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이단자, 람보르기니 이슬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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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이단자, 람보르기니 이슬레로
  • 제임스 엘리엇(James Elliot)
  • 승인 2017.07.09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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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보르기니 이슬레로는 약간 엉뚱하다. 이슬레로는 전설적인 투우사 마누엘 로드리게스의 목숨을 앗아간 투우의 이름이다. 정말이지 이 람보는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성능마저도 여느 라이벌과 다르다. 당대에는 기계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맞설 라이벌이 없었다. 여기 나온 차는 그 시대와는 너무 거리가 멀어 60년대말 2+2 GT의 폭넓은 카테고리 안에서 이단자로 찍혔다. 더구나 람보르기니 라인업 안에서는 반역자로 몰렸다. 물론 같은 시기의 에스파다와 미우라도 당대의 형제들을 닮진 않았다. 그러나 클래식카를 찾는 오늘날의 마니아들을 헷갈리게 하는 차가 이슬레로이다. 우리가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주차장을 기웃거리던 사람이 차의 옆모습을 보고 릴라이언트 시미타 SE4와 비슷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 차는 몬테베르디나 인터메카니카처럼 약간 엽기적인 배지를 달더라도 누구 하나 눈살을 찌푸릴 까닭이 없었다. 

 

사실 이 차는 람보르기니가 들고나온 4번째라는 것을 잊기 쉽다. 게다가 미우라와 에스파다의 파격적인 성격 탓에 당시에는 이인자로 받아들였다. 트윈램프의 휘어진 400GT를 대체한 이슬레로는 선배의 장비를 대부분 물려받았다. 하지만 약간 짧아진 튜브형 강철 섀시와 더 넓은 트레드를 갖추고 몸무게를 약 150kg 줄였다. 

 

1968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첫선을 보인 스타일은 시대를 한참 앞섰다. 밀라노에 본거지를 둔 투어링 마리오 마라치가 내놓은 각진 미래형 드림카였다. 그 디자인의 바탕은 무엇이었을까? 2년 전 미우라의 소용돌이가 불러일으킨 자신감, 혹은 젊은 디자이너의 자유분방한 자신감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전위적 작품의 거침없는 대담성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숨막히게 만들었다. 이탈리아의 산타가타는 그 전에 이미 자유분방한 개성을 자랑하는 GT를 내놨다. 페루치오가 주문한 차는 플레이보이가 아니라 이마에 주름진 기업가를 위한 것이었다. 

 

그처럼 정통한 고객들은 마찬가지로 디스크 브레이크, 완전독립 서스펜션과 윤택한 실내를 골랐다. 더하여 한층 세련된 패키지의 미우라 성능을 사실상 그대로 받아들였다. 처음에 장착한 엔진은 볼로냐에서 만든 완전합금 V12 4.0L 330마력 짜리였다. 지오토 비차리니가 설계하고, 지암파올로 달라라가 손질했다. 이슬레로의 0→시속 97km 가속은 6초를 약간 넘었다. 최고시속은 260km에 가까웠다. 그러면서도 미우라보다 고속안정성이 훨씬 뛰어났다. 12개월 동안 겨우 125대가 나온 뒤 이슬레로는 S 스펙으로 올라갔다. 출력은 25마력이 추가됐고, 보닛의 에어 스쿠프(엔진보다는 실내온도를 끌어내리는)가 유난히 눈에 띄었고, 플레어 휠아치와 개선된 대시보드가 눈길을 끌었다. 다시 1년 동안 100대가 더 나온 뒤 이슬레로는 사라졌다. 그 뒤 더 잘 팔리는 미국시장을 겨냥한 자라마가 나왔다. 

 

어쨌든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지 못한 것은 뜻밖이었다. 따지고 보면 람보르기니 기준으로는 값이 쌌다. 그러나 페루치오와 동생 에드몬도를 비롯해 고객 명단에는 쟁쟁한 인사들이 들어 있었다. 개중에도 당대 최고의 여우 브리짓 바르도는 이 차의 이미지를 대중의 의식에 아로새겼다. 로저 무어 감독 영화 <로저무어의 이중생활>에서 해럴드 헬름의 야생마 역할을 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2008년 7월 우리 <오토카>의 자매지 <C&SC>의 마틴 버클리가 영화에 등장했던 이슬레로 S를 시승했다. 당시 영국 람보르기니의 31년 베테랑 델 홉킨스가 이렇게 회고했다. “영국에 있던 이슬레로는 바하마 총독 소유였고, 정기적으로 산타가타로 돌아가 서비스를 받았다.”

