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비틀, 마지막 시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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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비틀, 마지막 시승기
  • 오토카 편집부
  • 승인 2018.09.17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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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바겐의 유서 깊은 아이콘인 비틀이 단종될 것으로 보인다. 맷 프라이어(Matt Prior)가 현재 나와 있는 모델을 운전하며 비틀의 영향력을 되돌아봤다

히피. 허비. 러브 버그, 대시보드의 꽃병, 평화, 버그 잼스 축제, 런 투 더 선 행사 등 폭스바겐 비틀과 관련된 것은 정말 많다. 지구에서 가장 소중하고 인기가 많은 폭스바겐 비틀은 65년 동안 2100만 대가 생산됐다. 이미 1998년에 뉴 비틀이 세상에 나왔지만 오리지널 비틀은 2003년에 단종되기 전까지 꽤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에 탄생한 차가 어떻게 사랑과 낙천주의, 희망을 대변할 수 있었을까? 나는 잔혹했던 비틀의 역사가 전혀 과장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대중을 위한 차를 만들고 싶어 했고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는 ‘Kdf-바겐’(독일어로 기쁨을 바탕으로 만든 힘의 차를 의미한다)을 만들었다. 이는 1939년 2월에 열린 베를린모터쇼에서 처음 공개됐다.   

 

1938년에 Kdf-바겐이 출시됐다

 

그 다음에는 전문 기자단이 오늘날 폭스바겐의 고장인 볼프스부르크에서 베를린까지 달리며 시승을 진행했다. 가끔 기자들이 시승을 마치고 차가 만족스럽지 않다며 불평을 늘어놓는 경우가 있었지만 Kdf-바겐을 시승한 거의 모든 기자는 독일 친위대(SS) 소속 관리였다. 기자 중에는 <오토카>의 EJ 프랫(EJ Pratt) 기자도 있었다. 그는 합리적인 가격을 마음에 들어 했지만 뒤에 달린 엔진이 겨울에 효과적으로 차 실내를 따뜻하게 만들지 못하는 점을 발견했다.

 

1930년대 후반 대부분 사람처럼 그 또한 당시 정치적 상황을 모른 척 했다. 그래도 그는 강력한 브레이크에 관해 “강제로 멈추기 전까지 절대 멈추는 법이 없는 독일 방식에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쓰며 독일을 비꼬았다. 당시 Kdf-바겐의 가격은 990마르크로 독일 사람은 매주 5마르크를 저축해야 하는 제도를 이용해야 차 한 대를 살 수 있었다. 공랭식 엔진을 달았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수리가 쉽고 공기는 끓거나 얼지 않기 때문이었다.

 

도로 위에서 비틀은 여전히 오리지널 비틀의 느긋한 성격을 드러낸다

 

그 후 Kdf-바겐 이야기는 누구나 알다시피 어두웠던 역사를 반영한다. 1939년 9월 아돌프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공장의 독일 노동자는 이탈리아 파시스트가 2400명의 대체 인력을 보내면서 대서양 방벽 건설에 투입됐다. 공장에서는 ‘융커스-88’(Junkers-88) 폭격기 날개를 만들기 시작했고 1940년에는 폴란드 여자들이 항공기 낙하연료 탱크 생산을 위해 강제 이주를 당했으며 Kdf-바겐의 군용차인 지붕이 없는 폭스바겐 82 쿠벨바겐(Kubelwagen)을 만들기 시작했다.

 

1944년까지 유대인은 Fi-103 폭탄 생산을 위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끌려왔고 한 달 뒤 그들은 티어세렛(Tiercelet) 수용소에 갇혔다. 1945년 초 연합군이 진격하자 독일 친위대는 수용소를 정리하고 수감자들을 베르겐-벨젠(Bergen-Belsen) 수용소로 보냈다. 그해 3월, 미군은 Kdf-바겐 도시를 점령하고 강제 노동자를 해방한 다음 그곳을 연합군 군용차 정비소로 활용했다. 

 

레트로 휠은 승차감은 좋게 만든다; 실내는 오리지널 비틀의 모습이 보인다; 뒷모습은 독특함을 자랑한다

 

나머지 이야기는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대로다. 1945년 6월 5일에 폭스바겐 공장은 영국 전기 기계 기술부대 소속 이반 허스트(Ivan Hirst) 소령한테 이양됐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33만6000명의 독일 사람이 Kdf 저축 제도에 가입했지만 단 한 명도 차를 인도받지 못했다. 앞선 6년 동안 군용 쿠벨바겐은 수천 대가 생산됐지만 일반 승용차는 12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영국군 정부는 점령 기간 동안 수송 업무를 위해 폭스바겐에 승용차 2만 대를 생산할 것을 지시했다. 

 

이반 허스트 소령은 생산을 재개했고 나중에 폭스바겐의 디자인과 장비는 영국 자동차회사에 판매했다. 폭스바겐이 비틀 판매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까닭에 영국군 관계자 역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다. 1949년에 폭스바겐 소유권을 돌려받은 독일 정부는 1950년까지 10만 대의 비틀(공식적으로 타입 1로 알려졌다)을 생산했고 1955년 생산 설비에서 100만 번째 비틀이 나왔다. 

