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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하가 만난 사람] 현대디자인센터 스타일링 담당, 이상엽 상무
제네시스의 성공이 우리나라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를 가져올 역사적 사건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 이상엽 상무는 고급 브랜드와 대중 브랜드 차이를 깔끔하게 설명해 주었다
2017년 09월 29일 (금) 16:10:35 황순하 편집위원 c2@iautocar.co.kr
이충희 포토그래퍼 c2@iautocar.co.kr
   
 

‘결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목민 DNA.’


한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디자이너로서 이상엽 상무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정확한 표현은 없다. 자동차의 ‘자’에도 관심없던 미대 조소과 출신이었던 그. 갑자기 진로를 바꿔 미국의 디자인 명문 ACCD(Art Center College of Design)에 들어갔고, 이후 25년 간 8개국 15개 브랜드를 거쳐 이제 현대·기아차그룹에서 현대와 제네시스, 상용차 디자인 담당이 되어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수많은 성공 스토리와 함께 세계적인 자동차업체로 훌쩍 커버린 현대·기아차그룹의 미래 역시 얼마나 매력적인 디자인의 자동차를 시장에 내놓는가에 달려 있다. 디자인 담당으로서 그 부담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인터뷰 내내 이상엽 상무는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마치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달변이었고 또 열변이었다. G70 발표를 불과 사흘 앞둔 시점이었다. 


“그저 미술이 좋아서 미대에 갔죠. 자동차 디자인은 전혀 몰랐고 관심도 없었어요. 우연히 ACCD를 방문했고, 그곳 학생들이 클레이 모델을 만드는 걸 봤습니다. 제가 조소과 출신이라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이 모티브가 됐습니다. 디자인보다 더 중요한 자동차산업이나 각 브랜드 역사 및 특성, 심지어 어릴 적 자동차 관련 에피소드도 없이 시작하게 됐죠. 지금 돌이켜보면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지요. 반면에 지식이나 선입견이 없었으니 마치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자동차 관련 지식을 흡수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조금 당돌했고,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멘토를 찾고 그와 함께 도전하는 재미에 푹 빠졌습니다. 자동차 디자인에 처음 관심을 가졌던 순간이었죠.”  


자동차는 단순한 제조물이 아니라, 생산국의 독특한 느낌을 넣어야 하기에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지형 등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하지만 디자이너라는 직업상 여러 나라를 옮겨 다녀야 한다. 정착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어떻게 짧은 시간에 그 나라의 특성을 파악해서 디자인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상엽 상무가 디자인한 6세대 카마로(2009년 출시, 우리에게는 <트랜스포머>의 범블비로 더 익숙하다-편집자주)는 미국의 레트로 디자인 머슬카(retro-design muscle car)를 완벽하게 재해석했다는 격찬을 받았다. 


“저를 범블비 아빠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결코 저 혼자 한 게 아닙니다. 팀과 함께한 작품이죠. 제가 어떤 자동차 디자인을 담당하게 되든, 현지 동료들과 같이 호흡합니다. 또 해당국 사람들보다 그쪽 문화에 더 몰두해서 그 나라 방식으로 먹고 마시며 다녔죠. 해외에서 지낸 25년간 제가 한국적인 특성으로 지켜온 건 제 이름 하나였어요. 그리고 제가 맡은 브랜드에 대한 존중이 항상 먼저였고요. 그래야 동료들이 가까이 해 주니까요.”  


