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하가 만난 사람] KC모터스 최지선 대표
상태바
[황순하가 만난 사람] KC모터스 최지선 대표
  • 황순하
  • 승인 2018.03.26 10: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디자이너, 엔지니어, 연구소장, 그리고 대표이사까지. 화려한 이력 한 켠에는 고된 도전과 치열한 응전의 과정이 녹아 있다. 꿈을 좇아 쉬지 않고 달려온 케이씨모터스 최지선 대표를 만나 그녀의 자동차인생에 대해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고, 1980년대 중반부터 당시 독자모델 개발에 몰두하던 현대차와 쌍용차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약했다. 한국의 카로체리아(독특한 디자인의 소량 수제차를 만드는 자동차공방)를 목표로 1995년 프로토디자인을 설립한 이후, 척박한 환경 속에서 스포츠카 개발에 나서는 등 엄청난 도전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2015년 노블클라쎄(NobleKlasse)라는 독자 브랜드를 출범시켰다.
 

케이씨모터스(KC Motors) 최지선 대표.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존 모델의 부분 튜닝이 아니라 자동차 디자인, 설계, 인증 및 생산과 판매까지 아우르는 완성차 개념의 카로체리아(Carrozzeria)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등장했다. 자동차마니아에게는 스피라를 개발한 인물이라면 바로 이해가 될 터이고, 일반인에게는 기아 카니발 지붕을 올린 개조차, 즉 하이리무진 제작사 케이씨모터스 경영자로 소개하는 게 빠르겠다. 카니발 하이리무진은 기아차 브랜드로 판매되지만, 노블클라쎄는 좀더 고급스러운 모델을 원하는 소비자를 위해 카니발 하이리무진 내부를 개조한 뒤 각종 테스트를 거쳐 별도의 자동차로 등록해 자체 브랜드로 판매와 정비까지 책임지고 있다.
 

큰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자동차의 획일적인 성격과 분위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니치마켓은 늘 존재한다. 니치마켓을 위한 모델들이 많아지고, 다양한 소비자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각종 서비스가 발달해야 자동차문화가 그만큼 풍성해진다. 케이씨모터스 최지선 대표가 자동차문화 다양화의 최전선에 서있다. 최 대표가 언제부터 자동차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1980년대 중반이라면 자동차만이 아니라 전자, 철강, 기계 등 우리나라 기간산업들이 기술 제휴선이었던 일본에서 벗어나 독자기술과 시장을 갖기 위해 용틀임 하던 때. 국내 고급인력에 대한 수요도 엄청났을 텐데, 어떤 계기로 자동차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갖게 된 걸까? 
 

“사실 학창시절에 자동차에 관심을 가졌던 건 아닙니다.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고 취업할 당시 취업문은 넓었지만, 디자인 가치를 알아주고 디자이너로서 뜻을 펼치기에 자동차 분야가 좋다고 교수님들이 추천해 주었습니다. 또 자동차가 가장 완성도 높은 디자인을 요구하는 종합예술이라 산업디자이너들에게 원래 자동차 디자인은 커다란 도전이자 꿈이기도 하고요. 제가 이과적 기질이 있는지, 자동차 엔지니어링을 공부하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울산까지 내려갔던 거죠. 재미있었고 많이 배웠어요” 이런 질문을 하면 보통 감동적이거나 재미있는 답이 나오기 마련인데, 다소 모범생 같은 반응이 나와 좀 맥빠진 느낌이다. 하긴 최 대표가 모범생 스타일이긴 하다. 

 

최 대표가 카로체리아를 꿈꾸고 있던 시절, 우연찮게 영국에서 개발해 생산하고 있던 카로체리아 차종들이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쌍용차가 영국의 팬더(Panther)를 인수한 뒤 이 업체가 개발한 칼리스타를 1992년에 생산했고, 기아차 또한 영국 로터스로부터 엘란을 사들여 1996년에 출시했다. 하지만 대량생산한 평균적인 스타일의 자동차에 익숙했던 당시 소비자들 눈에는 이런 작고 비싸고 품질편차도 심하며 디자인도 이상해 보였을 것이고, 결국 몇 년 뒤 시장에서 쓸쓸하게 사라졌다. 이런 모델들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2차대전 이후 호황을 누리던 유럽 카로체리아들이 수요 감소로 1990년대 경영난에 빠졌다.
 