 

폭스바겐 비틀은 해변 오두막집 한 채보다 저렴하다

 

고치기 쉽고 공급이 충분하며 연비가 좋고 귀엽게 생긴 비틀은 ‘레몬’과 ‘작게 생각하라’는 훌륭한 광고 덕분에 1971년까지 매년 100만 대가 생산됐다. 또한 차가 너무 사랑스러운 나머지 영화 <러브 버그>는 박스 오피스에서 3900만 파운드(약 573억3000만 원)의 수익을 거뒀다. 작고 값싸며 믿을만한 차를 타고 캘리포니아 주변에서 빈둥거리고 싶다면 비틀이 제격이었다. 초창기 불행한 운명이 완전히 잊힐 만큼 반전을 이뤘다.     

 

 
1998년에 ‘뉴 비틀’로 대체됐을 때 대시보드에 꽃병이 있었다. 지금 돌아다니는 3세대는 2011년에 나왔으며 이렇게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공식 이름은 폭스바겐 비틀이다. 이제 3세대 비틀마저 단종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아직 후속 모델 계획이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영국에서는 여전히 새 차를 구할 수 있다. 폭스바겐은 생산을 내년까지 이어가지만 예정된 생산량을 넘어서면 새로운 주문을 받지 않는다. 

 

오리지널 비틀은 2003년 6월 30일까지 2152만9464대가 생산됐다. 마지막으로 생산된 ‘울티마 에디션’(Ultima Edicion)은 1.6L 엔진을 달아 51마력을 내며 휠 테두리가 흰색이다. 볼프스부르크 아우토슈타트에 전시돼 있다.

 

비틀의 마지막 시승으로 어디가 좋을까? 느낌은 어떨까? 첫 번째 질문에 관한 답은 영국 남쪽 해변이다. 햇살이 내리쬐고 평화로우며 바람도 시원해졌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캘리포니아 남부 같다. 두 번째 질문에 답을 하자면 오래된 골프와 비슷한 느낌이지만 공간이 조금 더 좁을 뿐이다. 그래도 나는 좋다. 1.2L 터보 엔진은 쉽게 힘을 전달하며 변속은 부드럽고 승차감은 사이드월이 큰 레트로 휠 덕분에 점잖다. 그러나 분명히 비틀과 비슷하지만 오리지널 타입 1이나 뉴 비틀처럼 마음을 움직이는 감성이 부족하다.

 

실내를 살펴보면 오리지널 비틀을 떠오르게 하는 위쪽이 평평한 대시보드와 아주 작은 글로브박스는 귀여우면서도 기능에 충실하다. 오리지널을 완전히 모방하지 않았고 칭찬 받을 만하지만 신형 피아트 500만큼 귀엽지도 않고 미니처럼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지 못했다. 유행에 뒤떨어진 것이다. 비틀은 이렇게 끝날 것이다. 80년 넘게 한 가지 형태를 고수하며 무당벌레를 상징했던 폭스바겐 비틀은 내년까지만 생산될 것이다. 이 사실은 생각보다 많은 관심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이 광고는 비틀만큼이나 유명하다

 

지금 후속 모델에 관한 계획은 없다. 하지만 비틀은 4도어로 폭스바겐이 곧 출시하는 순수전기차 ID 라인업에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비틀 모양을 유지하면서 전기모터가 뒷바퀴를 굴릴 것이다. 이는 오리지널 비틀과 달리 처음부터 긍정적인 운명을 타고날 것이다. 

 

<비틀에서 영감을 받다>

 

타입 2(Type 2)
폭스바겐 딜러인 벤 폰(Ben Pon)은 볼프스부르크에 갔다가 타입 1을 바탕으로 한 부품 수송차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의 스케치는 폭스바겐 엔지니어가 마이크로버스(타입 2)를 만드는데 도움이 됐다.

 

카르만 기아(karmann Ghia)
1955~1974년 사이에 카르만 기아의 쿠페와 카브리올레가 거의 50만 대 생산됐다. 특별히 빠르지는 않았지만 4인승 스포츠카는 차체가 낮고 예뻤다.

 

허비(Herbie)
평범하지 않은 패션에서 허비는 <분노의 질주> 시리즈에 나오는 차와의 경쟁에서 이겼다.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할 줄 아는 사람한테는 허비가 분명히 감각적인 비틀로 보일 것이다.

 

메이어스 맨스(Meyers Manx)
쉽게 분리되는 바닥과 그에 따른 기계 구성은 비틀을 개조하기 쉽게 만들었다. 엔지니어로 활동하는 브루스 메이어(Bruce Meyers)의 맨스는 비틀을 바탕으로 만든 첫 번째 버기카다. 

 

타미야 샌드 스코쳐 (Tamiya Sand Scorcher)
비틀은 바하 사막에서 열리는 레이스에 참가해 우수함을 증명했다. 당시 비틀은 레이스 참가번호가 5로 시작했다. 타미야의 RC카로 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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