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프 랭글러의 독보적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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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프 랭글러의 독보적인 ‘길’
  • 류청희
  • 승인 2018.10.02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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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프 랭글러는 정통 오프로더의 살아있는 역사이면서 독보적 존재다. 새 엔진을 비롯해 달라지지 않은 곳이 없다고는 해도, 언뜻 보아서는 잘 모르겠다. 자동차 평론가 류청희는 어떤 차이를 느꼈을까?

지프 랭글러는 늘 오프로더 가운데 독보적 존재였다.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성격을 지녔던 랜드로버 디펜더는 2년 전에 생산이 중단되었고, 성격과 구조가 비슷한 메르세데스-벤츠 G-클래스는 생김새와는 달리 훨씬 더 젊다. 1946년 출시된 CJ-2에 뿌리를 두고 진화와 발전을 거듭한 ‘오리지널 지프 혈통’의 랭글러는 누구나 인정하는 오프로더의 산 역사다.

 

랭글러라는 이름이 쓰이기 시작한 지도 벌써 32년이 되어, 랭글러만 따져도 벌써 4세대에 이른다. 그중에서도 이전 세대 모델인 JK(개발명) 랭글러는 수명이 길었다. 앞서 나온 다른 랭글러보다 2년 더 긴 12년간 생산되었다. 그럼에도 감히 ‘장수했다’는 표현을 쓸 수 없다. 무려 29년이나 생산된 CJ-5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동차의 전반적 제품 수명이 짧아진 요즘 기준으로는 장수 모델의 하나로 꼽을 만하다.

 

이전 세대 모델이 오래 생산되었다는 것은 새 모델에 대한 시장의 기대가 컸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번에 출시된 JL 랭글러는 원래 2년쯤 전에 나올 예정이었지만, FCA의 복잡한 내부 사정으로 개발 막바지에 많은 것이 뒤집어지고 재조정되었다. 제품 출시 일정이 2년이나 늦어지는 것은 업계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다. 새 랭글러 출시가 늦어지며 소비자의 기대치가 높아지는 만큼 개발자들의 압박과 긴장감도 함께 커졌을 것이다. 과연 그들의 노력이 소비자들의 높아진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새 랭글러를 만나며 들었던 가장 큰 의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가장 애를 먹었을 사람들은 아마도 디자이너들이었을 것이다. 무려 75년이나 되는 세월동안 지켜온 ‘오리지널 지프’의 디자인 특징을 살리면서도 새로운 느낌이 들도록 손질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골치가 지끈거리는 일이다. 실제로 전체적인 실루엣은 이전 세대와 큰 차이가 없지만 구석구석 들여다보면 달라지지 않은 부분이 없다. 재미있는 점은 그동안 나온 CJ 시리즈 지프와 이전 세대 랭글러의 특징적 요소들을 절묘하게 버무리고 변형한 모습이 곳곳에서 엿보인다는 것이다.

 

절묘하게 조절한 헤드램프와 7 슬롯 그릴의 비율, 헤드램프 부근에서 한 번 꺾이는 앞부분, 앞 펜더 앞에 가로 놓인 차폭등과 방향지시등은 두 세대 전 모델(TJ)과 비슷하다. 약간 부풀린 보닛 형태는 CJ-5와 CJ-7이 떠오른다. 7 슬롯 그릴 위에 돋을새김 했던 ‘Jeep’라는 글씨는 사라졌다. 사각형으로 튀어나온 테일램프는 특이하게도 같은 브랜드 소형 SUV인 레니게이드와 비슷한 분위기다.

 

옆모습도 이전 세대 언리미티드 모델과 거의 비슷하지만 구석구석 살펴보면 달라진 점이 눈에 들어온다. 눈치 채기 어렵지만 앞 유리도 이전보다 조금 더 누웠고, 옆 유리는 아래쪽으로 더 커졌다. 사이드미러가 달리는 부분에서 시작해 차체 끝까지 이어지는 캐릭터 라인이 넓어진 옆 유리를 강조한다. 앞 펜더도 휠 아치에서 차체 쪽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비스듬히 기울어 좀 더 날렵해진 느낌이다. 펜더 뒤에 더해진 공기배출구 장식도 잘 어울린다.

