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키퍼는 모터스포츠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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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키퍼는 모터스포츠의 역사다
  • 안민희 에디터
  • 승인 2016.08.17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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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를 쌓아올린 다양한 시도 중 ‘시간의 규정’은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단순히 해가 뜨고 지는 것에서 벗어나, 시간이라는 개념을 만들면서 인류는 과학의 바다에 더 깊게 빠져들었다. 더 나아가 자동차의 등장과 함께 시간은 우열을 가리는 도구가 됐다. 자동차만 만나면 대부분의 것들이 경쟁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 역시 자동차란 묘한 기계다.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정확한 시간을 알기 위해 애써왔다. 시계로 유명한 스위스 바젤의 대학교에 가면 기원전 1,500년 전 만들어진 이집트인의 해시계가 있다. 이후 물시계, 모래시계, 양초시계 등 다양한 시계들이 등장했지만, 일정한 시간을 파악하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톱니바퀴와 태엽을 이용한 기계식 시계의 등장은 14세기. 초기에는 기계식 시계 또한 한계가 있었으나 밸런스 휠, 밸런스 스프링, 이스케이프먼트를 적용하는 등 개량을 거치며 기계식 시계는 오랜 시간 동안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반면 자동차의 등장은 증기차(증기의 힘으로 작동하는 엔진)를 포함해도 18세기다. 연소 방식 엔진을 처음으로 도입한 벤츠 파텐트-모터바겐(Patent Motorwagen)의 등장이 1886년. 자동차를 만들고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자동차 경주다. 국제적 자동차 경주의 시작이 모터바겐의 등장 8년 만에 열렸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자동차 경주의 시작은 1894년. 프랑스 신문이 파리(Paris)부터 루앙(Rouen)까지 달리는 자동차 경주를 개최한 것을 시초로 본다. 이후 1900년 열린 고돈 베네트 컵(Gordon Bennett Cup)은 국가대항전의 성격을 띄었다. 파리에서 새벽 3시 정각에 출발해 루앙까지 약 126km의 거리를 달리는 경주였다.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의 자동차 선수들이 참여했고, 각 나라마다 다른 색깔을 칠해 구분하기로 했다. 지금 각 나라가 자동차에 칠하는 ‘레이싱 컬러’를 처음으로 적용한 것.
 

국가전이 된 모터스포츠는 빠르게 성장을 거듭했다. 자동차라는 신기한 기계가 달리는 것이 흥미를 돋군데다 국가별 경쟁의식을 자극했기 때문. 이후 자동차 경주의 흥행에 따라 영국의 브루클랜즈, 이탈리아의 몬자, 독일의 뉘르부르크링, 벨기에의 스파프랑코샹, 미국의 인디애나폴리스 등 여러 서킷이 생겼다. 점점 경쟁은 치열해졌고, 그만큼 정확한 시간 계측이 필요해졌다.
 

지금이야 정확성 뛰어난 전자시계가 있지만, 19세기 초의 시간 계측 방법은 기계식 시계가 전부였다. 전략을 위해 스톱워치를 들고 시간을 재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어느 차가 더 빨리 통과했는지만의 문제가 아닌, 예선에서 얼마나 빠른 랩을 기록했는지도 중요했다. 그만큼 오차 적고 세밀한 시간 측정이 요구됐다. 1/10초 계측에서 1/100초로 계측의 필요 범주가 늘어났다.
 

그래서 세밀한 시간을 잴 수 있도록 시계는 더욱 정밀해졌다. 자동차 대회가 요구하는 정밀성을 갖춘 공식 시간 측정사인 타임 키퍼가 된다는 것은 품질이 뛰어나다는 증거. 때문에 타임 키퍼가 된다는 것은 기계식 시계 제조사들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었다. 따라서 시계 브랜드 대부분이 자동차 경주를 포함한 정밀 시간 계측이 필요한 스포츠를 후원하게 되었다.
 

자동차의 등장은 시계의 등장보다 늦었지만 그 발전 속도는 시계를 아득히 추월했다. 1950년대는 자동차 경주가 정점을 향하는 시대. 최초의 포뮬러 1(F1)이 시작됐다. 수동, 기계식 스톱워치를 사용해 팀 및 각 선수를 추적하는 시간 계측 전문가도 등장했다. 이때는 데이터 분석을 위해 곳곳에 스톱워치를 들고 서서 구간별 시간을 측정하는 방식이었다.
 

호이어(Heuer)사가 페라리, 로터스, 란치아, 마세라티 등 명문팀에 기계식 크로노그래프 시계를 제공하면서 모터스포츠 부문에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됐다. 반면 또 다른 명문 제조사인 롤렉스의 경우 당시 미국에 좀 더 관심을 쏟았다. 미국의 데이토나 스피드웨이에서 이름을 따온 데이토나 라인업이 있는 이유다.
 

이때의 기계식 크로노그래프 계측은 최선이었지만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천분의 일초를 가르는 승부에서, 즉시 정확한 자료를 뽑아내기 어려웠기 때문. 1971년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는 재키 아이크스와 크리스 아몬의 폴 포지션을 둔 해프닝이 생겼다. 재키 아이크스가 예선 1위로 폴 포지션을 차지한 것으로 언론은 보도했지만, 정밀 계측 결과 크리스 아몬이 앞선 것. 결국 본선에서 크리스 아몬이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조정이 됐다. 본선은 더욱 드라마틱했다. 1971년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1등부터 5등까지의 시간 격차는 단 0.061초에 불과했다.
 

