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주년 특집① 피아트 500으로 달린 노스 코스트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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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주년 특집① 피아트 500으로 달린 노스 코스트 500
  • 리처드 웨버(Richard Webber)
  • 승인 2017.11.14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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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오바 500이 출시된 지 60년을 맞았다. 리처드 웨버(Richard Webber)는 현행 피아트 500을 낚아챘다. 그런 다음 안락한 도시를 떠나 스코틀랜드의 험난한 명승 노스 코스트 500 공략에 나섰다

"팍팍팍..." 피아트의 본고장 이탈리아 토리노에서는 코르크 마개 튀는 소리가 끝이 없었다. 피아트 500의 60회 생일을 맞아 이탈리아의 화이트 와인 프로세코가 하객의 목을 적시며 축하무드를 북돋았다. 1957년 7월 4일 토리노의 미라피올리 공장을 떠난 누오바 500은 첫 400만대의 선봉이었다. 그리고 10년전 500 배지를 되살린 뒤 다시 200만대가 더 나왔다. 

꼬마 피아트는 먼 길을 왔다. 우리가 시승한 스포티 가솔린 1.2 S도 마찬가지. 폴란드 티히에서 태어난 이 꼬마는 우리에게 이끌려 스코틀랜드 고원지대의 글렌 토리돈의 적막한 어스름으로 달려왔다. 도로를 따라 계산하면 토리노에서 2300km 거리. 그러나 그 적막감으로는 100만km나 되는 듯 아득했다. 심지어 고대 로마군대도 여기까지 쳐들어오지는 않았다. 벌써 밤 10시여서 사진기자 뤽 레이시는 간신히 사진 한 장을 건졌다. 30분 뒤 우리는 호숫가의 호텔에 들어갔다. 거기서 2000년 이전부터 오크통에 숨겨뒀던 위스키 한병으로 탄생을 기리는 축배를 들었다. 그렇다, 우리는 노스 코스트 500의 찰랑대는 호숫가에서 뜻깊은 날의 밤을 맞았다. 

 

아침 일찍 우리의 여행은 시작됐다. 나는 에딘버러에서 도로를 따라 달려왔다. 한편 레이시는 런던에서 비행기편으로 날아왔다. 우리는 인버네스 공항에서 만났다. 놀랍게도 500은 A9를 달리는 긴 여로에 잘 들어맞는 크루저였다. 시가지에서 똘똘한 기질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시원시원했고, 날렵했으며 다른 차가 넘보지 못할 곳에서도 주차할만큼 작았다. 그런데 노스 코스트 500의 잡다한 아스팔트 도로 800km 거리에서 물 떠난 물고기 신세가 되지 않을까? 겨우 최고출력 68마력에 최대토크10.3kgㆍm의 허약한 체질로 말이다. 무게 865kg은 가볍기만 하지만 0→시속 100km 가속은 12.9초. 아무튼 이 꼬마는 벅찬 도전을 앞두고 있었다. 

 

16.5km/L 거리 800km 구간에서 나온 평균연비. 메이커가 주장한 25.4km/L(종합연비)와는 거리가 멀다.

레이시의 촬영장비를 싣기 위해 뒷좌석 등받이를 내렸다. 1957년의 2인승 레이아웃에 경의를 표하는 의식이었다. 하지만 그밖에는 우리가 손쓸 여지가 없었다. 앞 엔진, 앞바퀴굴림과 앞 힌지 도어는 모두 오리지널과 어긋났다. 시승차는 출력이 5배, 무게는 2배였고, 30%나 더 길었다. 

 

우리 500의 인포테인먼트는 매끈했다

우리는 인버네스를 떠나 서쪽으로 글렌 오드 디스틸러리로 달려갔다. 1838년부터 보리, 효모와 물로 위스키를 빚어내는 고대의 마술을 부린 곳이었다. 매니저 앨리스테어 오어가 우리에게 거대한 나무통을 보여줬다. 맥주처럼 생긴 따뜻한 발효물이 소용돌이치고, 거대한 6개 구리정류기가 단일 몰트를 만들어냈다. 이 양조장은 지나가는 차들이 으레 들르는 명소였다. 그날 오후에는 일단의 포르쉐 오너가 방문할 예정이었다. 

 

위스키 양조장 글렌 오드 디스틸러리. 드라이버는 여행을 마친 뒤 맛을 봐야 했다

우리는 녹음이 울창한 글렌 캐런으로 달려갔다. 양쪽에 수목이 뒤덮인 도로는 1차선으로 좁혀졌다. 사실 곳곳이 그랬고, 점차 가파른 벼랑이 양쪽에 솟아올랐다. 노면은 거칠었다. 우리 500의 앞 스트럿과 뒤 토션빔 서스펜션이 수많은 노면상처, 범프와 등마루를 깔끔하게 타고 넘었다. 우리 차의 옵션 16인치 휠의 타이어 소음이 제법 거칠었다. 사진기자 레이시는 상당히 고급스런 옵션인 언커넥트 인포테인먼트의 비츠 사운드 시스템으로 맞섰다. 잇따라 헤비메탈을 걸어 외부 소음을 죽였다.