미국차를 이해하고 나자 다음에는 기능적이며 단순하게 표현하는 독일차 디자인에 관심이 커졌다. GM을 나와 2010년 폭스바겐으로 옮겨 바우하우스의 기능적 디자인부터 익히며 기초를 닦았다. 같은 그룹 안의 벤틀리 디자인 담당이었던 루크 동커볼케의 인도로 2013년 벤틀리 익스테리어 담당이 된다. 영국 왕실 차로 잘 알려진 세계최고 고급 브랜드 벤틀리가 한국 출신의 젊은 청년에게 디자인을 맡겼다는 뉴스가 당시 자동차업계에 센셰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수많은 한국 출신 자동차 디자이너들이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상무는 2016년에 벤틀리에서의 기회와 성공을 뒤로 하고, 현대차 디자인센터장으로 미리 와 있던 루크 동커볼케의 스카우트 제의를 과감히 받아들인다. 이 일로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스타 자동차 디자이너 탄생을 기대했던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기도 했다. 벤틀리는 제품의 라이프사이클이 대중 브랜드보다 더 길기에, 이상엽 상무의 업적이 명성으로 돌아오기에는 4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았기 때문이다. 벤틀리에서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을 텐데….


“벤틀리에 갔을 때, 마침 주요차종을 일제히 새로 디자인하는 풀 서클 프로젝트(Full Circle Project)가 시작되었어요. 그래서 운 좋게 컨티넨탈 GT, 플라잉스퍼, 뮬산, 벤테이가 등의 디자인을 이끌 수 있었습니다. 고급차 의미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였죠. 100년의 헤리티지를 갖고 있는 벤틀리 디자인 역사를 부품 하나하나까지 다 외워야 했고요. 소수고객의 취향에 맞추어 섬세하게 디자인하고 만들어야 하는 순수 감성의 가치도 알게 되었죠. 벤틀리에서 더 배울 게 많이 있었지만, 현대차에서 연락이 왔을 때(이 상무는 이를 여러 번 부르심이라고 표현했다) 마치 운명의 시간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현대차가 오랜 검토 끝에 시작하는 제네시스의 탄생에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가려면 지금 가야 한다는, 어떤 다급함이 강하게 느껴졌다고 할까요?”   


과거 토요타와 닛산이 고급차 시장 공략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토요타와 닛산의 엔지니어링 능력과 품질에 대해 시장 신뢰가 컸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 미국시장 진출 이래 현대차는 품질과 내구성 미비로 조롱의 대상이었다. 2000년대 들어 품질은 좋아졌지만, 여전히 가격 대비 성능만 좋은 브랜드 정도로 인식되어 온 게 사실이다.  2000년대 후반 YF 쏘나타로 대표되는 플루이딕 스컬프처 디자인 성공 이후 현대차 브랜드에 대한 평판이 많이 올라갔다. 그럼에도 제네시스의 성공을 뒷받침할 수 있을 만큼 시장의 신뢰는 견고할까? 이 상무의 답은 거침이 없었다. 

 

“세계시장에서 현대차 브랜드에 대한 시장신뢰는 확고합니다. 벤틀리에서 현대차로 옮기게 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지요. 제가 해외에서 일을 시작한 1990년대 중반,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어떤 차 디자인이 이상하면 꼭 ‘현대차 같다’라고 표현하더군요. 한국사람으로서 자존심이 상했죠. 그런데 2000년대 중반 이후 현대차 디자인의 위상이 급격히 올라갔어요. GM에서 디자인할 때 벤치마킹하는 모델이 전차종에 걸쳐 토요타에서 현대차로 다 바뀌더군요. 얘기를 들어 보니 토요타에서도 그때부터 현대차를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제가 그때 경쟁사에 있었기에 현대차가 두렵기도 했지만 참 자랑스러웠어요. 생각해 보면 지난 25년간 현대차는 항상 제 옆에 있었습니다.”


대중 브랜드와 고급 브랜드는 목표층도 다르다. 당연히 디자인 언어에도 차이가 난다. 한 사람이 양쪽 브랜드를 담당한다는 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물론 닛산과 인피니티처럼 소수 선례가 있지만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 현재 이질적인 여러 브랜드를 맡아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적인 분위기에 현대차 느낌까지 담아야 합니다. 더욱이 세 브랜드 모두 표현방식이 달라야 합니다. 일단 브랜드별로 디자인센터가 따로 있는데, 각 센터에 들어갈 때 제 머릿속에서 다른 센터 스위치를 끄고 그 센터의 스위치를 켭니다(웃음). 매번 하고 또 하니 지금은 익숙합니다.”  


