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 K9, 하이엔드의 갈림길에서

기아 K9는 스포티 럭셔리 세단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빠짐없는 장비와 빼어난 가속력 등 장점도 많다. 고성능 하이엔드의 성격을 끝까지 밀어부치지 못한 점은 아쉽다

2012-06-27     아이오토카

기아의 새로운 얼굴을 상징하는 타이거 노즈는 K9에 이르러 가장 호랑이다운 모습을 드러내었다. 헤드램프와 확연히 구분되어 도드라진 그릴은 존재감을 과시하고, 날렵한 눈매 속의 네모난 눈동자가 맹렬하게 먹잇감을 쫓는다. LED로 촘촘하게 세공한 수많은 눈동자는 메듀샤의 눈처럼 치명적이다. 그런데 이건 한국산 호랑이일까?

“전면부에서 복서가 뒤로 물러서지 않고 맞서는 느낌을 구현했다”고 기아 디자인 수장 피터 슈라이어는 말했다. 그 이미지가 바로 뇌리를 스치지는 않지만 공격적인 스탠스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전통적인 세단 비례보다는 롱 노즈 숏 데크의 스포츠카 비례를 따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대형 세단의 세계적인 경향이기도 하다. 보닛이 길어질 수 있도록 A필러를 좀 더 뒤쪽으로 가져갔고, 숄더가 높아 스포티한 이미지를 완성한다. 뒷바퀴굴림 레이아웃으로 품격과 파워를 추구했다는 게 피터 슈라이어의 설명이다.

앞모습에서의 강렬한 개성은 사이드부를 따라 뒤로 이어지며 긴장감을 유지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쉬운 점은, 전혀 새롭지 않은 뒷모습이 몰입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K라는 요즘 떠오르는 작가가 멋진 풍경화를 그렸는데, 그림 속의 작은집은 누가 봐도 유명 B작가의 화풍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이런 감상은 실내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도어를 열고 실내로 들어서면 고급스럽고 넓은 공간이 아늑하게 다가온다. 손에 닿는 각종 계기와 패널, 시트의 촉감이나 터치, 그립감이 한 차원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운전석에 앉아 뒤를 한번 쓱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뒷좌석 공간이 얼마나 넓은지 짐작할 수 있다(더불어 얼마나 편안할지도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이때, 전자식 변속레버(국내 최초로 적용되었다)의 모양이나 작동방식이 어디서 너무 많이 봐오던 것이다. 할 말을 잊게 만드는 디테일의 아쉬움이다.

“K9를 디자인 스튜디오에서만 바라보았는데, 직접 몰아보니 얼마나 편안한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실현된 꿈이다”라고 역시 피터 슈라이어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스티어링 휠을 잡고 도로에 나설 차례. 시승차는 3.8L 프레지던트. 최고급 풀옵션 모델이다. V6 3.8L GDI 엔진은 최고출력 334마력, 최대토크 40.3kg·m의 성능을 낸다. 시승코스는 철조망 너머 파도가 넘실대는 동해안 일대.

“이건 좀 예상을 넘어서는데…” 얼마간 달리기 시작하면서 생각한다. 전혀 덩치를 의식하지 않게 가속은 쉽고 빠르게 이루어진다. 놀라게 되는 것은 ‘빠르다’는 데 있다. 속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달리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것이다. 속도계 바늘의 상승에 익숙해져있다면, 헤드업 디스플레이의 디지털 속도가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헤드업 디스플레이는 그래픽이 선명하고 보기 좋다. 속도는 물론 내비게이션, 속도제한 등의 주행정보를 알기 쉽게 배치했다. 시선이 가는 곳에 주행정보가 있으니 확실히 운전에 집중할 수 있다. 헤드업 디스플레이가 좀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함인지 시트 포인트가 약간 높은 듯하다. 그리고 달리다보면 시트에서 ‘툭툭툭’ 치는 듯한 진동을 느끼게 된다. 후측방 사각지대에 차가 진입했음을 알려주는 경보장치다. 안전운전에 도움이 될 테지만 너무 자주 시트가 울어댔다.

고속도로에 올라 고속으로 달린다. 파워와 토크는 나무랄 데 없이 차체를 이끌고 자동 8단 기어는 부드러운 변속으로 가속을 돕는다. 조금 더 고속으로 올라서면 약간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불안할 정도는 아니지만 하체가 좀 더 묵직했으면 좋겠다는 인상을 받는다. 저속에서는 물론 고속에서도 승차감은 쾌적하다. 승차감에 치중한 세팅이다 보니 하체는 소프트한 쪽에 가깝다. 물론 너무 고속으로만 달리지 않으면 편안한 세팅이다. 여기서 K9는 드라이버즈카와 쇼퍼 드리븐의 성격 사이에서 살짝 고민하게 된다.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는 길, 브레이크를 강하게 밟고 속도를 줄이니 시트벨트가 상체를 꽉 조여 온다. 브레이크의 응답력도 좋다. 이어지는 코너에서 빠르게 감아 도는데 꽤 탄탄하게 트랙션을 유지한다. 고속에서 약간 가벼운 느낌과는 다르다. 강력한 뒷바퀴굴림의 성능이 잘 발휘되는 느낌이다. 멀티링크 에어 서스펜션과 댐퍼의 움직임은 기민하다. 차체자세제어장치(VDC) 등 전자식 주행안정장치가 저 아래에서 부지런히 작동중이다.

주행 모드는 에코, 노멀, 스포츠, 스노 4가지. 버튼을 눌러 가볍게 전환한다. 에코와 노멀의 차이는 크지 않지만 스포츠 모드에서는 하체가 좀 더 조여짐을 느낀다. 잠시 바다의 풍경 앞에 선다. 후진할 때 사방을 비쳐주는 어라운드 뷰 모니터링 시스템은 정말 잘 보였다. 사진촬영을 위해 방파제에 차를 올릴 때, 자칫 먼 바다로 갈 염려를 날려주었다.

K9는 여러 가지 장점과 매력이 많은 차다. 하나하나 장비를 보면 그야말로 없는 게 없다. 실내에서는 하도 기능이 많아 한참 공부를 해야 할 정도. 이제야 기아는 오랜 숙원이었던 플래그십을 가지게 되었다. 기아의 전략은 K9의 경쟁상대는 무조건(?) 수입차라는 데 있다. 그것도 최고급 럭셔리 세단을 상대로 한다. 물론 가격경쟁력은 충분해 보인다. 문제는 브랜드가 아닐까. 아우디가 벤츠와 BMW를 따라잡기 시작한 것도 근래의 일이다. 서둘러 브랜드 경쟁력을 말하기 전에 고유의 가치를 쌓아가야 한다. 프레스티지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게 역사성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격차를 줄이기 위한 조급증이 디테일의 아쉬움으로 남았는지 모른다. K9는 새로운 기아의 정점을 보여줌과 동시에 한계를 노출한 셈이다. 그 한계가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점이라는 데서 기아의 장래는 밝아 보인다.

글 · 최주식 <오토카 코리아> 편집장

KIA K9 3.8 President
가격 8천640만원
크기 5090×1900×1485mm
휠베이스 3045mm
엔진 V6, 3778cc, 휘발유
최고출력 334마력/6400rpm
최대토크 40.3kg·m/5100rpm
연비 10.3km/L
CO₂ 배출량 191g/km
변속기 8단 자동
서스펜션(앞/뒤) 모두 멀티링크
브레이크 V디스크/디스크
타이어(앞, 뒤) 245/45 R19, 275/40 R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