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하가 만난 사람] CCS 최수신 부총장
상태바
[황순하가 만난 사람] CCS 최수신 부총장
  • 황순하 편집위원
  • 승인 2018.01.12 14: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계 3대 디자인스쿨에 속하는 CCS(College for Creative Studies)의 최수신 부총장은 70년대 후반 새한자동차 디자이너로 첫발을 내디뎠다. 짧은 출장 중 서울에서 그를 만나 그간의 이야기와 디자인철학을 들었다

도전과 승리. 40년 가까운 세월을 강한 의지와 긍정의 힘으로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며, 세계 디자인업계 거목으로 우뚝 선 최수신 부총장을 볼 때마다, 머릿속에 떠올랐던 말이다. 

그는 1970년대 후반 새한자동차 디자이너로 사회생활을 시작, 로얄 살롱 및 로얄 XQ 등의 디자인 부분변경을 담당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독자모델 디자인을 그리고 싶은 욕망은 커져 갔다. 1986년 기아자동차로 건너가 세피아와 스포티지 디자인을 주도하면서도, 틈틈이 시간을 쪼개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산업디자인까지 공부해내는 열정의 소유자였다. 덕분에 회사 추천으로 영국 RCA(Royal College of Art)에 유학을 다녀올 수 있었고. 1995년 퍼시스 개발연구소장으로 부임해 사무용가구 디자인을 경험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이제는 편히 살아도 될 법도 하지만, 40대 중반 지금껏 번 돈 털털 털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디자인 대학원에 입학하는 만용까지 부린 것. 디자인 학구열에 관한 그의 정열을 누가 말릴 수 있었을까. 

졸업 후 혁신기술 벤처인 데카(DEKA)에 디자인 디렉터로 들어가 세그웨이(Segway), 아이봇(iBot)을 디자인했다. 2003년 실무 디자이너에서 디자인 교육세계로 방향을 틀어 신시내티대학의 산업디자인 교수가 된다. 2010년 디자인학부장에 오르면서 종신교수가 되어 교육자로서 입지까지 다졌다. 대외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세계 최대규모의 미국산업디자인협회 IDSA(Industrial Designers Society of America) 교육담당 부회장직에 오르기도 했다. 2014년에는 전미디자인교육상(2014 Educator of the Year)을 받아 세계적인 디자인 교육자임을 입증했다. 그리고 2014년 세계 3대 디자인스쿨에 속하는 디트로이트의 CCS(College for Creative Studies) 교과과정 총괄 부총장으로 선임되었다. 역시 아시아인 최초의 CCS 부총장. 그의 이력 열거만으로도 지면을 꽉 채울 수 있을 정도다. 작은거인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왜 이리도 숨가쁘게 자신을 다그쳤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새한자동차 입사 당시만 해도 디자이너라는 단어는 생소했습니다. 명함에 스타일리스트라고 쓰고다녔죠. 외국모델을 들여와 앞뒤 모습만 약간 바꿔 생산했으니 디자인이라고 할 것도 없었죠. 중학교 다닐 때부터 자동차를 좋아했지만, 자동차 디자이너를 꿈 꾼 건 아니었습니다. 학교에서 일반적인 산업디자인을 공부한 정도입니다. 첫 직장이 자동차회사였기에 자동차 디자인을 시작하게 됐죠.” 
 

재미난 스토리를 기대했는데, 어째 맥 빠지는 대답이다. 그래도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좀더’를 외치며 자기성장을 위해 과감한 변신을 추구했으니 고민과 좌절은 엄청났으리라. “그냥 과정 하나하나가 재미있었죠. 무슨 일이든 의미 있게, 다른 시각으로 할 수 없을지, 고민했습니다. 기아자동차를 떠난 것도 차에 싫증이 생겨서가 아니라, 자동차만큼 디자인이 중요한 분야가 사무용가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국의 앞선 디자인 공부도 해보고 싶었고요. 흠, 멋진 복근을 얻기 위해 힘든 단련의 시간을 거쳐야 하는 걸 시련이라고 하나요?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건 현실에 안주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현실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밑으로 추락하고 마는 것이거든요. 제가 어린애처럼 먼산 너머 무지개를 좇는 성격입니다만 그동안 직장은 여러 번 바뀌었어도 디자인에서 손을 놓은 적은 없었어요. 젊어서는 제품을 디자인했고, 교수가 되어서는 디자이너들을 디자인했지요. 지금은 부총장이니 디자인 교육을 디자인하고 있는 셈이지요.”  
 