현대차는 ‘품질경영’에 이어 2000년대 중반 이후 ‘디자인경영’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었다. 2011년부터 현대 브랜드의 슬로건을 ‘모던 프리미엄’으로 정하면서 감성 중심의 고급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국내와 해외시장에서 강력한 마케팅을 펼쳤다. 그러나 대중 브랜드의 확장은 한계가 있었고 해외 고급 브랜드의 M&A 소문도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2년 전 현대차 스타일대로 독자 고급 브랜드 제네시스를 론칭한다. 이에 현대차 브랜드는 사실상 그랜저를 제품 라인업 정점으로 하는 앞바퀴굴림 플랫폼 브랜드가 되어 조금 위축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기아차가 제네시스 플랫폼을 공유해 K9, 스팅어 등을 출시하면서 시장에서 현대보다 고급 이미지를 가져가기 시작했다. 이 상무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사실 모든 브랜드가 장단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단점만 파고들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장점을 살리고 진화할 때 좋은 브랜드가 됩니다. 제네시스 출시는 현대차에게 큰 도전입니다. 제가 즐겁고 또 흥분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현대차는 1990년대부터 그랜저와 쏘나타를 중심으로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유산을 쌓았습니다. 이제는 이 역사를 발전시켜 나가면 됩니다. 토요타 캠리나 혼다 어코드처럼 현대차의 중심은 쏘나타죠. 1990년대 중반 쏘나타는 성공한 중산층의 상징으로 엄청난 환희를 주었죠. 그런데 최근 들어 위상이 많이 약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쏘나타는 택시로 인식되기 시작했어요. 다시 강한 캐릭터 디자인으로 소비자에게 기쁨을 주어야 합니다. 강한 임팩트가 있어야 하거든요. 미니나 비틀을 보세요. 자기만의 강력한 시장이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카리스마를 갖추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 전까지 대중 브랜드가 자기 이름을 쉽게 알리기 위해 전차종에 걸쳐 패밀리룩을 가져가는 게 유행이었죠. 차종별로 시장 특성이 다른데 말이죠. 앞으로 현대차 브랜드는 차종별로 목표층에 집중한 디자인을 가져갈 겁니다. 민감한 부분이라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죠(웃음).”


왜 제네시스를 시작했을까? 30여 년 전 일본 자동차업체들이 연이어 고급차 시장에 진입하게 된 배경은 미국 레이건 정부의 압력에 의한 대미 수출물량 규제, 85년 9월 플라자합의에 의한 급격한 엔고(이 합의에 의해 달러화 환율은 1달러당 235엔에서 1년 뒤 120엔으로 급속 하락한다) 등의 역풍으로 물량 감소와 수익성 악화라는 곤경에 처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필사적으로 고급차 개발과 성공에 매달렸고(혼다는 어큐라를 내놓았고 마쓰다와 미쓰비시도 고급 브랜드 계획을 발표했었다) 제대로 시장에 안착한 건 렉서스 정도다. 그리고 기존의 고급차 브랜드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독특한 역사와 디자인 특성, 충성스런 고객층 등 견고한 마켓 인프라를 가지고 있고 이를 충실히 지켜 가면서 차종 다양화에 나서고 있다. 그러면서도 태어난 나라의 긍정적인 특성, 예를 들어 영국의 고풍스러움과 우아함, 독일의 논리적이고 치밀한 엔지니어링, 이탈리아의 열정과 화려함 등이 디자인 언어로 표현되어 차를 보기만 해도 어느 나라 차인지 자연스레 느껴지도록 한다. 그러면 제네시스는 한국적 특징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비단 자동차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짧은 산업화 시간 속에서 품질과 가격으로 승부하며 성장하다 보니, 아쉽게도 우리가 만드는 제품 중 한국적인 느낌으로 세계적인 명품이 된 건 많지 않다. 제네시스를 과연 한국적 느낌이 강한 세계적 명품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제네시스가 계기가 되어 세계 시장에서 한국적 특징을 제대로 살린 명품이 나올 수 있을까?  


