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보르기니 미우라와 아름다운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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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보르기니 미우라와 아름다운 여정
  •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 승인 2016.10.07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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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닥다리 이탈리아 속도계는 절대로 믿지 말아야 한다. 속도계는 시속 260km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람보르기니 미우라가 그런 속도로 달리고 있다고 믿을 만한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는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파르마까지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샛노란 SV 곁에는 이탈리아 경찰차가 따르고 있었다.
 

다행히 우라칸 경찰차를 몰고 있던 교통경찰은 온통 함박웃음을 띠고 있었다. 제한속도를 위반할까봐 매의 눈으로 지켜보기는커녕, 오히려 빨리 달리라고 부추겼다. 길가에는 수천 수만 군중이 이탈리아 깃발을 흔들며 스마트폰 셔터를 눌러댔다. 우리가 통행료를 내기 위해 속도를 늦추자 반대편 미니버스에서 고함이 터졌다. “비바, 람보르기니!”(람보르기니, 만세!).
 

이번 행사는 <미우라 투어>(Miura Tour) 창설 이벤트. 25대의 클래식 람보르기니가 4일간 북부 이탈리아를 일주하는 모험행진이었다. 여기에는 멀리 일본과 미국에서 날아온 미우라도 끼어있었다. 25대의 미우라라면 별로 많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상징적인 쿠페는 1966~1973년에 800대밖에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남아있는 차는 불과 400대에 불과하고, 이벤트에 참가하는 미우라의 일부는 그중 최고로 꼽힌다.
 

1966년 브뤼셀 모터쇼에서 오리지널 미우라가 첫선을 보였다. 그때 미우라는 세계에서 최고속 양산차로 이름을 날렸다. 라이벌인 페라리 275를 날려버렸고, 뒤따르던 재규어 E-타입에 매연을 뒤집어 씌웠다. 미우라는 미드십 V12 엔진을 갖춘 특별한 차였다. 당시 로드카로는 획기적이었다. 이탈리아 명문 베르토네의 보디를 입은 미우라는 높이가 겨우 1040mm 남짓이어서 입이 쩍 벌어지도록 늘씬했다.
 

한번쯤 미우라를 몰고 싶다는 것은 슈퍼카를 아는 오늘날 모든 사람의 소망이다. 람보르기니 창업자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미우라를 내놓고 자동차계에 일대 충격을 준 뒤 슈퍼카가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브레이크와 스티어링은 영 어울리지 않았고, 실내는 그대로 온실이었다. 게다가 그 안이 달아오를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람보르기니는 미우라에 2개의 냉각팬을 달았다. 그중 하나는 실내가 너무 뜨거워지면 루프의 스위치로 수동 조작해야하는 팬이었다.
 

따라서 나는 낙관적인 속도계가 아니라 수온계를 지켜보며 달렸다. 교통체증에 걸리면 즉시 갓길로 빠지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래서 우리를 에스코트하던 경찰은 교차로에서 우리 앞차를 옆으로 몰아내느라 진땀을 뺐다. 게다가 좌석을 조절할 방법이 없었다. 클러치 동작은 힘들었고, 모든 미우라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시끄러웠다. 도대체 어디서 매력을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나는 이 차를 38년 동안 갖고 있었다.” 런던에서 온 크리스 우드가 설명했다. “우리 숙모가 투자하라고 돈을 얼마쯤 줬고, 나는 그 돈으로 람보르기니를 샀다. 그러자 우리 가족이 나를 완전히 따돌렸다. 미우라는 아주 특별한 차다. 너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모든 미드십 슈퍼카의 청사진이었다. 나는 업그레이드한 E-타입도 갖고 있었다. 람보르기니는 내 아내였고, 재규어는 내 애인이었다.”
 

영국 체스터에서 온 이언 티렐은 클래식카 딜러. 그가 갖고 있는 ‘몇 대’의 미우라 중 한 대는 영화 <이탈리안 잡>의 오프닝 신에 등장했다. 그 차는 현재 300만파운드(약 45억8400만원)로 나왔다. “나는 10살 때부터 미우라광이었다.” 티렐의 말. “지나가는 V12 에스파다의 굉음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내가 처음 미우라를 몰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요즘의 미우라 엔진 사운드에도 끌린다. 그에 맞설 상대가 없었다. 시대를 멀리 앞서갔다.”
 

그 뒤 수십 년 간 미우라 값은 무풍지대에 갇혀있었으나, 최근 몇 년 사이에 갑자기 치솟았다. 람보르기니의 전반적 인기 상승을 반영했다. 복원작업을 하려면 80만파운드(약 12억2240만원)가 들어간다. 그리고 로드 스튜어트 경의 미우라는 120만파운드(약 18억3360만원)에 나왔다.
 

“미우라는 몰고 다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곪고 시들게 마련이다.” 티렐의 설명. “자산의 일종으로 차고에 갇혀 있을 기질이 아니다.”
 

이탈리아에서 클래식 페라리를 몰아보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미우라를 몰고 이탈리아를 돌아다니는 것은 꿈이다. 람보르기니는 그 드라이버를 명사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E-타입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힘이다. 페라리 250 GTO와 애스턴 마틴 DB5를 합친 것과 같다.
 

도쿄에서 미우라를 몰고 온 일본 오너도 내 바로 옆에서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때 언어는 중요치 않았다. 그는 엄지를 추켜세우고 빙그레 웃었다. 마치 처음으로 람보르기니 V12 사운드를 들은 10살짜리와 같았다.
 

미우라 디자인총책, 지안 파울로 달라라를 만나다!

지안 파울로 달라라는 눈물이 글썽했다. 이탈리아인들의 자동차에 대한 열정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면 람보르기니 미우라의 오리지널 디자인총책과 5분만 대화를 가져보라. 그러면 모든 의심이 싹 가시고 말 것이다.
 

달라라는 봅 월리스+ 파울로 스탄자니와 함께 미우라 개발에 총력을 다했다. 1960년대 초 젊은 디자이너로 짜여진 달라라팀은 밤늦도록 P400 프로토타입 작업에 몰두했다. 나지막한 보디는 베르토네의 거장 마르첼로 간디니가 다듬었다.
 

“우리는 아직 풋내기에다 이상에 빠져있었고, 높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달라라의 회고담. “창업자 람보르기니는 우리 디자인에 큰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들고 나온 디자인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급진적이었다.”
 

뒤이어 달라라(79세)는 프랭크 윌리엄즈(F1 윌리엄즈팀의 오너)를 위해 경주차를 만들었다. 그 회사는 F1과 인디카의 섀시 디자인이 전문이었다. 우리가 만났던 파르마 교외의 한 건물에서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다.
 

“미우라는 누구나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 차다. 무엇보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젊어보인다는 사실이 인상적이다. 미우라의 브레이크와 스티어링은 최신형과는 도저히 경쟁할 수 없지만 스타일은 짜릿하다.”
 

달라라에 따르면 디자인팀은 미드십 레이아웃을 완성하기 위해 또 다른 시도를 했다. 4기통 미니 엔진을 뒤쪽에 달고 시험했다.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주 많았다. 특히 캠샤프트를 처리하기 어려웠다. 솔직히 미우라는 1966년 시장에 나갈 준비를 마치지 않았다. 하지만 고객들은 이미 받아들일 채비를 마쳤다. 그래서 람보르기니는 생산개시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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