흔히 영국 RCA(Royal College of Art), 캘리포니아 ACCD(Art Center College of Design)와 함께 세계 3대 명문 디자인학교로 거명되는 CCS는 어떤 역사적 특징과 교육방식으로 차별화되는 곳일까? 디트로이트에 있으니 미국 자동차의 디자인에 집중할까? 

“세 곳 다 훌륭한 학교죠. 다만 성격이 다른데, 한 곳은 콘셉트를 중시하고 다른 한 곳은 선행 디자인을 강조합니다. CCS는 콘셉트와 선행 디자인, 생산까지 포괄하는 상품개발의 전체 스펙트럼을 강조합니다. ‘제조업자들의 도시’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전통적으로 미국 제조업의 중심이 되어 온 디트로이트에 있다 보니 기본 토양이, 그리기보다는 만들기에 집중해 왔으니까요. 미국 빅3 자동차업체들의 디자인담당 부사장들이 학교 이사회 멤버로 활동하고 있는 것도 특이하죠. 빅3의 기부도 막대하고요. 전체 1500명 학생 중 자동차 관련 디자인은 120여명에 불과한데 자동차 디자인으로 유명해졌어요. 사실 GM의 선행 디자인 파트가 독립돼 만든 학교이니 그 영향도 있습니다. 그래서 빅3 디자인 파트에 CCS 졸업생이 상당히 많습니다. 한국학생들도 자동차쪽에 많은데 현재 30명 정도 됩니다. 실력도 좋고, 다들 열심히 합니다.” 
 

실무 디자이너 길을 계속 걸었어도 최고까지 올라갔을 게 확실하다. 어떤 이유에서 디자인 교육쪽으로 방향을 틀었을까? 

”한국에 있을 때도 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강의를 했으니 디자인 교육 자체가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데카에서 일 할 때, 오하이오주립대 은사 한 분이 신시내티대학 교수직에 응모해 보라고 권하더군요. 당시 디자이너 실무 26년째라 디자인 관련 노하우를 나누어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덜컥 교수가 된 거죠(웃음). 연봉이 반으로 줄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걸 해보고 싶었으니까요. 스스로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나중에, 박사학위도 없고 영어도 서툰 나를 왜 교수로 뽑았냐고 학장에게 물었습니다. 인터뷰했던 교수나 학생들 모두 제가 제일 좋다고 그랬답니다. 사실 일반 산업디자인과 자동차디자인을 다 아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제가 데카에서 디자인했던 아이봇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장애자용 휠체어라,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어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아요.”  
 

