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혜의 영화와 자동차> 리턴 투 센더 - 사브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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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의 영화와 자동차> 리턴 투 센더 - 사브 93
  • 신지혜
  • 승인 2016.05.20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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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란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그녀. 시간에 쫓기거나 해야 할 일을 잊거나 미루는 일도 없이 완벽에 가깝게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그녀. 날씬하고 예쁜 얼굴에 능력 있는 간호사인 미란다는 이제 곧 바라고 바라던 수술실로 가게 된 데다 동료의 소개로 소개팅을 앞두고 있고 마음에 꼭 드는 새 집으로의 이사까지 하게 되어 모든 것이 마음에 흡족한 상태다.

그런데 순간의 미묘한 착각이 미란다의 삶을 비틀어버린다. 그녀를 짝사랑하던 남자를 소개팅 하러 온 남자로 착각하고 집에 들인 순간 미란다는 남자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트라우마를 입게 된 것이다. 남자는 곧 체포되어 수감되지만 그때부터 미란다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미란다는 다른 사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하는데 바로 자신에게 상해를 입힌 그 남자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계속 반송되어 오는 편지를 보면서도 미란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꾸준히 편지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답장이 날아들고 이제 그녀는 자신의 매력을 한껏 과시할 수 있는 옷차림을 하고 남자에게 면회를 가기 시작한다.

미란다가 타는 차는 사브 93.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수감되어 있는 남자를 만나러 갈 때도 그녀는 사브를 몰고 간다. 검은 선글라스를 써 자신의 눈동자를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하고 자신의 사브 안에서 잠시 무언가를 응시하고 생각과 태도를 정리한 후 드디어 발걸음을 뗀다.

미란다는 아마도 그 차를 타고 많은 걸 했을 것이다. 물론 병원으로 출퇴근을 했을 것이고 친구들의 생일을 비롯해 모임이 있을 때면 정성껏 만든 케이크를 사브에 싣고 친구들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아버지 집에 갈 때도, 아버지가 기르는 개에게 줄 먹이를 가져갈 때도 미란다는 언제나 사브와 함께였다.
 

미란다는 아마도 그 차를 타고 많은 걸 생각하고 계획하고 실행했을 것이다. 차에서 내리기 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표정을 얼굴에 새기기에 자동차라는 공간은 얼마나 유용한가. 자신에게 필요한 (혹은 자신의 계획에 필요한) 무언가를 싣고 운반하기에 또한 자동차라는 수단은 얼마나 유용한가.

혼자만의 공간, 혼자만의 마음을 아무런 제재 없이 제약 없이 흐르도록 내버려둘 수 있는 공간, 혼자만이 알고 있는 무언가를 가감 없이 쏟아낼 수 있는 공간. 미란다에게 사브는 아마도 그 이상의 공간이며 수단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일찌감치 눈치채게 된다. 그녀의 결벽증, 그녀의 완벽함, 그녀의 철저함이 표정과 태도와 생활에서 흘러넘칠 때 그녀, 미란다가 만만하거나 평범하거나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표정 하나,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입꼬리만 활짝 웃을 때, 상대를 쳐다보는 검은 눈동자가 마치 상대의 영혼을 사로잡을 듯 깊숙하게 들어갈 때, 어릴 때 천식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를 할 때, 아버지의 개에게 느닷없지만 교묘한 친절함으로 먹이를 줄 때, 사브에 앉아 전혀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녀, 미란다가 어쩌면 거대하고 엄청나게 강한 무엇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영화가 끝난 뒤에 아마 미란다의 사브 93은 더 많은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바로 그 지점을 향해 철저하고도 완벽하게 선행되고 통제되어진 미란다의 계획이 마무리되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미란다의 사브는 지금까지보다 더 큰 일을 함께 수행함으로써 미란다의 일을 마무리 지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문득 미란다의 사브가 어떤 느낌이나 생각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름답고 밝게 빛나는 미란다이지만 그 이면에 찰싹 붙어 있는 무섭도록 강인한 그것을 오직 사브만은 알고 있었을 텐데, 그렇다면 사브는 미란다를 두려워했을까, 아니면 동정과 연민을 느끼고 그녀의 생각과 계획에 기꺼이 동참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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