 

그 말이 아주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홉킨스는 이 차에 관해 소감을 밝혔다. 아주 특별한 차였다. 영국에 들어온 오른쪽 운전석 이슬레로 S로 섀시번호 6435, 엔진번호 50140. 그것만으로도 희소가치가 대단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새차로 나온 뒤 한 가문을 떠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진정으로 ‘하나밖에 없는 차’였다. 

 

초대 윌리엄 카트웨이트는 상선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제1차대전중 상선을 가장한 전함 Q쉽을 개발하여 1919년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그 뒤 로이드 해상보험회사를 세웠고, 바하마에서 은퇴생활을 하다가 1956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위는 윌리엄 ‘빌’(1906년 출생)에게 넘어갔다. 그는 색맹인데도 속임수를 써서 영국해군 항공예비대에 들어갔다.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의 제1차 공중공격에 가담했고, 두 차례나 청동무공십자훈장을 받았다. 그가 처음으로 사들인 정상적인 차는 1961년의 초기 E-타입. 가족의 파이어볼 엔진 뷰익 8 ‘페어드롭’에 이어 세컨드카 역할을 했다. 

 

1960년대가 끝날 즈음 그의 이색차 취향(일찍이 파셀 베가를 구입했다는 말이 돌고 있다)이 발동했다. 그래서 이탈리아로 가서 공장에서 직접 과거 전시용이었던 이슬레로 S를 사려고 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공식대리점을 통해서만 차를 팔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영국과 바하마 여권을 함께 갖고 있었다. 덕분에 그 자리에서 바하마의 람보르기니 대리점을 설립했다. 결국 윌리엄 경은 자신에게 이슬레로 S를 그 자리에서 팔았다. 1969년 10월 22일 완전무장한 이슬레로는 7000파운드(약 976만원)에 5000달러(약 595만원)를 더한 가격에 넘어갔다. 바하마 군도의 낫소에 등록을 마치고 영국 켄트주 맷필드 하우스의 자기 집으로 몰고 갔다. 그는 이 차를 엄청 몰고 다녔다. 정기적으로 프랑스 최고의 휴양지 르 투케와 그 카지노로 달려갔다. 그리고 해마다 람보의 본고장 산타가타를 찾아가 서비스를 받았다.

 

말년에 가서 그는 한해의 일정을 잘 짜뒀다. 으레 자녀중 한 사람을 데리고 파리에 가서 승마클럽을 찾았다. 뒤이어 이탈리아로 넘어갔다. 산타가타에서 이슬레로를 람보 서비스에 맡기고 베네치아로 갔다. 며칠 뒤 다시 차를 찾아 집으로 몰고 왔다. 이처럼 놀라운 습관 덕분에 발렌토리 발보니 백작, 봅 월리스와 사귀게 됐다. 그리고 모데나의 호텔을 예약할 때 ‘성당 옆 조용한 쪽’이라고 주문할 만한 명사 대접을 받았다. 한번은 집으로 돌아오는데 클러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국에서 고치지 않고 2개월 뒤 다시 람보를 찾기로 하고 차를 직접 몰고 갔다. 가는 길에 1단과 2단이 말을 잘 듣지 않아 진땀을 흘렸다. 

 

빌 경은 1993년 87세로 숨을 거뒀다. 마크가 차세대 윌리엄 경의 작위를 이어받았으나 작위를 쓰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는 슬하의 3형제에게 람보르기니 소유권을 갖도록 설득했고, 그 전통이 살아있다. 마크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을 때 힐클라임에 나갔고, 스너터튼과 브랜즈의 트랙데이를 즐겼다. 그동안 색상을 오리지널 비앙코(=백색)에서 지알로 솔레(=태양의 노란색)로 갈고, 엔진과 변속기를 다시 만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아버지의 뜻대로 마크와 부인 비키가 몰고 다녔다. 

