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코치빌더의 새로운 미래

2016-07-29     줄리안 렌델(Julian Rendell)

이탈리아 코치빌더계의 위대한 이름 피닌파리나와 이탈디자인은 한때 세계시장을 주름잡았다. 하지만 그들은 궁지에 몰렸고 이제 새 주인을 맞았다. 그리고 또 다른 위대한 이름 투어링 또한 힘을 얻고 있다. 투어링은 지난 제네바 모터쇼에서 디스코 볼란테 스파이더를 선보여 새로운 부활의 청신호를 보냈다. "어느 누구도 이탈리아 코치빌더가 다시 융성할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다. 그런데 이탈리아 토리노와 밀라노에는 새 생명이 꿈틀대는 조짐이 보이고 있다. 오랜 세월의 투쟁, 반란과 폐쇄에 뒤이은 드라마틱한 반전이다.” 카디프 비즈니스 스쿨의 자동차 전문가 폴 니원호이스의 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탈리아 코치빌더계에서 왕관의 보석과도 같은 피닌파리나가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다시 말하면, 드디어 고난의 10년에서 벗어나는 모습이다. 지난 10년 동안 3억950만 파운드(약 5천106억7천500만원)의 빚이 피닌파리나의 숨통을 죄고 있었다. 오랜 세월 새 투자원을 찾던 피닌파리나는 지난 6월 76%의 지배주를 테크 마힌드라에 넘겼다. 인도 산업계의 거대 그룹인 마힌드라의 자문업체다. CEO 실비오 피에트로 안고리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밀라노 증권거래소에 상장하고 독립체제를 지켜나가기로 했다. 따라서 우리는 마힌드라를 대주주로 맞아 안정을 찾고 글로벌 기업의 일부로 새 기회를 찾게 됐다.”
 

테크 마힌드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기업이다. 한 해 총매출액 25억 파운드(약 4조1천250억원)이고 전 세계 고용 인력이 10만5천명에 이른다. 그중 자동차계에서 활약하는 2천500명은 주로 디자인과 재정 자료를 처리한다. 자동차 분야의 총 판매액은 한 해 2억4천300만 파운드(약 4천95억원)인데 피닌파리나는 7천만 파운드(약 1천155억원)다. 이제 피닌파리나는 세계 3대 기술자문업체의 하나가 된다. 그와 경쟁하는 자문업체는 타타 서비스와 인포시스다.


피닌파리나는 테크 마힌드라 산하에서 전 세계로 사업을 확장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앞으로 4~6년 안에’ 그룹의 자동차 부문 총 판매액을 2배로 늘리는 데 한몫을 할 작정이라고 안고리가 말했다. 안고리가 CEO로 피닌파리나를 이끌어온 것은 2007년 6월부터였다. 피닌파리나 가문의 후계자 파올로 피닌파리나가 모터사이클 사고로 숨진 비극이 있기 직전이었다. 안고리는 안드레아스의 동생이며 회장인 파올로 피닌파리나와 함께 경영을 담당하고 있다. 가문의 비극으로 인한 격변과 세계 금융위기가 겹쳐 피닌파리나는 가공할 태풍에 휘말렸다. 그때 피닌파리나의 빚은 기업가치의 10배 이상으로 치솟았다. 
 

“여기서 업계 전반이 직면한 난국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 이미 상세한 기록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피닌파리나의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이탈리아 토리노와 밀라노의 코치빌더(디자인과 모델 제작 대행)는 예외 없이 금융위기에 뒤흔들렸다. 그때 자동차계에는 전략상의 대격변이 일어나 업계의 양상을 완전히 바꿨다.


먼저 자동차 메이커는 현대적인 최첨단 CAD 디자인 시스템을 완전히 소화했다. 따라서 무엇이든 설계할 수 있게 됐다. 아울러 디자인 컴퓨터를 조작할 인력을 길러 외부 디자인 전문업체에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됐다. 가령 피닌파리나는 1950년대에서 2013년까지 단 한 대 라페라리를 제외하고 모든 페라리를 디자인했다. 지금 페라리는 디자인을 완전히 사내에서 해결하고 있다.
 