 

랭글러의 지붕을 떼어내면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

 

온로드용 타이어를 끼운 사하라는 차체 옆 아래에 발판이 있고, 오프로드용 타이어를 끼운 루비콘은 발판이 없는 대신 차체가 더 높다. JK 후기형의 실내 디자인도 꽤 산뜻하고 보기 좋았는데, 이번 모델의 것은 더 짜임새가 있다. 전통과 새로움의 조화에 신경을 쓴 느낌이 뚜렷하다. 여러 곳에 쓰인 사다리꼴과 팔각형 디자인 요소는 실내에 정돈된 느낌을 더한다. 

 

물론 가죽을 씌우지 않은 부분들의 재질은 투박하고, 요즘 대중차들의 수준을 밑도는 조립품질은 여전하다. 그럼에도 불평하게 되지 않는 이유는 이 차가 랭글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립상태가 왠지 엉성해 보이는데도 도로 상의 요철이나 비포장도로를 가볍게 달릴 때 잡소리가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만큼 차체 구조가 견고하고, 허술하게 조립된 듯한 내장재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은 튼튼하다는 뜻일 것이다.

 

실내는 심플하지만 짜임새 있는 구성이 돋보인다

 

대시보드는 평면적이면서도 밋밋하지 않다. 계기판과 인포테인먼트 스크린, 둥근 공기배출구가 같은 평면에 놓여 있어 정돈이 잘 된 느낌이다. 계기판은 두 개의 둥근 아날로그 방식 엔진 회전계와 속도계 사이에 대형 컬러 정보 표시창을 배치했다. 엔진회전계 안쪽 오른편에 있는 작은 LCD 표시창에는 네바퀴굴림 장치의 체결상태가 표시된다. 인포테인먼트 스크린은 FCA의 최신 유커넥트(Uconncect) 시스템을 표시하는데, 자주 쓰는 기능의 아이콘을 사용자가 재배치할 수 있어 편리하다.

 

다만 다른 FCA 계열 차들처럼 내비게이션 시스템은 여전히 경로 설정과 안내 기능이 국내 실정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고, 한글 글꼴은 다른 UI 디자인과 어울리지 않는다. 투박한 생김새와는 달리 장비 배치는 기능에 충실하다. 도어와 지붕을 모두 떼어냈을 때 실내가 외부 환경에 노출되는 상황을 고려해, 파워 윈도 스위치는 센터페시아와 센터콘솔 뒤에 몰아 놓았다. 전자식 주차 브레이크 스위치는 물론이고 주행 관련 기능을 조절하는 버튼과 스위치들은 모두 기어 레버 주변에 있다.

 

2열 시트를 접으면 2050L의 광활한 적재공간이 나타난다

 

사하라 모델에는 센터페시아 아래쪽에 스마트폰을 두기에 충분한 수납 공간이 있는데, 루비콘 모델에서는 그 자리 절반을 디퍼렌셜 잠금 기능 작동 및 해제 스위치와 스웨이바 분리 및 체결 버튼이 차지한다. 컵홀더 크기도 넉넉하고, 앞좌석 사이의 콘솔박스는 표준 단렌즈를 끼운 DSLR 카메라를 넣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다. 도어와 지붕을 분리했을 때에도 탑승자를 보호할 수 있도록 롤 케이지 형태의 구조물이 사람 타는 공간 바깥쪽을 두르고 있다.

 

롤 케이지 중 천장을 가로지르는 것들에는 오디오 스피커도 배치되어 있고, 좌석 있는 곳 주변은 안쪽은 내장재로 마감했다. 앞좌석 천장은 좌우가 분리되어 있다. 각각 네 개의 고정 장치만 손으로 풀면 한 사람만 있어도 쉽게 떼어내 타르가 톱처럼 만들 수 있다. 뒤쪽 천장도 차와 함께 제공되는 공구를 써서 볼트 몇 개를 풀고 전기장치 연결 커넥터를 분리하면 쉽게 떼어낼 수 있다. 물론 덩치와 무게 때문에 한 사람이 하기에는 무리다.