 

처음부터 이슬레로 S는 순풍에 돛을 달았다고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먼저 바하마에 등록했어야 했다. 그 때문에 영국에서 다시 등록하기 위해 수입관세 2500파운드(약 348만원)를 물어야 했다.” 마크의 설명이다. “그건 앞으로 닥칠 불길한 조짐의 시작일 뿐이었다.” 그는 유지비로 상당한 돈을 썼다. 그가 소유하고 있을 동안 스트레이트 에이트&콜린 클라크 엔지니어링의 대형작업을 비롯해 서비스 비용이 10만파운드(약 1억4000만원)를 넘었다. 그럼에도 그 차와 함께 나눈 경험을 돈과 바꾸려 하지 않았다. 1999년 브루크랜즈에서 이탈리아 카데이가 있었다. 그때까지 영국에서 가장 큰 행사였고, 헐링엄 클럽에서 콩쿠르델레강스가 열렸다. VC10을 비롯해 4대의 다른 라이벌과 맞붙은 경쟁에서 이슬레로 S가 정상에 올랐다. 2010년에는 네덜란드에서 열린 마르셀 발렌부르크의 12대 모임에 참석했다. 

 

초대 오너 윌리엄 경은 차를 몰고 서남 런던 일대를 자주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앞서 말한 모든 행사도 그의 찬성을 받고도 남을 일이었다. 마크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미스터 람보르기니에 매혹됐다. 그는 트랙터를 만들었고, 무엇보다 농부였다. 아울러 누군가 페라리를 넘어서는 페라리를 만들기를 고대했다. 레이스에 정신을 뺏기지도 않고. 고객에 불편을 주지 않으면서 오로지 최고의 스포티 로드카를 만든다는 아이디어에 푹 빠졌다.” 

이슬레로의 겉모습에는 부드러운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심지어 눈길을 끄는 높은 범퍼에도 이 모델은 확실히 신중해 보였다. 가령 통속적인 2+2 GT가 그 비교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슬레로는 여전히 특별하다고 소리높이 외쳤다. 특히 이처럼 생생한 컬러를 입었을 때 더욱 그랬다. 사실 스타일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저평가됐다. 팝업 헤드램프, BMW식 C필러와 짧고 네모난 트렁크. 이들을 전제로 했을 때 긴 보닛과 짧은 테일에 담아낼 이보다 좋은 조건을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여기서 외형적으로 수직사각형 스타일에 얼마나 섬세하고 품격있는 디테일을 담아냈는가를 미처 보지 못했다. 위에 매달린 페달의 간격은 계산척만큼 정확했다. 그처럼 깔끔하고 대칭적인 엔진룸은 일찍이 없었다. 

 

아울러 일체의 모더니즘을 제쳐두자. 두툼한 운전석은 펑퍼짐한 엉덩이를 잘 받쳐줬고, 가느다란 필러와 탁트인 유리온실이 둘러쌌다. 결정적인 스타일 포인트는 옆구리를 앞에서 뒤까지 이어주는 좁다란 크레스트. 이 미사일을 유도하는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도로에 나가자 주름진 피크가 눈길을 끌었다. 한편 거기에는 콜벳에 가까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들은 그보다 10년 전 제트시대의 디자인 감각을 짙게 풍겼다. 나르디 블루 레이 또는 알파 디스코 볼란테가 떠올랐다. 

실내 소재와 스타일은 전통과 현대를 재미있게 아울렀다. 모조목재 밴드와 토글을 대신한 피아트제 로커가 달린 대시보드는 구형보다 매력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그처럼 깔끔한 스타일에는 좀 더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뭉툭한 목재 3스포크 스티어링 휠에는 다이얼 3개가 달렸다. 정중앙에 소형 오일압계가 있고, 그 양쪽에 시속 300km 재거 속도계와 1만rpm 회전계가 자리잡았다. 운전석 왼쪽 로커 위에는 보조계기가 길게 줄지었다. 한편 대시보드의 3분 1은 옵션인 볼레티 에어컨이 차지했다. 

