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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슨 버튼, 파란만장 레이스 인생
2009년 F1 챔피언 버튼은 패스트 카를 수집하고 슈퍼모델과 데이트를 즐긴다. 게다가 자신의 대형 요트를 직접 몰고 와 모나코 그랑프리에 출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레이스만큼은 언제나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2018년 09월 14일 (금) 15:44:51 짐 홀더(Jim Holder) c2@iautocar.co.kr
   
 

젠슨 버튼. 도대체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의 F1 활동을 따라가 보자. 그는 과시주의자이고 여성편력자이며 최고의 머신을 만난 행운의 드라이버였다. 2009년 F1 세계 챔피언에 오른 그는 F1에서 15승을 거머쥐었다. 특히 맥라렌 팀에서 3년간 활약하던 때는 ‘F1 강자’ 팀 동료 루이스 해밀턴을 꺾어 F1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버튼의 실체를 파헤치고자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좋은 기회다. 그가 F1을 떠난 지 18개월이 흘렀다. 지난 시즌에는 미국 인디 500에 출전한 페르난도 알론소를 대신해서 모나코 그랑프리에 출전한 것이 전부다. 그는 약혼녀 브리트니 워드와 미국 LA에 가정을 꾸리며 아주 편안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 일본 슈퍼 GT 레이스와 르망 시리즈의 프로토타입에 출전하며 프로 생활을 이어갈 뿐이다. 대신 F1 중심의 다양한 논평과 흥행 사업에 관여하고 있다. 

 

   
지금 버튼은 최초의 슈퍼 GT 시리즈에서 하늘을 날고 있다

 

우리는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 부근의 헝가로링 서킷에서 버튼을 만났다. 버튼은 우리와 만나기 전 3일 동안 태국에서 보냈다. 챔피언십 시리즈를 이끌던 그와 팀 동료들은 밸러스트 페널티(무게 기준에 미달된 경주차에 적절한 중량을 부과하는 것) 때문에 꽤 실망스러운 슈퍼 GT 레이스를 이어가고 있다. 새벽 2시에 헝가리에 도착한 버튼은 꼬박 하룻동안 작업을 한 다음 LA의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영국으로 돌아가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에 출전해야 하는 바쁜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

 

그래서 피곤하냐고 물었다. “완전 녹초가 됐다.” 간결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약간 지나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도 바꿀 생각은 없다.” 버튼의 초년 시절 기록은 지난해 세상에 나온 그의 빼어난 자서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은, 19살이었던 그가 F3에서 윌리엄즈 F1팀 드라이버로 수직상승하며 영국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때마침 영국의 희망 데이먼 힐이 은퇴를 선언하자 미숙했던 그에게 F1 챔피언의 막중한 기대감이 쏠렸다는 대목이다. 

 

   
어려보이는 버튼은 19세에 윌리엄즈 F1팀에 가담했다

 

그리고 첫해인 2000년은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하이라이트는 윌리엄즈 대신 베네통 팀과 2년 계약을 맺은 것이다. 당시 F1 시스템은 두 명의 드라이버로 구성됐는데, 베네통 팀은 3명의 드라이버와 계액을 체결했다. 그때부터 ‘골든보이’ 버튼의 명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 역시 내 재능을 지나치게 믿었고, F1에서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베네통은 꼴통이다. 특히 플라비오가 팀을 틀어쥐고 있었다.” 난처한 질문에도 그는 피하려 하지 않았다. 플라비오 브리아토레는 베네통의 독재자였다. 시즌 중간에 공개적으로 버튼을 비난해 그의 페이스를 떨어뜨리기도 했다(혹은 버튼을 쫓아낼 구실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버튼과 해밀턴: 지난날 맥라렌 팀 듀오였다

 

당시 버튼은 새로 사들인 고급 요트를 직접 몰고 와 항구에 보란듯이 정박하고 모나코 그랑프리에 출전했다. 이걸 플라비오가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그는 초호화판 생활과 양쪽에 슈퍼모델을 끼고 향락을 즐기는데 이골이 난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베네통을 F1의 최정상까지 끌어올린 명장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설익은 드라이버에 불과했던 버튼이 벌써 F1 정상에 오른 듯 행세한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버튼은 오랫동안 굳어진 자신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브리아토레의 비난 탓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 

 


버튼이 “요트를 몰고 와서 모나코에 출전한 것은 명백한 나의 실수였다”고 말문을 열었다. “알다시피 당시 나는 요트를 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내게는 분에 넘쳤고, 오래지 않아 다시 팔아야 했다. 당시 요트를 사자 모나코 그랑프리에 출전할 때 몰고 가라는 달콤한 유혹이 있었고, 나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절대로 빠지지 말았어야 할 유혹이었다. ‘플레이보이’라는 악평도 거기서 시작됐다. 나의 비상식적인 행동이 비난을 자초한 것이다.

