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리의 발자취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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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의 발자취를 찾아서
  • 앤드류 프랭클(Andrew Frankel)
  • 승인 2017.06.20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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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페라리는 탄생 70주년을 맞았다. 그래서 설립자인 엔초 페라리, 페라리 모터스포츠팀, 나아가 카메이커 페라리를 기념할 가치가 있다. 심지어 엔초 페라리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슈퍼카 메이커로서의 페라리보다 역사가 더 길다. 

엔초 페라리는 어느 차에 자기 이름을 달기 오래전부터 모터스포츠 무대에 우뚝 선 거인이었다. 그리고 세계대전의 공군 에이스 프란체스코 바라카가 애용하던 뛰어오르는 말 엠블렘은 페라리의 첫 번째 로드카가 마라넬로 공장을 떠나기 전에 이미 유명했다. 

 

축하행사에 앞서 엔초가 올해 119세(생일 2월 18일)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가 1920년 타르가 플로리오에서 2위에 올라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지 97년이 됐다. 아울러 1930년대 초 그랑프리 레이싱을 휩쓸던 일련의 알파로메오에 그의 엠블럼을 붙이게 된 지도 85년이 지났다. 그리고 1940년 아우토 아비오 콘스트루치오네의 2대 AAC 815 가운데 제1호가 만들어진 지도 77년이 됐다. 그들은 알파의 반대로 그 이름을 달지 못했을 뿐 사실상 페라리였다. 

 

어쨌든 그동안의 사연은 이쯤해두자. 나는 신형 488 스파이더의 차머리를 돌려 유명한 터널을 통과했다. 669마력의 야성적인 울부짖음이 터널벽을 쩌렁쩌렁 울렸다. 마침내 지난 70년에 걸쳐 우리에게 알려진 페라리의 명소 순례여행의 첫 목적지에 도착했다. 

우리는 굿우드에 들어갔다. 그뒤 우리 고장과 노퍼크의 가장 먼 지점까지 영국의 페라리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추적해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 여정은 지리적인 흐름을 따라 페라리 연대기를 써 나갔다. 하지만 사실 시대순으로 따지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페라리의 발자취를 찾아헤맨 꼴이었다. 

 

우리는 서킷에 들어가 여기서 벌어졌던 페라리의 두 경기를 축하하며, 회상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레이싱 드라이버가 누구냐를 놓고 하루종일 토론해도 결론을 내기는 어렵다. 바로 여기서 1958년 F1 5회 챔피언 후안 마누엘 판지오가 은퇴했고, 1962년 모스가 모터스포츠계를 물러났다. 그동안 모터스포츠계에서 모든 팀이 군침을 삼킨 드라이버는 스털링 크로퍼드 모스였다. 엔초도 마찬가지. 하지만 모스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다른 드라이버가 감히 할 수 없는 조건을 엔초 페라리에게 내놨다. 페라리를 몰기는 하겠지만 페라리를 위해 뛰지는 않겠다고 했다. 페라리가 팩토리 스펙 스포츠카를 로브 워커 레이싱팀에 공급해달라고 했다. 그러면 로브의 감청색 팀컬러를 입히겠다는 복안이었다. 스털링 모스는 그 작업이 모두 끝난 뒤 상당한 세월이 흘러서야 페라리의 에이스 F1 드라이버가 됐다. 1960년 모스는 그렇게 눈부신 푸른빛의 신형 페라리 250 SWB를 몰고 투어리스트 트로피(TT)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당시 TT는 월드 스포츠카 챔피언십(WSC)의 완전한 시리즈로 자리잡았다. 그때 뉘르부르크링과 몬자에서 열린 1000km 레이스만큼 중요했다. 모스는 후속차 대열을 따돌리고 멀리 사라졌다. 초고속 서식스 서킷을 멀리 앞서가면서 관중 속의 아리따운 여인을 골라 손을 흔들며 추파를 보냈다. 게다가 경기를 중계하는 레이먼드 백스터의 해설을 차 안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 자신이 멀리 선두를 달린다는 중계를 듣고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그 이듬해에도 모스의 압승은 계속됐다. 

 

1962년 4월에 이르자 패독에는 SWB대신 따끈따끈한 신차 250 GTO가 그 자리에 나왔다. 하지만 모스는 먼저 로터스 18/21를 몰고 F1 그랑프리에 나가야 했다. 그런데 경기 중 충돌사고로 인해 부상을 입어 GTO에는 오르지 못했다.