 

랭글러의 앞모습은 7 슬롯 그릴과 헤드램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짐 공간에 접근할 수 있는 뒤 도어 턱 부분에는 도어와 지붕을 떼어내고 앞 유리를 앞으로 접을 때 분리하는 볼트를 끼워 넣을 수 있는 구멍이 갯수에 맞춰 나 있다. 그 아래에는 타이어 교체 때 쓰는 잭이 들어 있다. 이곳저곳 쓰임새를 고려한 기능이 아기자기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실내 공간은 이전 세대보다 넓고 길어졌다. 높은 대시보드 때문에 앞좌석 주변 공간의 변화는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지지 않지만 좌석 자체의 크기와 안락함은 충분히 만족스럽다.

 

뒷좌석은 무릎 공간 여유가 커졌고 이제는 답답하게나마 어른 세 사람이 나란히 앉을 수 있을 정도가 됐다. 다만 눈으로 보이는 뒷좌석 무릎 공간의 넉넉함이 실제 공간의 넉넉함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좌석 앉는 부분 길이가 짧아서 막상 앉아보면 앞좌석과의 사이 공간이 아주 넓지는 않다. 그럼에도 이전 세대보다는 답답함이 크게 줄었다. 뒷좌석은 등받이가 6:4 비율로 나뉘어 각각 레버 조작 한 번으로 쉽게 접을 수 있고, 접을 때엔 앉는 부분이 자동으로 내려앉아 등받이 뒤와 짐칸 바닥이 평평하게 이어진다. 

 

루비콘은 거친 오프로드에서 더욱 빛이 난다

 

짐 공간의 아래쪽 문을 옆으로 열고 유리 부분을 들어 올리면 짐을 싣고 내릴 수 있다. 짐 공간 바닥은 높지만 이전 세대보다 차체가 커지면서 쓸 수 있는 공간도 함께 커졌다. 또한 짐 공간 바닥 아래에도 작은 짐을 둘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달리는 느낌의 차이는 안팎 모습의 변화보다 더 뚜렷하게 다가온다. 이런 변화의 일등공신은 새 동력계와 구동계다. 이전 세대 모델은 직렬 4기통 2.8L 디젤엔진과 펜타스타 V6 3.6L 가솔린엔진이 주력이었지만, 국내에 들어온 새 모델은 우선 2.0L 터보 가솔린엔진만 얹는다.

 

최고출력은 272마력으로 V6 엔진보다 12마력 낮지만, 최대토크는 5.4kg·m 높아진 40.8kg·m이다. V6 엔진보다 회전질감과 소리는 조금 더 거칠지언정, 진동은 예상보다 적고 소리도 잘 걸러져 부드럽게 전달된다. 변속기는 수동 기능이 있는 새 8단 자동이 기본이다. 큰 덩치를 생각하면 배기량이 작아 보이지만 엔진은 기대 이상의 성능과 유연성으로 의외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절묘한 기어비 구성의 도움을 받아 회전수가 낮을 때부터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가속한다.

 

2.0L 터보 가솔린엔진을 얹어 한층 조용하고 부드러워졌다

 

물론 덩치 큰 차를 몰고 있다는 묵직한 느낌이 어느 정도 들기는 해도,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만큼 자연스럽게 속도가 붙고 페달을 깊이 밟으면 킥다운과 함께 조금은 시원스런 가속감도 맛볼 수 있다. 변속은 부드러우면서 적당히 빠른 편이고, 기어비 간격도 적당해 엔진 힘을 꾸준히 활용하기 좋다. 스티어링은 사다리꼴 프레임을 쓰는 정통 오프로더답게 느슨하다. 그러면서도 스티어링 휠을 돌리면 반 박자 늦게 머리가 돌아가던 이전 세대 모델과 비교하면 반응이 훨씬 더 자연스러워 다루기가 좋아졌다.

 

부드럽고 고르게 반응하는 브레이크도 차를 다루는 느낌을 좋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다. 포장도로에서는 평범한 도시형 SUV와 비교해 조금 탄탄한 느낌이 들기는 해도 몰기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거칠지 않다. 이전 세대보다 뒤뚱거리는 느낌이 줄고 승차감은 이전 세대보다 좀 더 너그럽고 편해졌다. 기본 구성이 같은 사하라와 루비콘의 차이는 포장도로와 오프로드에서 달릴 때 나타나는 특성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다.

