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혜의 영화와 자동차] 엘르 : 미셸의 아우디 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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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의 영화와 자동차] 엘르 : 미셸의 아우디 A4
  • 신지혜
  • 승인 2017.08.14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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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한 친구 안나와 게임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회사를 경영하는 CEO 미셸. 직원들에게는 카리스마 넘치고 주저함이 없는 보스이며 안나에게는 힘이 되는 동업자이자 좋은 친구이다. 이혼한 남편과는 친구처럼 지내고 변변한 직업도 없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채 엄마에게 기대면서도 튀어나가는 아들에겐 경제적인 지지대인 그녀, 미셸.

강인하고 당당한 그녀에게 어느 날, 큰 일이 닥친다. 가장 편안하고 안락해야 하는 그녀의 공간에 순식간에 침입자가 들이닥친 것이다. 시간을 들여 작정하고 계획한 듯 검은 스키복으로 무장하고 스키 마스크까지 뒤집어 쓴 침입자는 미셸의 공간과 마음에 엄청난 상처를 안겨준다.

보통의 경우라면 아마도 주인공의 상심과 상처에 초점을 맞춘 무겁고 끔찍한 이야기가 전개되었거나 상처를 딛고 일상으로 회복하려는 이야기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엘르>는 통상적으로 예상 가능한 이야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의 충격적인 도입부가 지나고 미셸의 일상과 그 일상의 프레임에 함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여주면서 미셸이 각각의 인물들과 어떤 관계인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상대에 대해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세밀하게 드러낸다. 

사람이란 그런 존재이다. 한 두 가지 면만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감정과 마음이 내면에서 요동칠 때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행동과 기분에 빠지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감정과 마음이 부딪히고 상황의 변수가 작용할 때 얼마나 많은 가짓수가 발생할 것인가. 

 

감독 폴 버호벤은 인터뷰를 통해 <엘르>를 애매모호함과 거리두기를 통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영화로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 점 때문에 우리는 통상적인 영화의 주인공들과는 다르게 도무지 미셸의 마음이나 도덕률, 욕망이나 철학을 읽어낼 수 없다. 

또한 바로 그 점이 미셸을 하나의 캐릭터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들로 바라보게 한다. 현실 속에서 우리가 누군가의 행동을 보고 성격과 기분과 마음과 상황을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단지 미셸의 삶 속에서 접점을 이루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미셸을 조금은 들여다볼 수 있다. 미셸과 타인의 관계, 그 타인들이 맺고 있는 각자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복잡다단한 인간의 내면과 마주친다. 그 복잡다단한 내면은 결국 우리 자신의 내면임을 깨달으며 우리는 미셸의 마음과 기분과 느낌을 쫓아가게 되는 것이다.

미셸의 자동차는 아우디 A4이다. 게임 콘텐츠로 성공한, 작지만 튼튼한 회사, 사회적인 지위와 경제력, 연륜과 경험을 갖춘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는 CEO의 차로 아우디 A4는 적당해 보인다. 

그녀의 집, 그녀의 이미지, 그녀의 강인함과 그녀의 매력은 아우디의 매끈하고 군더더기 없는 보디와 잘 어울린다. 또한 그녀를 집과 회사, 레스토랑으로 안전하고 든든하게 데려가고 데려오는 아우디는 어쩌면 뒷문이 고장 난 그녀의 근사한 집보다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고장 난 뒷문으로 괴한이 침입해 그녀의 일상에 그녀의 삶에 충격을 주고 파문을 일으킨 집보다는 단단하고 멀쩡하고 성능 좋은 아우디는 그녀에게 훨씬 안정감을 주고 충실해 보이는 것이다. 

 

미셸의 집이 작은 빌미로 그녀의 안락함을 깨뜨리는 괴한을 허용했다면 미셸의 자동차는 오히려 다른 사람의 안정감을 깨뜨리는 역할을 한다. 고장난 뒷문으로 (혹은 침입자 스스로가 일부러 미셸의 집 뒷문을 고장 냈을지도 모른다. 영화가 전개될수록 이 의혹은 점점 심증으로 굳어진다) 침입자가 들어와 그녀의 내면을 깨뜨린 것은 그녀를 피해자로 만들고 약자로 보이게 하지만 그녀는 전 남편의 차를 일부러 들이받아 범퍼를 떨어뜨려 놓음으로써 그녀 역시 가해자나 강자의 위치에 설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누구나 선과 악, 강자와 약자의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듯이 그녀 또한 누군가에게는 강자가 되고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비단 아우디를 통해서만은 아니다. 영화 속에서 미셸은 여러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때론 강자가 되기도 하고 때론 약자가 되기도 하며 때론 거칠고 때론 부드럽다. 

그래서 미셸의 아우디는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복합적인 내면을 보여주는 매개이며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하게 깨닫게 해주는 촉매제가 된다.

수잔 손택은 이자벨 위페르를 완전한 아티스트라고 극찬했다는데 <엘르>를 통해 정말 대단한 연기를 보여준다. 

시네마 토커 신지혜
(CBS-FM  신지혜의 영화음악 제작 및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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