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에서 만난 신형 카이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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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에서 만난 신형 카이엔
  • 최주식
  • 승인 2023.12.24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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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완성해야 하는 글의 경우, 메모만큼 유용한 것은 없다. 이번처럼 신차를 시승하고 나서 출시 일정에 맞춰 몇 달 뒤에 시승기를 실어야 하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미리 써놓으면 좋겠지만 마감의 우선순위는 게재 순이라는 좋은 핑계가 있다. 한 가지 깨달은 것은 있다. 지난 날 미루어둔 일이 오늘의 나를 힘들게 한다고. 아무튼 이제 흩어진 메모를 모으고 기억을 더듬어 퍼즐을 완성해야 할 시간이다. 

프랑크푸르트행 루프트한자 비행기를 탄 것은 그러니까 지난 오월의 일이었다. 하도 오랜만에 유럽행 비행기를 타서 잘 몰랐는데 동행한 이가 말한다. “이 비행기 두 시간 늦게 도착한 것 알아요?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항로를 우회해서…” 잊어버리고 있었다. 구름 위에 떠 있다 보면, 세상이 얼마나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는지를. 

늦게 도착한 공항은 상점들이 하나 둘 문을 닫고 있었다. 아무리 세계적인 공항이라 해도 철시 분위기는 소도시 터미널 같은 고적한 느낌을 준다. 공항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오스트리아행 전세기를 타러 간다. 말이 전세기지 소형 비행기다. 신형 카이엔 글로벌 드라이브 이벤트에 참석하러 가는 여러 나라의 자동차 기자들로 작은 비행기는 가득 찼다. 

비행 한 시간 여 만에 하강이 이루어진다. 비행기 창밖으로 빗방울이 촘촘히 맺혀 바깥 풍경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예상했던 것보다 궂은 날씨다. 오스트리아 서쪽, 독일 국경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잘츠부르크 공항은 인근 스키 휴양지로 가는 관문이다. 몇 걸음만 걸으면 출국장이 나올 만큼 작은 공항. 신형 카이엔들이 우리를 기다리며 비를 맞고 서 있다. 찬찬히 살펴볼 겨를도 없이 출발부터 해야 하는 상황. 먼저 배정받은 차는 카이엔 쿠페다. 

날씨는 한 마디로 운이다. 원래는 파노라마 알름(Panorama-Alm, 산정 레스토랑)이란 곳까지 2시간(98km 구간) 남짓 달려 프레스 컨퍼런스를 하고 다시 한 시간 거리의 숙소 카이저로지까지 달리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 카이저로지까지 직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날 산정에 15cm나 눈이 내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월의 기온 탓에 카이엔 시승차들은 모두 섬머 타이어로 교체한 상태. 사계절 타이어만 신고 있어도 강행했을 것이라는 관계자의 귀띔은 별로 위안이 되지 않았다. 

낯선 길 2차선 도로에 비는 내린다. 도심이 아닌 외곽으로 향하는 길은 회색 하늘과 안개를 두른 나무들, 푸른 잔디가 반복적으로 펼쳐졌다. 이따금씩 주유소와 교회, 대문을 굳게 닫은 집들이 보인다. 조금씩 달라진 카이엔의 실내가 눈에 들어온다. 전체적인 대시보드 디자인이 바뀌었다. 가장 새로운 건 12.6인치 커브드 디스플레이. 계기판 덮개가 없지만 그래픽이 선명하고 주행 정보를 한눈에 읽을 수 있다. 옵션인 헤드업 디스플레이도 달려 있다. 시프트 패들을 포함하는 스티어링 휠은 다양한 기능을 양쪽 스포크에 모았고 직관적으로 다룰 수 있다. 로터리식 드라이브 모드 버튼은 그대로다. 

가운데 12.3인치 터치스크린 디스플레이를 포함하는 포르쉐 커뮤니케이션 매니지먼트(PCM)도 새롭다. 파킹 버튼과 나란한 기어 레버 위치도 바뀌었는데 위치가 약간 애매하다. 이어지는 두 개의 계기판 사이에 자리하는데 운전자 시야에서 보면 스티어링 휠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손닿기 쉬운 위치에 있어 보지 않고 작동하는 데 어려움은 없지만 처음엔 약간 당황스럽다. “익숙해지면 괜찮다”라는 말은 자동차업계 공통의 ‘마법의 주문’이다. 

센터페시아 아래로 내려오면 온도조절 패널도 새롭다. 물리 버튼을 남겨둔 포르쉐의 센스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다. 듀얼 컵홀더 주변의 수납공간도 괜찮다. 또 하나 포르쉐가 자랑하는 것은 동반석 쪽에 새로이 마련한 10.9인치 디스플레이다. 운전자가 운전에 집중하는 동안 따로 넷플릭스 같은 영상을 즐길 수 있다. 운전자가 옆에서 무얼 보는지 힐끔거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특수 필름을 붙였다. 그밖에 도어 인테리어와 컬러 배치, 콘솔, 엠비언트 라이팅, 파노라믹 루프 시스템, 충전 빠른 C-타입 포트 등이 새롭다. 