당시 독자모델과 기술에 목말라 하던 국내 자동차업체들이 이들의 인수에 관심을 가졌던 결과다. 결국 기술발전은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축적되는 것이지 선진국에서 모델이나 도면을 사온다고 해서 좋아지는 건 아니다. 이런 상황들을 다 지켜보았을 최 대표가 왜 카로체리아 사업에 뛰어들었던 걸까? “잘 모르고 시작한 거죠(웃음). 젊었고, 알면 보이는데 잘 모르니 꿈만 가지고 멋진 걸 해내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1988년 쌍용차가 팬더를 인수했고, 얼마 뒤 쌍용차 디자이너로 출장을 갔습니다. 팬더가 개발한 2인승 스포츠카 솔로 2를 보고 푹 빠졌어요.

쌍용차 디자인실에서 만난 남편과 의기투합, 멋진 차를 만들자고 각오를 다졌죠. 그때는 디자인 완성도가 높은 자동차를 시제품으로 개발하면 그게 다인 줄 알았던 거죠. 생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과 엄청난 인력이 필요한 완전히 다른 세상의 이야기인데, 그 생각을 못했던 겁니다. 시야가 좁았던 건데, 사실 스피라를 개발하면서 생산조건이나 원가 등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디자인 완성도가 더 올라가긴 했어요(웃음).”
 

노블클라쎄 토대가 된 카니발 하이리무진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2006년에 시작, 그저 특장차로 생각했던 하이리무진이 2011년부터 연간판매 1000대를 넘어섰다. 더욱이 2014년 뉴 카니발이 나온 이후 갑자기 5000대를 뛰어넘는 호황 아닌 호황이다. 이렇게 잘 팔릴 것이라 예상을 했을까? “잘 될 줄 몰랐죠. 프로토자동차에서 디자인 의뢰를 받으며 버텼지만 회사운영을 위해 2006년에 케이씨모터스를 세웠습니다. 특장차사업을 새로 시작한 거죠. 당시 중국은, 그들의 독자모델을 고민했지만, 유럽업체는 비용이 비싸 국내업체에 디자인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도 간간이 들어오는 디자인 작업이나 쇼카 제작만으로는 경영이 어려웠어요. 카니발 하이리무진 아이디어는 기아차 특장차팀에서 일본시장을 벤치마킹하면서 나온 겁니다. 우리가 초기 카니발로 하이루프 디자인 쇼카를 만들었고, 덕분에 그 일을 맡게 되었죠. 초기에는 월 20~30대밖에 나가지 않았지만 소비자들이 하이루프의 편리함을 느끼면서 입소문과 함께 수요가 늘기 시작했죠. 뉴 카니발 자체의 디자인도 좋지만, 루프 디자인도 우리가 신경을 쓴 덕에 본체와 자연스레 녹아 들었습니다.
 

때문에 소비자들이 하이리무진을 개조한 차가 아닌, 카니발 라인업의 가장 상위트림으로 인식하게 됨으로써 수요가 는 게 아닐까요? 법인수요가 가장 많고 일반가정의 세컨드카로도 인기가 좋습니다. 용인에 이어 덕평에 제2공장을 세워 월 500대의 생산능력을 갖추게 됐습니다. 플라스틱 루프를 쓰는 경쟁모델들과 달리, 우리가 처음부터 강철지붕을 쓴 것도 색상이나 안전, 디자인 완성도 면에서 주효했다고 봅니다. 스피라 경험을 통해 소량생산의 강점과 제약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를 하이리무진 설계에 반영한 것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직원들의 팀워크도 큰 힘입니다.” 