그렇다면 실무 디자이너와 교육자로서 직접 겪어본 세계는 어떻게 다를까? 최 부총장이 학생들을 가르치며 강조하는 디자인철학은 무엇일까? 좋은 디자인과 멋의 상관관계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두 시간짜리 강의주제입니다(웃음). 멋이라는 게 디자인을 평가할 때 쓰는 여러 기준 중 하나죠. 멋 자체의 의미가 그리 중요하지는 않고요. 현장에서 디자이너들은 보통 제품 디자인을 멋있게 하려고 애쓰는데, 사실 중요한 것은 그 디자인을 쓰는 사람과 주위가 멋져 보이도록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패션에서도 옷이 멋진 것보다 그 옷을 입은 사람이 멋져 보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죠. 그렇게 하려면 그 쓰는 사람을 이해해야 하고, 어떤 맥락에서 그 제품을 사용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즉 디자인기술보다 디자인철학이 중요한 거죠. 제가 디자인할 때는 몰랐는데, 디자인 교육을 하니까 보이더군요. 신시내티대학에서 10년 가르치면서 디자인에 대한 시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폭넓은 디자인 분야 중에서 자동차에 가장 많은 디자이너들이 있고 산업 규모가 거대한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자동차 디자인은 다른 분야 디자인과 비교해 어떤 점이 특별할까? 세월을 뛰어넘어 클래식으로 남는 자동차 디자인이 있는 반면, 좋은 헤리티지와 솜씨 좋은 디자이너들이 만들었어도 세월을 견디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시장에 나오자마자 혹평 받는 디자인도 적지 않다. 차이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자동차 디자인이라고 특별할 건 없습니다. 사람이 통상적으로 시장에서 살 수 있는 물건 중에 제일 비싸면서도 생활의 중요한 도구이자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물건이다 보니 다들 관심이 많은 거죠. 그래도 차이점을 보자면, 다른 산업 디자인은 문제를 발견해서 그것을 해결해가는 과정을 중시하는데, 자동차는 조형적 요소가 강하다는 거죠. 즉 3차원적인 조각의 느낌으로 예술적 요소가 많이 들어갑니다. 음악에서 클래식이라는 건 옛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살아 남은 것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인데, 디자인이 살아남았다는 건 클래식 음악처럼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의미입니다. 1950년대 말 포드가 회장 아들의 이름을 붙여가면서 당시 최고의 기술을 총 집약해서 개발했던 대형 고급승용차 에드셀(Edsel)은 막대한 판촉에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죠. 반면 폭스바겐 비틀은 2차대전 후 경제회복기 독일의 평균가정이 요구했던 고장 없으며, 편안하게 장거리 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저렴한 가격의 차라는 컨셉트에 딱 들어맞아 대성공을 거두었죠. 그 시대와 공감대가 형성된 겁니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내놓기 전에 사람들은 그런 물건이 필요하다는 걸 모르고 있었죠. 실제 아이패드를 보고서야 자기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던 물건임을 깨달았기에 열광적으로 반응한 겁니다. 혁신적인 기술도 별로 들어있지 않았는데 말이죠. 스티브 잡스가 사라진 뒤, 지금 애플은 현재 있는 욕구에만 대응하면서 돈은 벌어도 지루한 브랜드가 되어 가고 있어요. 마이크로 소프트처럼요. 장기적인 성장에는 치명적이죠.” 
 

현재 자동차업계는 내연기관 시대에서 IT기술의 발달과 함께 ACES (Autonomous, Connected, EV & Sharing)로 요약되는 대변혁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누구도 정답을 내놓지 못한 채 다들 짙은 안개 속에서 더듬듯이 한걸음씩 방향을 가늠하고 있을 뿐이다. 앞으로 디자이너들에게 어떤 도전과제가 부여될 것이고, 해결방법은 무엇일까?   