다음 우리가 찾아야 할 곳은 멀지 않았다. 길드퍼드 부근의 샐퍼드 공단이었다. 다름 아닌 고든 머레이 디자인 사무실을 찾았다. 머레이는 페라리 팬이었다. 특히 F40을 가장 좋아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이곳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페라리가 그토록 애타게 구애했던 또 다른 영국인을 찾기 위해 왔다. 모스처럼 그도 페라리에 조건을 내걸 수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모스 시대에서 1세대 거슬러올라갈 수 있었다. 그때 페라리는 이미 늙었고, 머지않아 세상을 떠날 처지였다. 게다가 페라리 F1팀은 위기를 맞았다. 페라리 드라이버가 F1 월드 타이틀 왕좌에 오른 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더구나 페라리 팀은 영국 라이벌과의 페이스를 유지할 수 없었다. 맥라렌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라리는 맥라렌의 강점을 정확히 짚었다. 1980년대초 맥라렌은 디자이너 존 바너드와 고든 머레이가 설계한 카본파이버 맥라렌 MP4/1를 앞세워 판세를 뒤집었다. 그뒤에 나온 맥라렌 머신이 모터스포츠를 휘어잡았다. 바너드는 머레이와 맞먹는 혁신가로 이름을 떨쳤고, 페라리는 그를 데려오고 싶어했다. 

하지만 바너드는 페라리의 제의를 딱 잘랐다. 그는 가정을 꾸렸는데 페라리는 인재를 스카웃하면 이탈리아로 데려가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자 페라리는 파격적으로 이탈리아 마라넬로가 아닌 영국 길드퍼드에 F1 머신제작소를 차리겠다고 제의했다. 바너드는 기지를 발휘해 그 제작소를 길드퍼드 테크니컬 오피스(GTO)라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이곳에선 챔피언십 타이틀을 따낸 머신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페라리 641은 꾸준히 페이스를 지켜 1990 시즌의 끝에서 두번째 스즈카(일본) 그랑프리에 이르렀다. 그때 제1 코너에서 아일론 세나가 알랭 프로스트에 고의 충돌해 세계타이틀을 향해 달리던 프로스트의 꿈을 박살냈다. 

 

페라리 기술시설을 현대화한 주역이 바로 바너드였다. 게다가 제2기 페라리 활동기간에 혁명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이로써 그가 떠난 뒤 시작되는 슈마허 시대의 터전을 닦았다. GTO는 맥라렌에게 팔렸고, 그뒤 머레이가 사들였다. 그리고 획기적 디자인 작업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거기서 에그햄의 페라리 딜러까지는 아주 짧은 거리였다. 이 가게는 아르-데코 건물로 유명한 파워 개러지에 들어있었다. 영국에서 처음으로 페라리를 팔던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영국에서 이보다 더 페라리 브랜드를 떠올리는 건물은 없다. 사실 1960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페라리를 보급한 로니 호어 대령 덕분이었다. 그가 거느렸던 명문 ‘마라넬로 컨세셔네어스’ 레이싱팀은 페라리를 레이스에 투입한 가장 성공적인 사설팀이었다. 따라서 영국의 명드라이버 존 서티스와 그레이엄 힐이 입문할 정도였다. 개중에도 힐은 굿우드의 투어리스트 트로피(TT) 레이스에서 페라리에 두 차례 우승을 선사했다. 

여기서 호어 대령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례를 들어보자. 1967년 그는 경주차 한 대에 피어스 커리지와 리처드 애트우드를 한조로 묶어 르망 24시간에 투입했다. 두 드라이버는 호어와 같은 이튼과 해로우 동문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1967년 호어 대령은 에그햄으로 이전했다. 페라리가 가장 위대한 로드카 시대를 열어 오늘에 이르는 출발점과 일치했다. 데이토나와 디노를 팔면서 사업은 번창했다. 그뒤 20년동안 사업을 이끌다가 1987년 마침내 손을 뗐다. 현재 그 자리에 시트너 그룹이 들어있다. 펜스키 오토모티브 그룹이 완전히 소유한 자회사로 레이싱의 뿌리는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따라서 레이싱을 테마로 했을 때 실버스톤을 넣지 않으면 영국의 페라리 추억은 완성될 수 없다. 1951년까지 카메이커 페라리는 겨우 4살에 지나지 않았다. 그동안 알파로메오 158은 불패의 강자였다. 1.5L 슈퍼차저 엔진은 450마력을 뿜어냈고, 라이벌을 모조리 짓밟았다. 1950년 처음으로 드라이버즈 월드 챔피언십이 창설됐다. 그때 알파는 완승으로 시즌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 기록은 지금까지 깨지지 않았다. 