 

독자 브랜드 노블클라쎄에 대한 시장 반응이 궁금하다. 케이씨모터스에서는 소비자들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일반 카니발 하이리무진과 에쿠스 리무진(EQ900L)을 노블클라쎄 사양으로 튜닝해 주는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기아차가 판매를 대행해주는 일반 카니발 하이리무진과는 달리, 고유 브랜드를 달고 소비자들을 직접 상대하는 비즈니스라 많은 것이 조심스럽습니다. 고가의 시장이기 때문에 폭발적인 반응은 아니지만 인지도가 조금씩 올라가고 있습니다.
 

저렴한 옵션도 내놓았고 차종도 현대차 쏠라티와 에쿠스로 확대했고요. 멀리 보고 시작한 사업이기에 초기 투자기간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일반 정비업체에서 하는 부분개조와는 달리 정식 자동차제작사로 등록한 독자 브랜드입니다. 우리가 100퍼센트 책임을 집니다. 생산과 판매, 정비까지, 차별화된 디자인과 서비스로 다가가니 고객들 믿음이 커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내가 멋진 디자인으로 잘 만들었으니, 많이 팔릴 것이라는 공급자 중심의 사고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기아 스팅어 같은 모델의 마력을 올리는 퍼포먼스 튜닝과 함께 강한 디자인을 넣어서 별도 인증을 받아 노블클라쎄 브랜드로 판매할 수 있지 않을까?(독일의 루프(RUF)는 포르쉐 모델 파워를 더 올려 자기 브랜드로 판매한다) 노블클라쎄가 지금처럼 기존 차량의 개조에 그치지 않고 독자적인 모델을 만들어 시장에서 확실하게 존재감을 가져야 진정한 의미의 카로체리아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수요가 있을까요? 기존의 평범한 틀을 벗어나 거칠고 개성있는 라이프스타일을 표현하기 보다는 안정되고 고급화된 제도권에 머물며 즐기는 분위기가 대세인 것 같아서요.
 

선진국에서 카로체리아들이 거의 사라진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죠. 우선 완성차 업체들이 제품 라인업 확장을 하면서 자체적으로 엄청난 고성능 제품들을 디자인 좋게 만들어내면서도 뛰어난 IT기술을 넣어 승차감이나 핸들링, 사운드 등을 확실하게 잡아놓고 있으니 소규모 카로체리아들이 시장에서 밀려나는 거죠. 사람들이 고성능은 좋아해도 불편한 건 못 참는 거죠. 그래도 말씀하신 것처럼 럭셔리 하이엔드 고객을 대상으로 노블클라쎄 아이덴티티와 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독자적인 제품들을 만들 생각입니다. 아직은 초기라 신중하게 브랜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이해해 주세요.”
 

창업자의 열정보다는 조심스러운 경영자의 신중함이 느껴졌다. 최 대표 본인은 꺼려하는 눈치였으나 스피라에 대해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대기업도 아니고 작은 개인기업이 개발, 우리나라 자동차역사에 벼락처럼 등장해 엄청난 관심을 불러모았고, 여러 번의 디자인 변경과 우여곡절을 거쳐 마침내 2010년 생산을 시작했지만 총 31대만 판매되고 2년 만에 사라진 고성능 스포츠카. 스피라는 젊은이들의 열정으로, 탄생은 아름다웠으나 결국 슬픈 종말을 맞았다. 
 

“1995년에 설립한 프로토디자인은 주로 기아차로부터 디자인 용역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현대차와 쌍용차 디자인도 하기 위해 1997년에 프로토자동차를 별도로 세웠어요. 그런데 1997년 기아차가 부도위기에 빠지면서 프로토디자인도 같이 어려워졌습니다. 프로토자동차로 합쳤고, 신규사업으로 검토했던 게 전기차와 스포츠카였죠. 당시 전기차는 전망이 불투명하다고 판단, 스포츠카를 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부터 해야 할 지 막막했죠.
 