이후 정밀 시간 계측 방법을 영원히 바꿔버릴 사건이 일어난다. 컴퓨터와 무선 통신의 보급이다. 움직이는 어떤 물체보다 빠른 무선 신호를 이용하면서 더욱 정밀한 계측이 가능해졌고, 컴퓨터는 수많은 정보를 순식간에 분석 가능해졌다. 태그호이어는 이를 이용한 ACIT 시스템을 개발해 F1에 도입했다. 자동차량 인식 기능으로, 자동차에 작은 송신기를 달아 고유 주파수를 보내는 것.
 

트랙 곳곳 지정된 위치에 놓인 수신기에서 주파수를 받는 방식이었다. 주파수를 받아 작동한다는 점에서 라디오와 비슷한 방식이다. 각 차마다 전용 신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1000분의 1초까지 우열을 가릴 수 있게 됐다. ACIT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자동차 경주의 공식 계측 시스템은 모두 ACIT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더 이상 기계식 시계의 성능을 과시하는 자리가 아니게 됐다. 오히려 전파 기술을 자랑하는 자리가 됐다.
 

따라서 지금의 모든 자동차 경주는 컴퓨터와 무선 통신을 통한 디지털 정보 전송, 처리 기술로 시간을 계측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전통의 시계 제조사 등이 타임 키퍼를 맡는다 하더라도, 이는 실제로 그들의 기술을 시간 계측에 쓴다고 단언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타임 키퍼는 경주의 후원자로 봐야 한다. 현재 르망 24시, WEC, 포뮬러 E 등의 대부분의 경주는 모터스포츠 전문 시간 계측사인 알카멜 시스템이 관리하고 있다. F1 또한 마찬가지다. 타임 키퍼 브랜드를 따로 두고 있지만 이는 상징적인 의미에 가깝다. 계측 시스템 구조가 같기 때문.
 

지금의 자동차 경주 시간 계측 방법은 각 경주차로부터 데이터를 받는 방식. 과거의 방식이 라디오와 비슷했다면, 지금의 방식은 스마트폰과 비슷하다. 스마트폰에서 무선망에 접속, 데이터 통신을 하는 것과 비슷해서다. 경주차마다 데이터 통신 장비를 달고, 트랙 곳곳에 안테나를 펼쳐 각 차가 보내는 신호를 받아 처리하는 것. 이를 위해 대규모 와이파이 시스템 또한 동원된다. 각 경주차마다 유심카드가 들어있는 것과 같다.
 

이를 통해 수집된 데이터는 프로그램을 거쳐 경주차의 움직임을 실시간화하는데 쓰인다. 더불어 GPS를 사용하게 되면서 더욱 정교한 위치 추적을 보완할 수 있게 됐다. 또한 경주차에 컴퓨터가 사용되게 되고, 데이터를 무선으로 교환할 수 있게 되며 계측 정보의 영역은 더욱 넓어졌다.
 

단순히 경주차의 속도, 랩 타임만을 실시간으로 계측하는 것이 아닌, 경주차가 어떻게 달리는지, 경주의 흐름은 어떤지 알 수 있게 된 것. 다양한 정보를 순식간에 취합하게 되자 전략의 방식도 달라졌다. 프로그램을 통해 피트스톱을 언제 할 것인지, 어느 정도의 속도를 유지해야 앞 차를 추월할 수 있는지 파악할 수 있게 됐다.
 

현재 F1의 공식 타임 키퍼는 롤렉스지만, 2008년부터 2013년까지 LG가 F1의 공식 타임 키퍼를 맡았다.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당시 LG가 맡은 일은 F1의 공식 타임 키퍼이자 TV 방송을 위한 데이터 관리자로써, LG의 정보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흔히 시계 제조사하면 떠올리는 기계식 시계는 이제 자동차 경주에서 자취를 감췄다. 드라이버의 손목에서만 빛날 뿐, 계측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환상과 실제가 다르듯이 말이다. 하지만 기계식 시계가 모터스포츠의 발전에 공헌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모터스포츠와 함께한 긴 역사를 바탕으로, 지금은 정밀하고 공정한 판정을 상징하는 의미로 시계 제조사는 여전히 모터스포츠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호이어 AG가 전신. 자동차와의 관계를 뺄 수 없는 시계 브랜드 중 하나다. 1911년부터 자동차 대시보드에 달려, 세계 최초의 대시보드 시계가 되었다. 이후 호이어는 계속 자동차와 항공용 시계를 만들며, F1 등을 비롯한 모터스포츠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행보에 힘입어 자동차 레이서들에게 인기 있는 시계로 자리잡는다.
 

1985년 TAG 그룹에 속하게 되면서 태그 호이어란 이름을 얻었다. 본사인 TAG 그룹 또한 모터스포츠에서 뼈가 굵은 기업. 맥라렌의 일정 지분을 갖고 있고, 엔진 공급자로 맥라렌과 손을 잡아 F1 우승을 거두는 등 혁혁한 실적을 올렸다. 태그 호이어는 1992년부터 12년간 F1 공식 타임 키퍼였고, 포뮬러 E와는 2013년 공식 타임키퍼 계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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