 

   
2009년 버튼은 드라이버즈 타이틀로 브라운 그랑프리 팀에 영광을 안겼다

 

사실 나는 그러한 생활과 거리가 멀다. 꾸준히 만나고 있던 여자친구가 있었고, 파티를 좋아하지만 안정된 생활을 더 좋아한다. 나는 LA의 클럽에 언제 갔는지 기억조차 없다.” 이어 그는 “당시 나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일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플라비오도 그렇게 파고들었다. 나는 내가 플레이보이 행세를 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물론 곁눈질을 했고 목표를 향해 전력투구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문제를 재빨리 해결했다. 비판은 당연했지만 나는 그런 비판이 끝나기 오래 전에 내 행실을 바로잡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스포츠계에서는 우승하지 않았을 때 문제가 생긴다. 항상 시상대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없다. 그럴 때마다 으레 그 까닭을 꼬치꼬치 캐고 든다. 사실 때로는 단순히 운이 나쁜 날이 있고, 다른 드라이버의 사고에 말려들 수도 있다. 하룻밤 사이 드라이버의 재능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소속팀과 무엇이 잘못됐는지 분석할 때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정신적 압력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드세다.

 

   
2015년 버튼과 맥라렌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다음날 아침이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최고의 실력을 발휘한다. 그런 경지에 도달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자신감을 길러야 한다.” 자신을 다잡는데 몇 년이 걸렸다. 그동안 버튼은 르노와 혼다 워크스팀에서 활동하며 재기를 노렸다. 그는 윌리엄즈 복귀 계약이 파기되면서 명예와 수입에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이후 버튼은 브라운, 맥라렌과 손을 잡았다. 이때 행운이 찾아왔다. 브라운이 챔피언십 카로 등극한 것이다. 그리고 맥라렌에서는 해밀턴 그리고 알론소와 정면 대결을 펼치면서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나는 여기 앉아서 내 업적에 대해 변명이나 하고 있을 수 없었다.” 버튼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와 같은 드라이버 커리어를 누린 것은 행운이 아니었느냐고 따지고 들자 정중하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프롬(자기 고향)에서 온 소년’으로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는 6월에 열리는 르망 24시간의 SMP 레이싱으로 데뷔했다

 

얼마나 많은 레이싱 드라이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까지 올 동안 정말 최선을 다했다. 우리 세대의 가장 뛰어난 드라이버와 맞서 내 실력을 입증했다. 일부에서는 폴포지션(예선 1위)을 보고 드라이버의 실력을 판가름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득점을 기준으로 삼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나는 같은 차를 몰고도 세계 챔피언 몇 명을 따돌렸다. 그 이상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유감스럽게도 버튼의 F1 커리어는 성능이 뒤떨어진 맥라렌-혼다 머신의 운전대를 잡으면서 김이 빠졌다. 2014년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불행까지 겹쳤다. 그는 버튼을 8살 때부터 드라이버로 키운 인생의 멘토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그때부터 버튼의 인생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버튼은 “F1 드라이버라면 어린 시절부터 레이스에서 승리를 거둔 경력을 갖고 있다. 요즘 알론소를 보라. F1에서 계속 우승한다면 인디나 르망을 기웃거릴 이유가 없다.

 

   
버튼은 플라비오 브리아토레(왼쪽)와의 아슬아슬한 관계를 간신히 견뎠다

 

일부 레이싱 드라이버는 승리 이외에는 안중에 없다. 레이스를 중단할 때까지 승리가 그의 인생을 좌우한다. 그런 다음 어떻게 될까? 드라이버는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나와 페르난도는 결코 그럴 리 없다. 내가 레이스를 중단하는 사태는 상상할 수 없다. 나는 ‘경쟁’, ‘목표’가 필요하다. 내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줄 환경이 필요한 것이다. F1 서킷에서 내 성적이 바닥까지 떨어지자 철인 3종 경기에 대한 관심이 불타올랐다. 나는 나갈 수 있는 한 어떤 경기라도 참가할 작정이다.”

 


그 종목이 무엇이 될지는 두고 봐야겠다. 버튼은 최근 르망 시리즈 출전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2020년 하이퍼 카테고리 출전제의를 받은 이야기를 할 때는 활력이 넘쳤다. 인터뷰할 때도 계속해서 그 육중한 슈퍼 GT가 준 다양한 교훈을 자세히 설명했다. 게다가 미국의 프로토타입 레이스도 면밀하게 소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을 미뤄 버튼은 새로운 카테고리를 연구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그렇게 되면 LA에 가정을 꾸린 그로서는 장거리 여행을 할 필요가 없다). 아울러 미국의 실용차 경기 NASCAR와 랠리크로스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들려줬다. 