“정확한 지적입니다. 대중 브랜드도 그렇지만 특히 고급 브랜드들은 다 뿌리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네시스 뿌리는 대한민국 서울입니다. 서울은 역동적이면서 재미있는 곳입니다. 도시적 모던함과 오랜 전통이 공존하고, 광장과 좁은 골목들이 붙어 있고, 맛집도 아주 저렴한 장소부터 세계 최고급 레스토랑까지 다 있고요. 이질적인 것들이 어울려 섞여 있는 묘한 곳이죠. 전 세계 이런 유사한 느낌을 주는 도시는 런던이 유일하죠. 영국에 전통과 느낌을 살린 명품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명품이라고 해서 다 비싼 것도 아니죠. 제가 느끼는 한국의 정체성은 캐릭터가 유난스럽다는 겁니다. 상반된 것들이 섞이며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요. 다도나 종묘에서 느껴지는 조용하고 서정적이며 여백의 미가 있다면 아주 다이나믹하고 화려한 K-팝과 아이돌 문화가 있습니다. 오랜 전통의 하드웨어 장인들이 있는데 최첨단 디지털 소프트웨어가 끊임없이 개발되고요. 마치 태극처럼 음과 양이 어우러져 돌아가는 느낌입니다. 이렇게 상반된 것들이 부딪치며 섞일 때 그 사이에 긴장(Tension)이 생기고, 디자인 스토리가 가능해지죠.” 

 

이 상무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고 의견은 거침이 없었다. 그러면 이러한 특성들이 현대차 브랜드에도 적용될 텐데,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지 묻자 이 상무의 손이 공중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현대차 브랜드에도 이런 특성들이 반영됩니다. 단 대중 브랜드와 고급 브랜드는 표현하는 방식에서 조건이 다릅니다. 자동차 디자이너는 레스토랑의 셰프와 같습니다. 고급 브랜드는 손님 하나하나의 식성과 취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먼저이고 그 다음에 고급 식재료를 잘 다듬고 조리해 재료 본연의 순수한 맛을 느끼게 해주는 거죠. 깔끔하고 아름다운 세팅도 필수고요. 제네시스는 뒷바퀴굴림 플랫폼에 값비싼 기술과 부품을 쓸 수 있으니 현대차 브랜드보다 기본 식재료가 좋죠. 현대차 브랜드도 비록 코스트 때문에 기본 식재료의 질이 좀 떨어진다 해도 셰프가 수완을 발휘해 양념을 더하거나 재료들을 잘 섞어서 맛난 음식을 만들어 내듯이 충분히 소비자 입맛을 맞출 수 있습니다. 제네시스가 원-테이블 고급 식당이라면 현대 브랜드는 맛집인 거죠” 


지금껏 고급 브랜드와 대중 브랜드 차이를 깔끔하게 설명해 준 사람은 이 상무가 처음이었다. 말은 이렇게 쉽게 해도 큰 조직 속에서 실제로 구현해 나가는 작업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어려움을 짊어진 이 상무에게 연민이 느껴지려 하는데 울림이 있는 멘트가 계속 이어졌다. 