 

저속에서 조용하던 엔진은 회전대가 오르면서 점차 목청을 돋웠다. 하지만 결코 부담스럽지 않았고, 늘 매끈했다. 저회전대부터 힘차게 끌었으나 3200~5800rpm에서 절정에 달했다. 뼈와 피와 살과 장비 200kg의 무게를 실었으나 68마력은 평탄한 구간에서 실력을 발휘했다. 

가는 곳마다 전방불명 커브와 대피선이 수두룩했다. 덕분에 변속기를 혹사할 수밖에 없었다. 가벼운 중행정 동작은 믿음직하게 팽팽했고, 저출력차에 중요한 감속작용도 문제가 없었다. 내 왼쪽 무릎 위로 솟은 기어레버도 좁은 실내에 알맞았다. 

 

웨버에 따르면 1.2 500은 놀랍도록 듬직한 A급 도로의 크루저였다

우리는 록캐런 호숫가의 단정한 가게와 주택을 지나 해변벼랑을 타고 올라 아다로크로 달려갔다. 그 꼬부랑길은 세월에 찌든 1차선 도로와 EU(유럽연합) 지원의 상큼한 2차선 도로가 번갈아 나타났다. 여기서 피아트를 잠시 몰아붙일 기회가 있었고, 상당히 반응이 좋았다. 보디 롤링은 받아들일 한계 안에 머물렀고, 앞머리는 놀랍도록 그립이 뛰어났다. 부드럽게 탄력적인 승차감은 도로의 요철을 깔끔하게 소화했다. 반면 코너진입은 약간 게을렀다. 핸들감각이 자연스럽지 못했고, 사실상 피드백이 없었다.

 

장엄한 풍경: 벤치까지 걸어갈 필요없이 차를 몰고 갔다

뒤이어 일명 애플크로스 패스인 비알우크 누 바로 들어갔다. 거기서 우리는 거대한 캠핑카, 세단 렌트카, 이름난 콤비, 그리고 속을 끓이는 사이클리스트와 차례를 기다렸다. 모두가 유명한 꼬부랑 산길을 오르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500 엔진은 어디서보다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난장판에도 레이시는 카메라를 들이대기 위해 산길을 헤매 다녔다. 그러기에는 도시 태생 500의 작은 회전반경, 초경량 스티어링 모드와 언덕 미끄러짐 방지 기능이 도움이 됐다. 정상에 오르자 그 보상이 감격스러웠다. 멀리 바다까지 펼쳐진 웅혼한 장관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 앞에서 나는 <걸리버 여행기>의 소인 릴리풋이 된 느낌이었다. 

 

애플크로스 인의 잔잔한 물가에서 우리는 푸짐한 해산물 요리로 배를 채웠다. 그때 황금시간이 시작됐다. 관광객들이 모두 물러가고 아직 해가 넘어가지 않은 천상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애플크로스 반도는 우리 차지였다. 500을 한계까지 몰아붙일 놀이터이기도 했다. 500의 해안 질주는 곳곳에서 끊겼다. 우람한 숫사슴이 길가에서 망을 보고 있었고, 하일랜드 소떼가 길에서 어슬렁거렸다. 실로 딴세상의 신기한 광경이었다. 도로는 낮고 날카로운 봉우리, 그리고 풀이 무성한 작은 호수와 숨박꼭질했다. 나는 문득 104마력 트윈에어가 아쉬웠다. 싱그러운 청각적 즐거움에 못지않게 듬직한 펀치력이 그리웠다. 그럼에도 우리는 단단히 재미를 보고 있었다. 인적이 사라진 글렌 토리던을 지나 하룻밤을 묵을 로크마레로 치달았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그루녀드 베이에서 그 유명한 버터색 모래를 처음으로 봤다. 바다는 청록색으로 빛났다. 뒤이어 리틀 로크브룸의 광활한 풍경이 펼쳐졌다. 저 멀리 봉우리 위로 먹구름이 비를 뿌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로크브룸↔얼러풀을 연결하는 도로 A835는 곧잘 헤브리디스 군도의 페리 차량대열이 틀어막았다. 그러나 운좋게도 우리가 들어갔을 때는 즐겁고 조용했다. 시원스런 고속 커브가 직선구간을 이어줬다. 거기서 고속 시프트 다운으로 추월 모드에 들어갔다. 

