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 바람, 수면

2012-09-12     최주식

지난달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는 백야의 막바지였다. 아무리 끝물이라도 백야는 백야. 밤 12시에도 아직 초저녁 같은 분위기가 사뭇 생경하면서도 이채로웠다. 기내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었다. 오랫동안 미뤄온 책이었다. 인상적인 문장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갔지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태양, 바람, 수면이다. 그것이 만고의 진리이다”는 문장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서울에 왔을 때는 열대야가 기승을 부렸다. 잠을 자기 어려웠다.

최근 힐링 바람이 거세다. 서점에서는 스님들이 쓴 책이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휩쓸고 있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휴식과 명상, 여행 등의 주제는 외면할 수 없는 달콤함으로 다가오지만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은, 너무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프다. 그래서 대충 외면하면서 살아가는지 모른다. 그런데 자꾸 태양, 바람, 수면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돈다. 정말 이것만 있으면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랬으면 좋겠다.

바람의 섬, 제주에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프리우스를 탔다. 가전제품처럼 가정용 220V 전원으로 충전을 하고, 그것으로만 26km를 달린다. 달리는 거리가 그 이상이 되면 하이브리드 시스템으로 자동 전환된다. 전기차처럼 배터리가 방전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그리고 생각보다 연비가 좋지 않다는 기존 하이브리드 카의 핸디캡을 개선한 방식이다.

운전습관에 따라 차이는 크지만 프리우스 PHV의 공인연비는 61km/L에 이른다. 이런 차를 타게 되면 무엇보다 가속력이라든지 차체의 성능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이 차가 지향하는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속도를 내더라도 전체적으로는 여유 있게 운전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동차에 대한 생각도 이제 조금씩 바뀌어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가하면 지난달 본지에 소개된 부가티 베이론 비테스처럼 W16 8.0L 쿼드 터보 1,199마력 엔진을 얹은 슈퍼카도 만들어지는 게 자동차 세상이다. 가격은 우리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25억원에 이르지만 말이다. 그리고 테슬라의 전기차 모델 S는 1억원이 넘는다. 엔진이 아닌 전기모터만을 얹었음에도 422마력의 고출력을 낸다. 0→시속 100km 가속은 5초 이내다. 슈퍼카의 변방 슬로베니아에서 만든 슈퍼카 역시 지난 호에 소개되었다.

이달에도 슈퍼카 파가니 존다 와이라가 지면을 가득 채운다. 차체 뒤쪽에 트윈터보 V12 6.0L 720마력 엔진을 얹고 최고시속 360km를 달리는 차. 가격은 11억7천여만원에 이른다. 자동차 저널리즘에서 다루는 분야는 이처럼 극과 극을 치닫는다. 이번에 새로 국내 중형차 시장 문을 두드리는 폭스바겐 파사트 같은 차가 지금은 현실적인 차인셈이다. 파사트는 유럽형 모델인 아닌 미국에서 생산되는 미국형 모델이 들어오는데, 딜러들이 선호했다는 후문이다. 트렁크에 골프백 4개 수납은 기본! 국내시장에서 어필할 수 있는 차라는 의미다. 국산차와 수입차의 경쟁은 이제 실질적인 클래스에서 부딪치고 있다.

긴 여름이 위대했다고, 릴케가 노래한 것은 무더운 여름이 있었기에 가을의 풍요가 가능하기 때문이리라. 열대야가 한풀 꺾이고 선선한 바람이 이마를 적신다. 이럴 때 떠오르는 폴 발레리의 시가 있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올 여름을 견뎌낸 모든 독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월간 오토카 코리아 2012.9월호 편집장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