그래서 선진국 카로체리아 업무방식을 조사하고 목표로 한 차종들의 기초 데이터와 사진을 모아 스케치를 하면서 공부해 나갔죠. 당시 일본 타미야 미니어처 제품이 상당히 정교했습니다. 그 작은 페라리, 람보기니 등을 분석하면서 콘셉트를 잡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방식이었지만 젊음이라는 무기가 있었기 때문일까요? 밤을 새우면서도 흥미진진했던 기억이 나네요.” 

 

“중요한 건 기존 모델과 디자인이 어우러져야 한다는 겁니다”. 노블클라쎄 디자인 철학을 설명하고 있는 최지선 대표

열정은 세월을 뛰어 넘는 모양이다. “소형 2인승 미드십 스포츠카로 콘셉트를 확정했어요. 카로체리아들은 자동차 프레임과 보디만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엔진을 비롯한 각종 부품들은 외부에서 조달합니다. 엔진은 현대차의 2.7L 델타엔진을 쓰기로 했죠. 2000년 8월 프로토타입 발표회를 열었어요. 미디어들의 관심이 엄청났죠.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었을 겁니다. 생산과 판매를 몰랐기 때문에, 그 순간 꿈을 이룬 줄 알았던 겁니다(웃음).
 

주문이 들어오면 시제품 만드는 방식으로 하나씩 만들어준다고 쉽게 생각했던 거죠. 판매를 위해서는 충돌안전이나 배기가스 인증을 위해 비싼 시제품을 종류별로 여러 대 만들어 망가뜨려야 했고, 효율을 높이기 위해 공장도 확장해야 했으며, 각종 양산용 공구들도 새로 필요했습니다. 판매와 정비네트워크도 구축해야 했고요, 개인기업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죠. 생산에 들어가지 못했고, 별 소문이 다 났죠. 스피라를 포기할 수 없어서 결국 투자자를 찾아 다녔습니다.
 

IT산업의 벤처 붐이 한창이던 시절이었고, 어울림정보통신 오너의 투자를 받게 됐습니다. 자금을 대는 대신, 스피라 법적 권리를 넘기고 기존 프로토자동차 임직원들이 들어와 신설법인의 연구조직을 맡으라는 조건이었죠.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스피라를 남의 집에 양자라도 들여 성공시켜야 한다는 마음이 더 강했기에 직원들을 설득하고 따르기로 했어요. 그래서 2007년 여름에 어울림모터스가 세워지고 제가 연구소장이 된 거죠” 복잡한 절차를 다 마치고 2010년 3월 드디어 스피라는 정식으로 판매를 개시했지만, 그사이 또 많은 부침을 겪는다. 최 대표는 2011년 봄 프로토자동차 기존 멤버들과 어울림모터스를 떠나고, 이후 스피라는 2012년 5월 생산이 중단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규모는 작아도 노블클라쎄라는 독자 브랜드로 자동차 개발과 생산, 판매의 세 축을 아우르는 기본적인 골격을 갖추었으니 최 대표의 꿈은 이루어진 것일까? 아니면 계속 진행중일까? “자동차를 만들고 판매하는 업무체계로 본다면 카로체리아 기본은 갖추었으니 조금 늦기는 했지만 꿈은 이루었다고 볼 수 있겠죠. 노블클라쎄를 기존 완성차의 고급 튜닝브랜드로 키워 나가고 싶어요. 고객이 원한다면 국내에 들어온 수입차를 개조할 수도 있죠. 자기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위한 고급 니치마켓은 존재하니까요. 해외 튜닝브랜드들이 국내시장에 진출하고 있지만 우리는 국내 소비자 취향을 파악하면서 시장에 안착했기 때문에 어떤 브랜드가 와도 자신 있습니다.” 
 