한편 유연 생산라인의 발달로 자동차 메이커는 한때 피닌파리나와 베르토네가 하던 소량 생산을 자체 생산라인에서 소화할 수 있다. 피닌파리나와 베르토네는 텅 빈 공장에서 흘러나가는 막대한 유지비 탓에 사실상 벼랑 끝에 몰렸다. 베르토네는 이 격변의 가장 두드러진 희생자였다. 창사 102년 만인 2014년 파산의 구렁에 빠졌다. 이로써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위대한 디자인 스튜디오의 리스트에 올랐다.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가진 이탈디자인은 2008년의 세계적 금융위기를 간신히 모면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2010년 폭스바겐 그룹에 팔려 독립성을 잃었다.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1968년 창업한 뒤 42년만의 수모였다. 현재 CEO 요르크 아스탈로쉬는 사업 중심의 새로운 전략을 짜고 있다. “우리는 6개의 핵심 과제를 중심으로 재건하고 있다. 먼저 최대성과를 올릴 부분에 투자한다.” 아스탈로쉬는 이탈디자인의 사업을 다른 자동차 메이커로 확대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탈디자인은 사업물량의 태반을 폭스바겐 그룹의 과제로 채우고 있다. 그 현실을 마음에 두고 이탈디자인은 제네바 모터쇼에 GT 제로를 내놨다. 시대의 대세를 앞서가는 트렌드를 과시하는 창작품이었다. 오로지 가상현실 기술을 구사해 고속 디자인과 제작 능력을 보여줬다. 따라서 클레이 모델 단계의 시간과 비용을 절약했다.


“우리 미래를 보여줬다. 더 빨리 더 효과적인 비용으로 차를 만들 수 있다. 따라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탈디자인의 디자인 총책 필리포 페리니의 말. 이탈디자인은 독일의 폭스바겐 그룹 산하에 들어갔고, 피닌파리나는 인도 그룹 마힌드라의 일부가 됐다. 물론 시간이 증명하겠지만, 그룹의 분위기로 봐 이탈디자인이 제3의 작업을 따내기가 더 어려울 것으로 본다. 이탈디자인은 폭스바겐 그룹의 심장에 바싹 다가갔고, 현재 아우디가 90%를 차지하고 있다. 그 변화에 이어 77세의 창업자 주지아로가 지난해 떠났다. 역설적으로 그 유산을 강조하기 위해 기업명을 이탈디자인 주지아로로 바꾸고 회사 로고도 새로 만들었다.
 

“지난해 영업실적은 48년 역사상 최고였다. 작업량의 태반은 그룹의 의뢰다. 물론 우리는 그런 환경을 벗어나고 싶다. 우리는 폭스바겐만 아니라 전체 업계의 싱크탱크다.” 현재 이탈디자인의 사업물량 중 65%가 생산기술, 25%가 프로토타입 그리고 15%가 스타일 개발 작업이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차량 구조, 외부 패널과 프레스공구 설계가 코치빌더의 주업무였다. 하지만 혹한/폭염 시험차를 비롯한 최첨단 모델 개발 기술은 덜 알려졌다. 우리 <오토카> 스파이 사진기자가 그런 모델을 촬영했다. 15명의 이탈디자인 정예팀이 한 해 최고 600대의 ‘양산전’ 모델을 만든다.


대다수 자문업체와 마찬가지로 피닌파리나도 3개 핵심 사업을 중심으로 전략을 짰다. 그 가운데 2개인 공정기술은 55%, 디자인은 20%. 이탈디자인과 비슷한 활동 내용이다. 한데 제3 분야는 아주 다른 주문제작 모델이었다. 피닌파리나 한정판의 최고 모델은 세르지오. 보디를 새로 입힌 페라리 458 스파이더로 대당 수백만 파운드에 이르는 6대 한정판이다. 최고 부자들 사이에서 금맥을 캐는 작업이다. 추산에 따르면 한 해 300~500대가 대당 175만 파운드(약 25억9천50만원) 또는 그 이상으로 수집가들 사이를 오간다. 앞으로 그 이상의 모델이 나온다. 피닌파리나는 미확인 10개 한정판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이들 주문형 차 시장은 투어링 슈퍼레제라가 노리는 분야이기도 하다. 지금 투어링은 디스코 볼란테의 2차 한정판을 만들고 있다. 문제의 차는 오픈톱 스파이더 버전이다. 보디를 새로 입힌 알파로메오 8C는 디스코 볼란테 시리즈로 1952년의 ‘플라잉 소서’(비행접시)를 연상시킨다. 이 차의 공력적인 곡면 보디는 세계에서 가장 바람직한 차로 이름을 떨쳤다. 재규어 F-타입이 나오기 9년 전이었다.