 

사하라는 이전 세대보다 훨씬 너그럽고 편한 승차감을 선사한다

 

사하라가 좀 더 편안한 주행감각으로 포장도로에서 몰기에도 무리가 없다면, 루비콘은 포장도로에서는 조금 거칠게 느껴지다가도 지형이 험해지면 험해질수록 제 실력을 보여준다. 잘 닦인 포장도로에서 사하라는 의외의 조용함과 차분한 주행감각이 돋보인다. 요철에서는 차체 위아래 움직임이 크지 않으면서도 충격을 거칠지 않게 흡수해서 피로감이 적다. 상대적으로 루비콘은 오프로드용 러그형 타이어가 끼워져 있어서 바퀴가 구르는 내내 타이어 소음을 들어야 한다.

 

가속할 때나 고속으로 달리며 회전할 때 안정감이 조금 떨어지는 것도 타이어의 영향이 크다. 그러면서도 차체 움직임이나 나머지 소음에서는 사하라와 큰 차이가 없다. 네바퀴굴림 장치도 사하라에는 셀렉트랙(Selec-Trac)이, 루비콘에는 록트랙(Rock-Trac)이 쓰인다. 두 장치 모두 평소에는 뒷바퀴를 굴리다가 필요할 때에만 네바퀴굴림으로 전환할 수 있는 파트타임 네바퀴굴림 방식이다.

 

사하라는 온로드용 타이어를, 루비콘은 러그형 타이어를 끼워 확실한 차별성을 보였다

 

기어 레버 오른쪽에 있는 선택 레버를 이용해 기계식으로 조작하는 전통적 방식이지만, 이전에는 없던 4륜 고속 기어 상태에서 자동으로 구동력을 배분하는 기능(4H Auto)이 추가되었다. 록트랙에는 셀렉트랙에 없는 앞뒤 디퍼렌셜 잠금 기능과 스웨이바 해제/체결 기능이 있고, 저속 기어비가 더 크다. 이 기능들이 오프로드에서 갈 수 있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판가름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실 온로드용 타이어를 끼운 사하라도 웬만한 험로는 어렵지 않게 헤쳐 나갈 수 있다. 크고 작은 돌이 쌓인 언덕을 올라갈 때에도 저속 기어 상태라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부드럽게 치고 올라간다. 그러나 루비콘은 그보다 더 험한 조건에서도 걱정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낮은 저속 기어비 덕분에 더 천천히, 그러나 더 큰 힘으로 장애물을 차고 올라간다. 낮은 회전수에서도 충분한 힘을 내는 새 엔진 덕분에 이전 세대 V6 가솔린엔진 모델보다 거친 노면에서 차를 섬세하게 조절하기도 더 좋아졌고, 장애물을 타고 넘을 때마다 출렁이던 차체도 차분해져 험로를 달리면서도 긴장감이나 피로감이 훨씬 덜하다. 

 

오프로드에서도 전자장비가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하는 시대가 됐지만, 랭글러는 전통적인 기계적 구성에 전기나 전자 장비를 살짝 더하는 정도로도 충분히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게다가 점점 잊히고 있는 ‘차를 다루는 재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쯤 되면 전체적으로 훌륭하게 업그레이드되었다는 평가가 지나치지 않다. 값은 거의 모든 트림에 걸쳐 1000만 원 남짓 올랐다. 5000만 원대였던 차가 6000만 원대가 됐으니 거의 20%가 오른 것이다. 그만큼 차가 많이 바뀌고 좋아졌다고 해도, 가격인상이 그쯤 되면 한 번은 망설이게 된다.

 

그럼에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 랭글러의 대안이 될 만 한 차는 마땅치 않다. 흔한 도시형 네바퀴굴림 차들이 갈 수 없는 곳을 갈 수 있고, 웬만한 오프로더들이 작정하고 튜닝해야 갈 수 있는 곳을 타이어만 바꿔도 거뜬히 갈 수 있다. 게다가 75년을 이어온 전통의 스타일과 카리스마에 최신 편의장비와 안전장비가 어우러져, 고전적 분위기와 현대적 편리함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차도 드물다. 새 랭글러는 태어나기 전부터 그렇게 만들어지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동안 걸어온 길이 그랬고 앞으로 갈 길도 그럴 것이다. 제품과 서비스의 신뢰성만 뒷받침된다면 랭글러의 독보적인 명성은 이번 세대에도 그대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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