”제네시스의 성공은 우리나라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올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명품사업은 지금부터입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닙니다. 한국적 철학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구체화작업이 계속 되어야 합니다. 사실 조금 힘들기는 하지만 한국적 느낌의 대표 브랜드로서 제네시스를 키워 가는 작업에 정말 아드레날린이 솟구칩니다.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을 융합해야 하니 50대임에도 20대 시절보다 더 열정적이 됩니다. 물론 어떤 브랜드 성공이 제품 하나 잘 나왔다고 되는 건 아니지만, 디자인으로 한국적 헤리티지를 만들어 간다는 게 정말 즐겁습니다. 벤틀리에 100년 역사의 디자인을 담은 두터운 책이 있어 반드시 참고해야 한다면, 제네시스도 그에 못지않게 두꺼운 백지의 책을 첫 페이지부터 써 나가는 거죠. 물론 실패도 할 겁니다. 하지만 그 실패를 극복하는 과정이 또 스토리가 되니까요.” 


사실 대중 브랜드가 고급차를 디자인할 때 경험이 없다 보니, 30년 전 렉서스가 메르세데스-벤츠를, 인피니티가 재규어를 벤치마킹했듯이 특정 브랜드의 디자인을 흔히 따라하곤 한다. 이상엽 상무나 디자인총괄 루크 동커볼케가 모두 벤틀리 출신이기에, 그렇다면 제네시스도 벤틀리 디자인을 많이 따라하지 않을까? 그런데 고급차 브랜드라 해도 다시 수제작 위주로 소량 생산해 내는 롤스로이스나 벤틀리 같은 럭셔리 브랜드와 컨베이어 벨트에 얹어 차종당 수만 대씩 만드는 메르세데스-벤츠 및 BMW 같은 프리리엄 브랜드로 다시 나뉘어진다. 제네시스는 프리미엄 브랜드를 지향할 텐데, 벤틀리를 벤치마킹한다면 그 과정이 매끄럽지 않을 게 분명하다. 


“말씀하신 구분이 맞습니다만 이제 럭셔리는 비싼 그림이 두 장이면 한 장을 찢어 버린다는 속성이 통하는 슈퍼 럭셔리로 진화하고 있고, 프리미엄은 기존 럭셔리 영역으로 들어가 프리미엄 럭셔리로 변하고 있습니다. 제네시스는 프리미엄 럭셔리를 지향하고 있고, 고급 브랜드의 디자인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그러하듯이 여러 자동차들을 벤치마킹하되 우리는 제네시스 특유의 좋은 재료와 레시피로 제네시스만의 특별한 디자인을 그릴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요. 절대 남의 레시피를 모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어떤 부분들을 고심하고 있을까. 브랜드 전략을 물었다. 


“지난 7월 말에 제네시스 브랜드 전략본부가 독립 신설되었습니다. 그쪽에서 단계별로 많은 연구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향후 별도의 독립된 딜러망도 가지고 갈 겁니다. 브랜드 성공에 있어 중요한 세 가지 요소는 뿌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 글로벌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국시장에서 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렉서스와 인피니티가 미국시장에서는 성공했지만 유럽에서는 존재가 미미하고 심지어 일본에서도 별 인기가 없습니다. 따라서 제네시스의 경쟁상대는 이 세 요소를 다 갖추고 있는 독일 빅3(메르세데스-벤츠, BMW, 아우디)입니다. 제네시스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매력적인 브랜드 스토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애플이 미니멀한 디자인으로 고가이지만 강력한 팬덤을 형성했듯이 디자인은 본질적으로 비논리적, 감성적 측면으로 고객에게 가치를 줍니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리지요. 강력한 한방을 계속 날려 주어야 합니다(웃음). SUV인 GV80 컨셉트에서 제시한 가느다란 네 줄 헤드램프같은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계속 나올 겁니다.“


지난 세기 내연기관을 중심으로 진화를 거듭해 온 자동차산업은 21세기 들어 ACES(Autonomous, Connected, EV & Sharing)로 요약되는 패러다임 대전환기에 들어서고 있다.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은 자동차를 도로 위의 컴퓨터나 통신기기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자동차 디자인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자동차 디자이너들에게 커다란 도전 과제를 안겨주었다. 