투어링은 특이한 사례다. 겨울잠에 들어간 지 40년 뒤 되살아났다. 일단의 투자자들이 2006년 그 이름을 들고 나와 새 사업을 시작했다. 투어링 슈퍼레제라는 1930년대에 세상에 나온 경량 튜브 보디로 처음 나온 차였다. 당시 슈퍼레제라는 오늘날의 탄소섬유 보디와 맞먹는 최첨단 기술을 담아냈다. 그 기술은 애스턴 마틴의 DB 시리즈에 이용됐고, 2014년에는 미니 슈퍼레제라 비전 콘셉트를 뒷받침했다. 그 뒤 BMW의 제3세대 미니로 등장했다.
 

“지금의 투어링을 상징하는 것은 디자인과 고품질 소량 시리즈와 단일 수제차다.” CEO 피에로 만카르디의 말. “우리 회사는 작고, 주로 수제 전문가로 이뤄졌다. 손으로 정성을 들여 물건을 만들 수 있다.” 지금까지 투어링은 디스코 볼란테 계획 8대 중 6대와 벤틀리 컨티넨탈 플라잉 스타 왜건 5대를 팔았다. 시장에서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손으로 그 차를 만들 때 들어간 시간. 디스코 볼란테 스파이더는 4천500시간, 플라잉 스타는 4천 시간이다. 그래서 값은 수십억원으로 올라갔다. 복원작업이 투어링 사업의 제2 부문이고, 람보르기니와 롤스로이스의 고급 모델 페인팅이 제3 부문이다. 믿을 수 있는 정기적 수입으로 한층 화려한 작업을 뒷받침한다.


이와 같은 정기적 수입이 정상급 디자인 스튜디오의 새 물결을 지켜 나간다. 동시에 새로운 틈새를 찾아내는 기회를 제공한다. 적어도 이들이 이탈리아 코치빌더의 경이적이고 이색적인 차와 빛나는 미래를 보장해주길 바란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위대했던 카로체리아

20세기 초 코치빌더 또는 이탈리아어로 ‘카로체리아’는 새 차의 보디를 만들었다. 그리고 알파로메오, 란치아, 이소타 프라스키니와 같은 섀시제작업체의 제품에 새 옷을 입혔다. 그러나 두 번의 세계대전, 통합 모노코크 섀시와 금융위기 등이 덮치면서 카로체리아를 대여섯개로 확 줄였다. 위대했으나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카로체리아를 소개한다.
 

베르토네(BERTONE)
1950년대에서 1970년대의 환상적 스포츠카와 콘셉트로 가장 유명했던 카로체리아. 경이적인 1950년대 BAT 콘셉트 시리즈, 알파 몬트리올, 람보르기니 카운타크, 피아트 X1/9와 란치아 스트라토스를 남겼다. 1990년대를 비틀거리며 지나고 세계금융위기에 목이 졸렸다. 드디어 2014년 베르토네는 쓰러지고 말았다.

프루아(FRUA)
제2차대전 뒤 피에트로 프루아는 피아트와 마세라티의 보디를 갈아입혀 틈새를 만들었다. 1960년대에 이르자 프루아 보디는 부유한 고객에게 고상한 취향의 징표로 받아들어졌다. 기아가 프루아를 사들였으나 1983년 프루아가 세상을 떠나자 문을 닫았다.

기아(GHIA)
1930년대 기아는 밀레 밀리아에 쓰인 알루미늄 보디로 이름을 떨쳤다. 그 뒤 1950년대의 아름다운 크라이슬러와 페라리 스페셜을 타고 절정에 올랐다. 10년 동안 요동치던 기아는 1970년 포드에 팔렸다. 그를 바탕으로 기아는 2002년까지 디자인 싱크탱크로 목숨을 부지했다.
 

마지오라(MAGGIORA)
원래 란치아와 치시탈리아의 소량 보디 전문업체였고, 그 뒤 피아트 바르케타와 란치아 카파를 주로 다뤘다. 거의 80년간 사업을 이어갔으나 일거리가 바닥나자 2003년 문을 닫았다.
 

스칼리에티(SCAGLIETTI)
당초에 페라리의 엄선된 보디 제작자로 유명했고, 피닌파리나 디자인을 실물로 완성시켰다. 스칼리에티는 페라리를 따라 1960년대 말 피아트 경영진에 들어갔다. 모데나의 작업장은 페라리 보디 조립공장으로 바뀌었다.
 

비날레(VIGNALE)
거의 같은 시기에 비날레는 포드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포드는 지금 그 이름을 최고급 모델명으로 쓰고 있다. 제2차대전 이후에 나온 비날레는 알파 로메오, 애스턴 마틴과 페라리의 초정밀 보디 제작으로 한때 이름을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