 61세로 영면했다. 불과 9년 5개월이란 짧은 기간을 조국에서 살았지만 그가 남긴 발자국은 지금도 또렷하다.

<‘씨 없는 수박’을 처음 만든 주인공은 우장춘 박사다?>

우장춘 박사는 ‘씨 없는 수박’을 처음 만든 주인공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씨 없는 수박의 원조는 일본인이다. 우장춘 박사와 친분이 있던 교토제국대학 기하라 히토시(木原均, 1893~1986) 박사다.

기하라 박사가 주도하는 기하라 생물학연구소가 1943년에 세계 최초로 씨 없는 수박을 실험 생산해 발표했다. 우장춘 박사보다 10년 정도 앞선다.

우장춘 박사는 일본에서 환국한 뒤인 1953년 씨 없는 수박의 시범재배에 들어가 1955년 한국농업과학협회 주도로 ‘씨 없는 수박 시식회’를 열었다. 한국에서 처음 만들어 시연했기에 일반인들은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든 사람으로 생각했다.

우장춘 박사는 씨 없는 수박을 좀 더 맛있고 우량하게 만들었다. 물론 기하라 박사가 우장춘 박사의〈종의 합성〉이론을 참고했기 때문에 기하라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만드는 데 큰 공로를 세운 것은 사실이다.

씨 없는 수박을 언급할 때 자연스레 우장춘 박사가 떠오르는 데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우 박사가 국내에서 개량한 무, 배추 종자를 보급했지만 정작 농민들은 일본에서 밀수입한 종자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동안 꾸준히 사용해온 일본 종자에 대한 믿음과 우리 종자에 대한 불신이 겹친 탓이다. 농민들은 자칫 선례가 없는 국내 종자를 사용했다가 농사를 망칠까 봐 선뜻 시도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 박사는 신품종에 대한 불신을 씻어내기 위해 소위 ‘씨 없는 수박’ 카드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생소했던 육종 기술을 실제로 보여줄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육종학의 원리를 응용하면 씨 없는 수박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주고 싶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씨 없는 수박은 예상대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끌었다. 농민들은 씨 없는 수박을 육종학의 기적으로 받아들이며 우리가 만든 종자를 믿고 파종하기 시작했다.

각처에서 우장춘 박사의 강연회 초청이 쇄도했다. 우장춘 박사는 자신이 씨 없는 수박을 개발했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냥 대중들이 그를 최초 개발자로 인식했을 뿐이다. 그 결과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처음 만든 사람으로 각인됐다.

당시 신문들은 우장춘 박사를 ‘육종학의 마술사’라고 부르며 대서특필했다. 이때부터 그는 씨 없는 수박의 발명자로 알려졌고 교과서에도 그렇게 실렸다. 교과서 내용은 1980년대 말에야 정정됐다.<도움말 김규회, 황선정, 송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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