 

애플크로스 패스는 차를 몰기에 즐거웠다

로크애신트에 이르러 아드브렉 캐슬과 칼다 하우스의 괴기한 폐허를 지났다. 이들은 둘다 몇 세기를 앞선 옛날에 집안싸움의 표적이었다. 이들 골짜기는 언제나 아름답지만 언제나 평화롭지만은 않았던 역사를 일깨워줬다. 우리는 킬레스쿠 브리지에서 차를 세웠다. 야생의 자연환경과 잘 어우러진 콘크리트 건축물의 아이콘이었다. 이 다리가 들어선 1984년 이전까지는 페리를 놓치면 180km를 돌아가야 했다. 

불쑥 튀어나온 섬에 이어 리버 디오나드를 따라 달렸다. 상하류의 기울기가 거의 없어 강물은 호수처럼 고여 있었다. 카일 오브 더니스의 질펀한 바닷가 모래밭을 에돌아 더니스 마을로 들어갔다. 강풍에 쓸린 북부해안에서 맞은 첫밤이었다. 우리는 무인 24시간 주유소를 만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처럼 궁벽한 고장에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탱크를 가득 채우는 게 상책이었다. 

 

더니스는 곳곳에 해변이 박혀있는 고즈넉한 안식처였고, 이름이 알려지기에는 너무 외딴 곳이었다. 존 레넌이 여러 사람과 몰려와 휴가를 즐겼고, 일찌감치 노스 코스트 500에 제물을 바쳤다. 1969년 이곳 어디에선가 오스틴 맥시를 들이받아 박살냈다. 이곳은 동서 냉전시대의 비밀 조기경보기지였으나 지금은 미술가들이 몰려드는 예술공동체였다. 

 

촬영장비가 앞좌석을 제외하고 모든 공간을 차지했다

텅빈 거리에 다시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로크 엘리볼. 이따금 영국해군 선박이 숨어드는 비밀 해군기지였다. 우리는 산위에 있는 호텔을 찾아가느라 6100rpm 레드라인을 치고 올랐다. 뒤쪽에 드럼이 달렸고, 급브레이크에 코박기가 잦았다. 그러나 듬직한 브레이크는 제 구실을 잘했다. 

 

셋째날. 최고의 도로와 풍경은 이미 등뒤로 사라졌다. 그러나 인버네스로 돌아가는 우리 여정에는 재미가 점점이 박혀있었다. 먼저 꼬마 피아트는 지난날 존 오그로츠 호텔 앞의 영국 땅끝에 서는 감동을 맛봤다. 1926년 몬테카를로 랠리의 지역 출발점이었다. 여기서 6기통 AC를 몰고 나온 빅터 브루스는 영국 최초 랠리 우승의 감동을 맛봤다. 

 

수사슴이 제 영토라고 버티고 있었다

위크에서 우리는 에버니저 플레이스에 묵었다. 공식적으로 세계 최단 도로구간이었고, 주소가 하나밖에 없었다. 심지어 꼬마 시티카 한 대를 끼어넣기도 어려워 노즈를 밖으로 내밀고 주차했다. 거리는 500의 차폭보다 겨우 17cm 길었다. 골스피 부근에서 우리는 웅장한 던로비 캐슬을 찾았다. 서더랜드 백작가문의 본거지였다. 방이 자그마치 189개였고, 전용 철도역을 갖췄고, 깔끔하게 손질된 광활한 정원은 도노크 퍼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실로 장관이었고, 이 적막하고 험준한 해안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첨탑이 솟아있는 성채 앞에서  해마다 8월이면 클래식카 랠리가 열렸다. RAC(영국자동차클럽) 초대 회장인 제4대 서더랜드 대공이 기뻐했을 행사였다. 

 

인버네스에서 80km 떨어진 던로빈 캐슬은 모두에게 공개됐다

주행거리계가 사진기자 레이시를 내려놓은 인버네스 공항에 도착하기 전에 800km를 넘었다. 내가 에딘버러에 돌아왔을 때 피아트는 3일간 1474km를 달렸다. 태어난 고장을 떠나서도 500은 뛰어난 실력을 보여줬다. 나는 제대로 내려가기보다는 기울어지는 좌석 조절장치와 사이즈를 키운 타이어 소음이 불만이었다. 보다 예리하고 자연스런 핸들이 꼬부랑길에서 운전재미를 더했을 터였다. 피아트 500은 실내공간이 넉넉했고, 수수한 파워가 운전재미를 안겨줬다. 게다가 여유있는 승차감이 텅빈 해질녘의 대질주를 잘 뒷받침했다. 

우리의 여정

노스 코스트 500은 영국 최북단을 한 바퀴 도는 길이다. 인버네스에서 사작하여 인버네스에서 끝난다. 2015년 공식 웹사이트 (northcoast500.com)가 7~10일간의 여정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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