 

   
호주 그랑프리 사고로 BAR 팀 동료 빌뇌브와의 틈이 벌어졌다

 

레이스를 사랑하는 버튼의 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앞으로 내게 F1 출전의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레이싱 드라이버의 자리를 지킬 것이다. 심지어 자녀가 생기더라도 레이스에 나갈 것이다. 다만 집에서 가까이 열리는 경기에 나가야할 것 같다.” 버튼의 말이다. 버튼의 지평에 유일한 먹구름은 전기 파워트레인의 등장이다. 버튼은 “오해하지 마라. 나도 포뮬러 E를 사랑한다. 나름대로 존재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랠리크로스의 추격전에서 배기관의 통쾌한 굉음과 불길이 사라진다면 어떨까? 모두가 실망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어쨌든 버튼은 성공가도에서 특혜를 받지 않았다. 수많은 드라이버들이 돈을 흥청망청 쓰면서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는 언제나 제 자리를 지켰다. 사실 그는 충성심, 정열과 비범한 재능을 갖춘 아주 평범한 인물이다. 레이스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오랫동안 레이스를 떠나지 않겠다는 그의 다짐을 환영해야 마땅하다. 

 

 

<버튼이 추억하는 인물들> 

 

루이스 해밀턴(Lewis Hamilton)
“2010시즌 중간, 맥라렌 팀에 합류했다. 포인트에서는 내가 루이스를 앞섰다. 팀 동료에 패하는 것이 좋았을까? 물론 그럴 리 없다. 개인적으로 그와 사이가 좋았지만 그는 조금 약이 오른 게 분명했다. 솔직히 나는 그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미하엘 슈마허(Michael Schumacher) 
“강인한 드라이버였다. 하지만 내게는 항상 공정했다. 경기 중에 결코 허점을 보이지 않았고 나를 한계까지 몰아붙였으나 결코 그 한계를 넘지 않았다. 분명히 호불호가 갈리는 성격이었다. 자크 빌뇌브와 데이먼 힐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경쟁할 때는 언제나 재미있었다. 특히 그를 백미러에 담았을 때가 그랬다.”

 

자크 빌뇌브(Jacques Villeneuve)
“호주에서 열린 2003시즌 개막전에서였다. 그는 30랩에, 나는 31랩에 피트인하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자크는 경기 제1 스틴트에서 연료를 조금 절약한 뒤 제때 피트인하지 않았다. 팀 요원들이 불러들이는데도 그대로 버텼다. 게다가 고의로 31랩에 나를 앞질러 피트에 들어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라 피트에 들어갔다. 왜 그랬을까? 일종의 작전이었고, 나를 꺾겠다는 계산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비신사적 행위였다. 그와 같이 뛰어난 드라이버가 했다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한 번의 반칙으로 빌뇌브는 팀에서 눈 밖에 났다.”
- 젠슨 버턴의 자서전 <인생의 한계까지(Life to the Limit)>에서 발췌.

 


<버튼의 로드카 컬렉션>

 

   
버튼은 베이론을 잠시 갖고 있었다

 

젠슨 버튼은 로드카 마니아다. 어린 시절 그의 방에는 3장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파멜라 앤더슨, 바트 심슨 그리고 페라리 F40이었다. 돈을 벌기 시작하자 그는 패스트 카를 사기 시작했다. “윌리엄즈에 들어간 해 페라리 딜러에 가서 F355를 샀다. 하지만 보험에 가입하기에는 너무 어려 운전대를 잡을 수 없었다. 세밀즈맨이 운전석에, 내가 조수석에 앉았다. 그 차는 절대로 팔 생각이 없었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F355 바로 옆에 값이 별로 높지 않은 F40이 있었다. 투자가치를 계산한다면 그쪽이 더 좋았다.” 

 


이후 레이싱 드라이버의 구미를 당긴 로드카를 꾸준히 모았다. 부가티 베이론부터 페라리 엔초, 한정판 포르쉐가 줄을 이었다. “솔직히 그중 일부는 투자용으로 샀을 뿐 절대로 몰고 다니지 않는다. 차를 만든 아이디어에 끌려 구입한 차가 대다수다. 다양한 경험을 한 드라이버에게 운전재미가 큰 경우는 드물다.”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에서 그는 1968 혼다 F1 머신을 몰았다

 

베이론은 겨우 두어달을 버텼다. “켄싱턴에서 정지신호를 받고 섰다가 1단에 들어가자 기어박스가 덜컥했다. 얼른 밖으로 나와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게 차를 갓길로 밀고 나갔다. 교통경찰마저 자기 일이 아니라며 도와주지 않았다. 이 차는 새 타이어 하나를 갈 때마다 5000파운드(약 735만 원)가 들어갔다. 그걸 알면서 즐길 수는 없었다.”

 


미국 LA로 이사한 뒤 그는 경매장에 나가 카 마니아답게 머리를 굴렸다. 돌아올 때는 한 대가 아니라 3대를 몰고 왔다. 트랜스암(a Trans-Am) 경주차, 500마력 LS7 콜벳 엔진의 쉐보레 벨에어와 쉐보레 픽업트럭이다. “지금까지 별로 몰아보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수많은 차를 사랑한다. 그중 일부는 비싸고, 싼 차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들을 사랑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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