 

안타깝게도 예상했던 블라우풍트 블루 스포트는 좀더 현대적인 소니로 바뀌고 말았다. 한데 그처럼 부수적인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스로틀을 세 번 밟은 뒤 키를 돌렸다. 몇초가 지나자 컬컬한 V12가 폭발한 뒤 1200rpm(실제로 800rpm쯤으로 느껴지는)에서 안정된 공회전에 들어갔다. 페달을 쓰다듬자 6개 웨버 40이 위력적인 V12에 기화기를 쏟아넣었다. 그때 4개 배기관을 통해 힘차게 분출되는 배기음을 들을 수 있었다. 

클러치는 행정이 길었으나 넓은 터널에서 솟아난 뭉툭한 레버의 위치는 완벽했다. 노이즈는 점차 올라갔고, 이슬레로는 저속에서 놀랍도록 몰기 쉬웠다. 4.5회전의 스티어링은 예상과 달리 무겁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터닝서클도 별로 나쁘지 않았다. 사실 2단계로 돌아가는 듯했다. 운전대를 완전히 꺾으면 캄파뇰로 마그네슘 휠이 4각으로 돌아갔다. 햇빛에 반짝이는 토끼귀 스피너를 지켜볼 수 있었다. 

 

일단 이슬레로가 출발하자 게이트는 어깨가 넓었다. 오른 운전석 버전에서 드라이버와 5단 변속기의 1~2단은 거리가 멀었다. 때문에 다운시프트 때 기어가 잘못 들어가기 쉬웠고, 차가 비틀거릴 때 잠시 회전이 멈췄다. 그러나 그런 실수가 오히려 트랙션을 되살렸다. 액셀을 밟으면 평형을 잡기 전에 낡은 가솔린 엔진이 점화되는 폭음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토크를 낭비할 까닭이 없었다. 5단 변속기는 너무나 상쾌해 짧고 확고한 힘을 발휘했고, 액셀로 쉽게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이슬레로의 두터운 좌석은 거친 승차감을 잘 다스렸고, 코너링은 평탄했다. 정상적인 도로속도에서는 언더스티어의 희미한 기미를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아무튼 이 차는 꼬부랑길을 달려야 할 일이 없었다. 톱기에서 1000rpm에 시속 34km로 유럽 전역을 힘들이지 않고 돌아다닐 차였다. 파워윈도를 내리거나 에어컨을 켜고 달릴 수 있었다. 

 

우리는 그 고혹적인 포효를 듣기 위해 다운시프트와 부팅을 반복하며 그날을 보냈다. 단순하면서도 능률적인 쾌락이었다. 이슬레로는 우리가 시승한 어느 V12 람보르기니 못지않게 세팅이 뛰어났다. 그게 이슬레로의 매력 중 큰 몫이었다. 불과 몇 분 만에 어느 현대적 모델처럼 스스럼없이 몰고 다니고, 언제나 정교한 스릴을 맛볼 수 있었다. 하나의 모델로 이슬레로는 그토록 수많은 매력을 갖고 있어 선배와 동시에 후배보다 더 운전하기 좋은 차였다. 운전대를 잡고 한 시간이 되기도 전에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는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더욱 가슴이 아팠다. 가트웨이트와 그의 차는 마침내 헤어질 때가 됐고, 그 사연은 우리를 침울하게 했다. 그 불행한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2년 전 그는 치매진단을 받고 운전면허를 반납했다. 그 뒤 몇몇 가족과 친구가 모여 자주 이슬레로에 그를 태워 드라이브에 나서고 있다. 액셀을 힘차게 밟을 때마다 제2대 윌리엄 경 마크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감격했다. “그럴 수 없이 감동적이다. 그렇다고 후대에 이런 유산을 물려줄 수는 없다.” 마크가 설명했다. “아무리 관심이 크더라도 대단한 부담이 따른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그런 경제적 부담을 안고 이 차를 몰고 다닐 까닭이 없다.” 이 차를 팔지 않을 수 없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는 잠깐이었다. 마크는 올 여름 자기 아들(제3대 윌리엄 경)과 함께 유럽 일주를 할 계획을 밝혔다. 가슴이 뭉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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