 

그러나 알파에는 한가지 약점이 있었다. 쉽게 닥치는 목마름. 페라리가 잽싸게 그 약점을 눈치챘다. 때문에 아우렐리오 람프레디에게 슈퍼차저를 달지 않은 V12 4.5L 엔진 설계를 지시했다. 출력은 조금 떨어지지만 급유스톱을 줄일 수 있었다. 실버스톤 서킷에서 프로일란 곤살레스는 페라리 첫 폴을 안겼다. 게다가 결승에서 알파의 2회에 맞서 1회 급유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F1 그랑프리에서 첫승을 거뒀다. 노퍼크 해안에서 우리가 마지막 머문 곳은 페라리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거기서 찾아낼 차는 중대한 의미가 있었다. 에그햄에서 먼 거리였으나 488은 그 거리를 거침없이 삼켰다. 바로 그 488은 페라리 최초의 미드십 V8 2인승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바로 1975년의 화려한 308 GTB였다. 페라리에 따르면 3.0L 4캠 엔진의 최고출력은 259마력. 그러나 사실은 233마력에 더 가까웠다. 현행 모델 엔진은 배기량이 1.0L 미만으로 커졌으나 출력은 거의 3배에 이른다. 맥라렌 F1을 훨씬 앞질렀다. 하지만 날씨가 좋지 않았는데도 핸들링은 실로 아름다웠다. 

 

스파이더 엔진은 우리가 보러가는 1949 166 인터의  출력보다 6배 높았다. 페라리 로드카로는 제7호에 불과했고,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모델이었다. 심지어 488 스파이더에 없는 무엇이 있었다. 클래식 V12 엔진. 

인터는 시간을 초월해 살고 있었다. 단 한번도 복원작업을 한 적이 없는 68세의 노구에도 완벽한 조건을 갖췄다. 일생동안 빈틈없는 보호를 받았고, 경주용 버전은 1949년 르망 24시간에서 정상에 올랐다. 이로써 페라리는 데뷔연도에 세계최고의 내구레이스에서 우승하는 세계 최초 브랜드의 영광을 안았다. 오직 맥라렌만이 그와 맞먹는 업적을 달성했다. 아무튼 인터의 V12 2.0L 엔진은 지금도 그 위업을 반복할 기세로 으르렁댔다. 

그 차는 가장 유명한 2명의 페라리 엔지니어 작품이었다. V12는 지오아키노 콜롬보의 걸작. 1960년대 중반까지 페라리 로드카와 레이싱카의 심장으로 힘차게 박동했다. 한편 섀시는 앞서 말한 람프레디의 공적이었다. 그리고 보디는 밀라노의 투어링이 설계한 경량 ‘슈퍼레제라’ 디자인이었다. 

경주차의 V12 엔진은 142마력이 거뜬했다. 1940년대에 24시간을 쉬지 않고 달리기에 충분한 2.0L 엔진으로는 환상적 파워였다. 그와는 달리 싱글 카뷰레터 로드카 페라리는 출력이 약 112마력이었다. 당시의 로드카에 딱 들어맞았다. 

 

사실 독립 앞서스펜션 166은 핸들링 감각이 제2차대전 이전의 그것과 같았다. 이 차는 정밀기계는 아니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대충 방향을 잡고 나가는 수준을 겨냥했으나 그뒤 정밀 조율했다. 어쨌든 제 역할을 잘했고, 실내에는 재거 다이얼이 화려했다. 그 하나하나가 페라리의 환상적 사인을 담고 있었다. 따라서 실로 특별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파워트레인은 달랐다. 페라리 고객은 엔진을 사기 위해 돈을 내고, 나머지는 덤으로 받는다고들 한다.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다만 나는 변속기도 돈을 내는 패키지 일부에 넣고 싶었다. 1940년대의 다른 로드카에는 없는 5단 변속기를 갖췄다. 작은 엔진과 5단 변속기는 완벽하게 맞아 돌아갔다. 아주 작은 12개 피스톤이 각 기어마다 절반의 반응을 내려해도 6000rpm 레드라인까지 올라가야 할듯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 엔진은 4500rpm에 이미 최대토크를 뿜어냈다. 기어변환은 느렸으나 정확했고, 엔진은 내가 알고 있는 어느 엔진 못지않게 매끈하고 개성이 뚜렷했다. 1940년대에는 우주선과 같은 느낌을 줬을 것이 분명했다. 

 

70년 간격의 두 페라리를 오가는 느낌이 미묘했다. 솔직히 그들의 공통점을 찾아내려 기를 써야 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자세는 예외였다. 다른 어느 차, 다른 어느 브랜드보다 페라리는 과거에도 지금도 단순하고 즐거운 운전재미를 지키고 있다. 페라리가 처음 차를 만들 때 그랬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내 소망은 단 하나. 70년 뒤 우리 후손들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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