어느새 길은 와인딩 로드로 이어진다. 조금 익숙해진 느낌을 살려 스티어링 휠과 액셀러레이터에 힘을 싣는다. 이전보다 13마력 증가한 V6 터보 353마력은 부드럽고 강력하다. 그리고 날렵하다. 부드럽고 강력한 것은 누구나 따라할 수 있지만 이 날렵함이야말로 독보적이다. 내게 그 느낌은 사뿐함이다. 코너링에서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코너를 감아나갈 때 리어 액슬의 움직임이 사뿐하다는 것. 이 덩치에서 사뿐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감각은 예리함을 동반한다. 2 챔버, 2 밸브 기술이 적용되었다는 새로운 에어 서스펜션은 저속에서의 승차감에서부터 코너에서의 핸들링, 롤과 피치 개선으로 안정감을 더했다. 탄탄한 가속은 노멀 모드에서도 빠르지만 스포트 모드에서 활기를 띠는데 스포트 플러스 모드는 플러스라는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한다.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외관을 살핀다. 보닛 위의 파워돔이 새로워졌고 에어 인테이크를 포함하는 프런트 에이프런이 새로워졌다. 그릴 라인과 일직선이 되면서 앞모습이 한층 단단하고 넓어 보인다. 헤드라이트와 테일라이트, 리어 에이프런과 휠 디자인도 새로워졌다. 신형 카이엔은 특히 새로운 HD-매트릭스 LED 헤드라이트를 강조했다. 두 개의 고화질 모듈과 헤드라이트 당 3만2000개의 픽셀을 갖춘 혁신 기술은 마주 오는 차를 감지하고 하이빔의 빛을 픽셀 단위로 차단하여 눈부심을 감소시킨다는 설명이다. 모듈의 밝기는 주행 상황에 따라 1000단계 이상 조절이 가능하다고.

광범위한 어시스턴스 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업데이트 된 부분이다. 액티브 스피드 리미터, 방향 전환 어시스트, 코너링 어시스트 그리고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일부인 개선된 포르쉐 이노드라이브(InnoDrive)가 운전자를 더욱 적극적으로 보조한다. 컨퍼런스에서는 또한 이전의 V6 엔진을 대체하여 업그레이드를 거친 V8 4.0L 엔진을 장착한 카이엔 S를 강조했다. 출력 34마력이 증가한 최고출력 474마력과 최대토크 61.2kg.m를 낸다. 아쉽지만 국내에 카이엔 S는 들여오지 않는다. 대신 카이엔 쿠페와 E-하이브리드, 카이엔 터보 GT(쿠페)가 출시된다.

잠깐 짬을 내 V6 터보 304마력을 얹은 카이엔 E-하이브리드를 타본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주변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길을 나선다. 새로운 전기 모터는 기존 대비 30kW 향상된 176마력(PS, 130kW)으로 총 470마력(PS)을 낸다. 배터리는 17.9kWh에서 25.9kWh로 용량이 늘어나 전기로만 77km에서 최대 90km 거리(WLTP 기준)를 주행할 수 있다. 이전 모델이 40-48km임을 감안하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새로운11kW 온보드 충전기는 충전 조건이 좋을 경우, 배터리 용량은 증가했으나 충전시간은 2시간 30분 미만으로 줄었다고.

처음 얼마간 EV 모드로만 달릴 때는 전기차와 다름없는 감각이다. 조용하고 부드러우며 가속은 빠르다. 이윽고 엔진이 개입하면 좀 전에 탄 카이엔 쿠페와 비슷한 움직임을 나타낸다. 마음 먹기에 따라 그보다 훨씬 강력한 파워를 발휘할 터이다. 0→ 시속 100km 가속도 카이엔 쿠페보다 0.8초 빠른 4.9초다. 

오르막 길을 조금 달린 뒤에 뜻하지 않은 발견처럼 호수를 만났다. 잠시 차를 세우고 땅을 밟는다. 맑은 공기와 숲과 호수의 청량한 기운이 어울려 우산 없이 비를 맞는데도 상쾌한 기분이다. 하이브리드는 그런 환경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고 그 다음 여정은 전기차가 될 것이다. 2025년 판매될 전기 카이엔은 신형 카이엔의 엔지니어링을 자양분으로 삼지만 완전히 새로운 모델이 될 것임을 예고한다. 3세대 카이엔 페이스리프트 모델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가는 날은 날씨가 얄밉게도 맑았다. 눈 쌓인 알프스 산정의 그림 같은 풍광은 차창 밖으로 스치며 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래도보여주었으니. 게다가 카이엔을 만나고 가는 길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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