 

   
 

”산업혁명으로 증기기관과 운하가 새로운 운송주역으로 등장했습니다. 기존 주역이었던 말은 스포츠로 쓰임새가 바뀌어 특정장소에서 달리게 되었죠. 자율주행차가 나오면 사고는 거의 나지 않겠지만, 이동 자체는 지루해지고 사람들은 차 안에서 다른 일을 할 겁니다. 스피드가 그리운 사람들은 경주장에 가거나 경주게임에 빠질 겁니다. 디자인 자유도가 올라가 자동차 디자인에도 큰 변화가 오겠죠. 아직 확실한 방향이나 답은 없지만, 분명한 건 이제 자동차도 완전히 새로운 모습과 용도로 바뀝니다. 모든 자동차 메이커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새로운 출발선으로 모이고 있다는 겁니다. 고급차 시장의 경우, 오랜 역사의 고급 브랜드들이 지금까지 쌓아 온 헤리티지나 시장 경험, 고객층 같은 자산들이 무의미해지는 거죠. 우리 같은 신생 브랜드에게는 엄청난 기회가 될 수 있죠. 중요한 점은 남들보다 먼저 1등으로 하는 건 의미가 없고 뭘 하더라도 좀 늦어도 완벽하게 구현해 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일까? 또 수많은 차종들이 사라져가지만 몇몇 차종은 세월을 견디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클래식 모델이 된다. 


“업종에 관계없이 좋은 디자인이란, 고객이 사랑할 수 있는 제품으로 나오는 디자인입니다. 디자인은 예술이 아닙니다. 기업의 수익향상에 기여해야 하므로, 좋은 디자인은 고객에게 가격을 넘어서는 가치를 창조하는 겁니다. 디자인은 강력한 스토리텔링으로 고객을 설득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대차는 그동안 독자 모델을 갖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 등 좋은 스토리가 많았음에도 설득력이 부족해 시장에서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어요. 그리고 클래식이 되기 위한 하나의 필요조건은 디자인의 특별함이죠. 하지만 강력한 스토리라는 충분조건을 갖추어야 세월을 이겨내고 클래식이 됩니다. 개별적으로는 각자의 라이프스토리가 담겨 있으면 평범한 차라도 그 사람에게는 클래식이 되겠죠.”


일도 많고, 생각도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개인생활을 누릴까? 1년 365일 자동차만 생각할 것 같았던 이상엽 상무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저 개인적으로 잘 쉬고 있습니다. 주중에는 회사일에 집중하지만 주말에는 딱 일 스위치 끄고 가족과 함께 여행하고 맛집 찾아 다닙니다. 젊었을 때는 24시간 디자인만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젠 그러면 안 되겠더라구요(웃음)” 


이상엽 상무는, 자동차 디자이너는 정말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또 한 인터뷰에서는 늘 좋은 펜을 가지고 다니라고도 했다. 참된 자동차 디자이너는 어떤 사람이고, 그런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후배 디자이너들을 위해 한 말씀 부탁했다. 


“디자이너는 순수 예술가가 아니라 기업의 목적에 따라 많은 사람들과 협력하고 타협해야 하므로 반(半)엔지니어가 되어야 합니다. 머리와 가슴과 손의 조합이 중요하고요. 늘 고객을 위한 가치를 어떻게 시장제품으로 표현해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저도 그렇지만 제가 존경하는 켄 오쿠야마, 발터 드 실바, 루크 동커볼케 같은 분들도 늘 펜을 가지고 다닙니다. 디자이너로서 언제든 사람들에게 그림으로 자기 아이디어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여러분들도 항상 펜을 가지고 다니세요(웃음). 저는, 싸고 잘 써지고 디자인 특징이 확실한 모나미 펜이 좋더군요. 명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순하/ 본지 편집위원. 자동차 칼럼니스트.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미시건대 MBA 졸업. 
기아자동차, 대우자동차판매, GE코리아 근무. 
前 UL 한국담당 사장 및 글로벌 오토모티브 산업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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