최지선 대표는 1985년부터 현대차의 엑셀, 쏘나타 그리고 쌍용차 무쏘 등 한국 자동차역사의 초기 독자모델 디자인에 참여한 국내 자동차 디자이너 1세대에 속한다. 여성 산업디자이너들의 롤모델이기도 하다. 현재는 성공한 경영자다. 혹시 다시 디자이너를 하고 싶지는 않을까? “훌륭한 디자이너 선배들이 많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1.2세대쯤 되죠(웃음). 제가 롤모델이 되고 있다는 말씀은 과찬입니다. 디자인을 계속 하다가 어울림모터스 연구소장이 되면서 조직관리를 하느라 디자인 실무를 놓게 되었죠. 이후 케이씨모터스를 책임지게 됐고, 생산·판매·인사관리 등을 경험하면서 시야가 많이 넓어졌습니다.

 

화려한 역사, 슬픈 뒤안길의 역사를 품고 있는 스피라

경영자가 되는데 특별한 자격이 있는 건 아니지만, 모든 부문을 아우를 수 있는 균형감각이 중요하더군요.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원래 많은 것들이 부족하고 제약된 조건에서 기본 스케치부터 시작해서 보고 만질 수 있는 실물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내 다른 부문들과 끊임없이 토론하며 최적의 해법을 찾아가야 하거든요. 이런 디자이너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반면, 이제 너무 아는 게 많아져서 디자이너는 못할 것 같아요 (웃음). 기존 틀을 깨는 훌륭한 디자인은 신진 디자이너들이 잘 해요. 겁 없이 창의적이고 순수한 선을 만들어내는 거죠. 저는 현실적인 제약들을 너무 많이 아니까 그걸 피해 가기 위해 관습적인 선만 그릴 겁니다.”
 

카로체리아 성공을 위해서는 멋진 디자인은 필수다. 그렇다면 멋은 어떻게 정의할까? 그리고 노블클라쎄 디자인 방향을 결정하는 최 대표의 디자인 철학이 궁금했다. “사실 디자인이라는 게 주관적이라 멋진 디자인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노블클라쎄 비즈니스모델은 기존 차량 개조입니다. 기본 디자인 방향은 우리가 디자인해서 개조한 부분들이 기존 차량의 디자인과 최대한 어우러지도록, 아니 더 멋져 보이도록 하는 겁니다. 기존 모델의 디자인에 맞추어 디자인 완성도를 최대한 높이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사업초기라 노블클라쎄만의 독특한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가져가기에는 시간과 경험이 더 필요하죠. 여러 자동차에 동일하게 적용해도 어색하지 않고, 앞으로 독자적인 제품에도 반영할 노블클라쎄만의 디자인 특성들을 만들어내는 게 숙제인데 인위적으로 서두르지는 않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노블클라쎄는 어떤 꿈을 그리고 있는지 질문을 던졌다. “자동차문화의 다양성을 이끄는 회사라는 비전을 직원들과 공유하면서 대량생산 자동차메이커가 채울 수 없는 고객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계속 찾아내 사업화해야죠. 따라서 전기차에도 관심이 있는데, 일반적인 승용차 형태가 아니라 개인 이동수단(Personal Mobility)의 다양성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아직 구체적으로 이야기 할 단계는 아니지만 단순히 ‘탈 것’ 제조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만든 차를 이용한 렌터카사업이나 VIP 픽업서비스도 생각하고 있고요. 결국 노블클라쎄는 자동차를 포함한 새로운 비즈니스를 위한 플랫폼이 되는 겁니다. 일본과 인도, 베트남 등에서 현지 파트너와 함께 차량 개조사업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디자인과 기술, 원가 등에서 충분히 경쟁력도 갖추고 있고요. 올해가 해외진출 원년이 되겠네요.” 세상엔 대단한 사람들이 정말 많다. 꿈을 좇아 쉬지 않고 노력하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는 건 어쩌면 행복한 일이다. 항상 새로운 도전을 찾는 최지선 대표에게 어떤 꿈이라도 여러 사람들과 같이 꾼다면 언젠가는 꼭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아니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