“현재 자동차 디자인 관련 명확한 트렌드는 안개 속입니다. 여기에 안전과 환경 규제가 강화되다 보니 각 브랜드 개성이 사라지는 중이죠. 또한 말씀하신 것처럼 자동차가 모빌리티로 바뀌어가는 과정이라 디자인이 엄청나게 달라지는데, 각 브랜드들이 다가올 큰 흐름을 발견하려 노력하면서 서로 헤매고 있는 중입니다. 100년 전 앞에서 끄는 말 없이도 혼자 움직인다고 해서 붙은 자동차라는 단어가 이제는 자기가 스스로 알아서 움직인다는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고 있는 겁니다. 디자이너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죠. ACES 시대에 차량공유가 큰 흐름이 되는 건, 결혼도 그렇고 집, 자동차 모두 그 소유에 따라 붙는 부담을 젊은 세대가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회현상의 변화부터 디자이너들이 알아야 하는데, 아무나 별 욕구없이 이동만을 위해 자동차를 탄다고 하니 누가 어떤 용도로 자동차를 타는지 알아야 시작할 수 있는 전통적인 디자인 작업이 명확한 목표가 없어져 너무 어려워집니다. 디자인에서 중요한 세 가지도 맥락(Context), 소비자(Consumer), 내용(Content)인데, 디자이너는 내용(Content)을 만드는 게 본업입니다. 그걸 제대로 할 수 있게 하려고 CCS는 맥락과 소비자를 보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런 안목을 키우려고 인문학이 전체 커리큘럼의 30%나 차지하죠. 음악에서는 작곡과 연주가 구분되지만, 자동차 디자이너는 두 가지를 다 해야 하는 겁니다. 참 어려운 숙제이죠. 이런 혼란스러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디자인업계에서 중시하는 개념은 역시 앞서 얘기한 공감대밖에 없습니다. 현재 및 다가올 사회와 사람들의 변화를 이해하고 포용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대변혁의 시대에 맞는 디자인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글쎄요. 이제는 디자인 시대라 한국의 디자인 교육이 질과 양에서 많이 성장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직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동질성에 대한 강한 집착, 튀는 개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획일적 문화, 톱다운 방식의 교육체제가 강하게 남아 있어 시대 요구에 잘 맞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인문학이라는 게 답을 찾기 위한 질문을 하도록 만드는 게 본질인데, 제가 한국에서 강의를 해 보면 아직도 질문이 없습니다. 미국으로 유학을 나온 한국 디자이너들도 처음에는 시키는 대로만 하려고 합니다. 여러 가능성을 놓고 질문을 하며 길을 찾아가는 훈련이 안 되어 있죠. 디자인 스킬은 훌륭한데 말이죠. 이는 디자인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해서 꽤 시간이 걸릴 거라고 봅니다.”

현대-기아차는 200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경쟁요소로 디자인을 내세워 성공을 거두었고, 이런 성장세와 함께 해외 유명 디자이너들을 영입하고 있다. 하지만 브랜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 고유의 역사적, 문화적 특성들을 디자인에 구현해야 한다. 독일차를 보면 독일 느낌이 나듯이 한국적인 특성들을 디자인에 담아야 하고, 그 디자인을 만족스러워하는 충성스런 고객층이 늘어나야 한다. 현대?기아차가 해외 디자이너들에 의지하면 좋은 디자인은 나올지 몰라도 한국적 특성을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최근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의 자동차를 보면 목표 ‘디자인이 구현된 정도를 의미하는 디자인 품질’은 세계적 수준입니다. 다만, 디자인을 통해 만들어가고자 하는 브랜드 정체성은 아직 ‘과정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정체성이 아직 모호하죠. 최근 기아차를 보면 독일 디자이너들이 만져서 그런지 독일 냄새가 납니다. 물론 나쁘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한국적 느낌이라는 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보다 많은 소비자들과 공감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해외 디자이너들을 영입해 글로벌 시각을 갖추는 건 괜찮다고 봅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하나,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의 디자인실 분위기가 글로벌화되어야 합니다. 영입한 해외 디자이너들은 언제든지 떠날 수 있으니까요.”
 

여전히 이스즈의 비크로스를 타고 다니는지 궁금했다. 컨셉트카처럼 희한하게 생겨서 1997년 출시될 당시 획기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했으나, 3년간 불과 2000대만 나온 뒤 단종된 비운의 자동차다. 최 부총장이 처음으로 웃었다. 

“그럼요, 잘 정비해서 살살 타고 다니고 있죠. 학생들에게 독창적인 컨셉트와 합리적인 결과물 사이의 큰 괴리를 보여 실패한 좋은 샘플이니까요(웃음).” 

 

황순하/ 본지 편집위원. 자동차 칼럼니스트.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미시건대 MBA 졸업. 
기아자동차, 대우자동차판매, GE코리아 근무. 
前 UL 한국담당 사장 및 글로벌 오토모티브 산업총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