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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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
  • 최주식
  • 승인 2019.07.26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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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이번 여름에 어디가면 좋으냐고 묻기에, 잠시 생각하다가 병산서원을 말했다. 경북 안동에 자리한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곳. 누각 만대루에 다리 뻗고 기대 앉아 먼 산 바라보며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노라면 세상 시름이 다 먼지처럼 가벼워질 것이다. 다른 계절은 몰라도 여름에 가면 그러하다는 것을 장담할 수 있다. 경험으로 말하자면 분명 그렇다. 이렇게 말하는 배경에는 기실 배롱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배롱나무는 7월이면 백일홍과 비슷한 붉은 꽃을 피운다. 우리나라 여러 곳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여름꽃이지만 병산서원에서 본 것을 잊지 못한다. 그 어느 땐가 나무에 매달린 선연한 꽃잎과 땅에 떨어진 꽃잎의 처연함이 너무 강렬했던 기억 탓이다. 어떤 풍경은 어떤 이유로 오래 각인되기도 한다. 그래서 여름이 되면 배롱나무 꽃 핀 병산서원에 가고 싶은 마음이 똬리를 튼다.

  달리 말하자면, 배롱나무 꽃피는 계절이 아니라면 병산서원에 가야 할 이유 또는 가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인은 아마 원하는 장소가 아니었던지 반응이 미지근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여름 휴가지로 인기 있는 장소는 아니다. 서원이라는 이미지가 좀 고리타분하기도 하거니와 아이들 교육과 관련해 의무적으로 가봐야 할 곳의 하나쯤으로 여길 성 싶다. 근래에 병산서원을 비롯해 도산서원이며 영주 소수서원 등 유서 깊은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하니 그런 경향은 더 심해질지 모른다. 한편으로는 서원이 새롭게 조명되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중요한 건 우리나라 서원이 보편적 가치로서 인류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것. 반가운 일이다.

  그러고 보니 여름, 휴가철이다. 거주 지역이 서울쪽이면 우선 순위는 아무래도 동해, 강원도가 될 확률이 높다. 요즘에는 도로도 많이 뚫려 오가는 길이 한결 수월해졌다. 근데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장소를 가다보면 차가 막힐 수밖에 없다. 이럴 때는 내비게이션을 끄라고 말하고 싶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은 도로 위의 모든 차가 가는 길. 나만의 길로 방향을 바꿔보는 것이다. 그런 다음 표지판을 보면 대관령 옛길이며, 한계령, 진부령 등 고갯길을 알리는 표지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구불구불한 고갯길은 좁고 불편하고 멀기도 하지만 덤으로 얻는 것은 풍경, 그리고 여유다. 여행은 목적지만이 아니라 그 과정도 일부라 생각하면 느린 길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고갯길을 내려오다 커다란 설악바위가 병풍처럼 떠억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고속도로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안동이나 봉화 등지의 내륙 깊숙한 곳으로 가게 되면 차들의 통행도 뜸하고 한가로운 풍경이 이어진다. 지금이 과연 휴가철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한산한 느낌. 숲 사이로 강이 흐르고 다리가 놓여 있고 그 아래 그늘만 지면 훌륭한 피서지가 되는 풍경, 휴가라면 나는 그런 길이 좋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권태로운 풍경 말이다. 가는 길에 연꽃이라도 만나면 좋을 것이다.

 

연꽃 / 만나러 가는 / 바람 아니라 /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 한두 철 전 /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느림의 미학을 잔뜩 안은 미당의 시가 떠올랐지만 이번호에 모처럼 연꽃, 로터스(LOTUS)의 신차 소식을 담았다. 기아에서 잠시 생산했던 로터스 엘란은 정말 운전하기 재밌는 차였다. 시대의 변화를 거쳐 로터스가 이번에 선보이는 신차는 전기 하이퍼카. 디자인만으로는 과거 그 어떤 로터스보다 멋지다. 자동차의 세계는 아무리 트렌드가 바뀌어도 스타일이 먼저다. 그래서 이번호의 표지는 페라리 F8 트리뷰토. 현존하는 8기통 최고의 모델이다. 눈부시게 붉은 컬러의 스타일은 권태로운 풍경 뒤에 만나는 배롱나무 꽃 같다.

 

월간 <오토카 코리아> 2019.8월호에 실린 편집장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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