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티넨탈로 대표되는 링컨의 100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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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티넨탈로 대표되는 링컨의 100년 이야기
  • 오토카코리아 편집부
  • 승인 2016.11.30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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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코리아가 11월 30일 국내 시장에 올 뉴 링컨 컨티넨탈을 공식 론칭했다. 쇼케이스를 위해 특별히 방한한 링컨자동차의 쿠마 갈호트라(kumar Galhotra) 사장은 "새롭게 귀환한 링컨 컨티넨탈이 한국 고객들에게 인생의 즐거움을 더해주는 경험을 선사할 것"이라며 브랜드, 제품, 경험을 중시하는 링컨의 철학을 소개했다. 링컨을 대표하는 컨티넨탈은 2002년 9세대를 끝으로 단종되었다. 하지만 링컨은 2015년 뉴욕 모터쇼에서 컨티넨탈 콘셉트를 깜짝 공개하며 컨티넨탈을 14년만에 부활시킨다고 발표했다. 올해 1월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양산형 컨티넨탈이 공개되었고 11월의 마지막 날 한국 시장에 출시한 것이다. 국내에 소개되는 2017 올 뉴 링컨 컨티넨탈은 V6 3.0L GTDI393마력 엔진을 얹고 네 바퀴를 굴리는 AWD 방식을 채용했다. 리저브(8250만원)와 프레지덴셜(8940만원) 두 가지 트림으로 선보인다.   
 

링컨은 내년에 100주년을 맞는다. 링컨은 ‘아메리칸 럭셔리’를 상징하는 브랜드. 1917년 설립돼 1922년 포드에 편입 된 후 지금까지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그동안 미국 자동차 역사에는 수많은 브랜드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100년 가까이 이름을 지키고 있는 브랜드는 손에 꼽을 정도. 링컨이 지금껏 이름을 지키고 있는 것이 대단한 이유다. 링컨은 어떻게 100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는지 그 동안 걸어온 발자취를 살펴보기로 한다.
 

1922년 2월 4일 헨리 포드(왼쪽)와 헨리 리랜드(오른쪽)가 만나 링컨 인수 협정에 사인하고 있다

 

링컨의 역사는 1917년 헨리 리랜드(Henly Leland)가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면서 시작된다. 이름이 링컨인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으로부터 따왔기 때문. 헨리 리랜드는 링컨 대통령을 존경해 그 이름으로 미국 최고의 자동차 회사를 만들고자 했다. 헨리 리랜드는 링컨을 탄생시킨 장본인이지만 미국 자동차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캐딜락, GM, 링컨 등 미국 자동차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자동차 회사가 모두 리랜드 손에서 만들어졌다.
 

1922년 포드는 링컨을 자회사로 편입해 고급 브랜드로 키운다. 링컨은 1920년대부터 사람들에게 고급차로 인정받으며 이름을 날렸다. 1923년부터 링컨을 이끈 에드셀 포드(Edsel Ford) - 포드 창업주인 핸리 포드의 아들 - 는 하나의 섀시에서 여러 종류의 차를 만들며 링컨의 명성을 높였다. 대표적인 모델은 링컨 L시리즈로 만든 타운카. 에드셀 포드가 아버지 헨리 포드를 위해 만들었지만 반응이 좋아 판매를 시작했다. 여기서 타운카는 운전석이 외부에 노출되어 있고 승객석이 따로 분리돼 있던 차의 형태를 부르는 이름. 링컨 타운카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닌 지위를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1940년대 링컨 컨티넨탈 쿠페

1930년대에도 고급 브랜드로서 링컨의 명성은 계속 올라갔다. 하지만 이때 제퍼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현재 링컨이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만큼 제퍼는 링컨에 있어 큰 이익을 가져다준 모델이었다. 제퍼는 공기역학을 고려해 디자인한 유선형 차체의 4도어 세단이다. 이 시기는 링컨의 히트작 컨티넨탈이 나온 때이기도 하다. 컨티넨탈은 에드셀 포드가 파리를 방문 했을 때 다양한 유럽차에서 받은 느낌을 살려 만든 모델. 에드셀이 개발 과정 하나하나에 신경 쓴 결과 시장에서 대박이 났다. 컨티넨탈은 뉴욕 현대미술관으로부터 아름다운 디자인을 갖춘 차로 뽑힌 최초의 자동차다.
 

1956 링컨 컨티넨탈 마크Ⅱ

1950~1970년대는 링컨의 명성이 최고조에 올랐던 시기다. 링컨은 최신 기술과 앞서가는 디자인으로 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해 갔다. 1950년대는 링컨 프리미어가 대표적이다. 파워 스티어링, 파워 브레이크, 파워 윈도, 자동 시트 등 여러 최신 기술을 적용했다. 1961년에 나온 컨티넨탈 마크 IV는 시대를 앞서간 세단이었다. 당시 화려한 자동차가 인기를 끌었는데 컨티넨탈은 반대로 단순함과 정교함에 초점을 맞췄다. 컨티넨탈 마크 IV는 미국 산업디자인협회에서 올해의 디자인상을 받은 최초의 자동차로 기록돼 있다. 1970년대의 링컨은 다시 럭셔리를 추구했다. 지방시, 구찌, 까르띠에 등 유명 디자이너와의 협업으로 스페셜 에디션 링컨을 만들기도 했다. 그 결과 컨티넨탈 마크 IV 쿠페는 젊은 부유층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또한 링컨은 1974년에 최초로 자동차 뒷유리 서리방지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여전히 혁신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1960년대 링컨 컨티넨탈

1980~1990년대는 링컨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시기다. 1984년 컨티넨탈 마크 VII는 럭셔리 쿠페 부문에서 최고를 지켰고 다른 모델들의 판매도 순조로웠다. 이 시기에 링컨은 가장 큰 변화를 주기도 했다. 컨티넨탈 역사상 처음으로 앞바퀴굴림 모델을 내놓은 것이다. 1990년대는 미국 고급차 시장에 일본, 독일, 영국 등 다양한 브랜드가 진출하면서 경쟁이 치열했던 시기. 하지만 링컨은 타운카와 컨티넨탈 마크 VIII로 고급차 시장에서 굳건한 위치를 지켰다. 특히 1998년에는 럭셔리 SUV 내비게이터를 출시하며 다시 시대를 앞서갔다.
 

1970년대 링컨 컨티넨탈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링컨의 존재감이 많이 약해졌다. 이에 링컨은 브랜드 재정비에 나섰다. 링컨 디자인 스튜디오에 50여명의 각 전문가를 모아 링컨이 만든 전통과 현대를 잇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를 바탕으로 오랜 시간 링컨과 함께한 고객은 물론 새로운 고객에게 링컨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MK로 시작하는 단순한 작명법으로 라인업을 정리하고 젊은 층이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디자인을 내세웠다.


링컨의 찬란했던 역사에는 항상 컨티넨탈이 함께 있었다. 컨티넨탈의 부활은 링컨에게 중요하고 의미있는 행보다. 내년 100주년을 맞는 링컨이 컨티넨탈과 함께 예전의 모습을 되찾는다면 자동차 역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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