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슈퍼 스포츠카, 폭스바겐 골프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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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슈퍼 스포츠카, 폭스바겐 골프 R
  • 임재현 에디터
  • 승인 2015.09.2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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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I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슈퍼 골프. 골프라는 틀 속에서 최고의 성능을 이끌어냈다

폭스바겐 골프는 다른 자동차회사들이 신차를 개발하면서 반드시 참고하는 벤치마킹 대상으로, 흔히 ‘해치백의 교과서’라고 불린다. 특이한 것은, 실용적인 대중 자동차의 필두이면서 운전을 즐기는 사람들의 마음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실용성과 운전의 재미 사이에서 뛰어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골프의 매력이다.

이번에는 300마력짜리 골프다. 고성능 골프의 시조이자 모든 핫 해치의 조상인 1세대 골프 GTI가 세상에 처음 등장한 것이 지난 1975년. 40년 동안 엔진의 힘은 세 배로 껑충 뛰어올랐다. 국내 베스트셀러인 골프 2.0 TDI와 비교하면 최고출력이 정확히 두 배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가속하는 데 4.9초가 걸린다고 한다. 4.9초라는 숫자가 감이 안 온다고? 포르쉐 박스터 S보다 빠르고, 박스터 GTS와 같은 가속시간이다. 이제는 정말 ‘서민의 포르쉐’라고 불러도 되는 수준이 됐다.

독일차의 재밌는 점은 차종 하나에 매우 다양한 엔진을 넣는다는 점이다. 일례로 메르세데스-벤츠 E클래스의 경우, 엔트리 모델은 E 200 블루텍이고, 라인업 꼭대기에는 E 63 AMG S 4매틱이 있다(모두 국내 미출시). 이 두 모델은 실린더 수는 2배, 배기량은 2.5배, 최고출력은 4.3배, 연료는 디젤과 휘발유, 구동방식은 뒷바퀴굴림과 네바퀴굴림, 가격은 3배로 큰 차이가 있다.
 

골프도 마찬가지다. 독일에서 판매되는 엔트리 모델은 1.2 TSI 85마력 5단 수동변속기 사양. 골프 R은 이보다 3.5배나 강력하다. 골프 2.0 TDI가 스펙에 비해 차체가 견고하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부터 고출력 엔진 탑재를 염두에 두고 꼼꼼하게 골격을 만들어뒀기 때문이다.

현재(8월 말) 골프 R의 국내 판매가격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독일 현지 기본가격(이른바 ‘깡통’ 가격)은 4만950유로(약 5천200만원)부터다. (앞서 ‘서민의 포르쉐’라고 말한 걸 취소해야 할 것 같다) 골프 GTI보다 약 30% 높은 가격이다(독일 기준).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골프는 GTI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골프 R은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두말할 나위 없이 GTI보다 빠를 것이다. 그런데 가격 차이만큼 빠를까? 솔직히 5천만원이 넘는 골프에 ‘가성비’를 기대하긴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7세대 골프에는 어딘가 건실한 직장인의 이미지가 있다. 골프 R도 마찬가지다. 지면에 착 달라붙은 자세와 휠 하우스를 가득 채운 19인치 5스포크 휠(콤팩트한 차 크기와 편평비가 낮은 타이어 탓인지 20인치는 되어 보인다), 4개의 테일파이프가 눈길을 끌긴 하지만, 수수하고 점잖게 생긴 게 영락없는 골프다. 그나마 시승차는 화려한 새파란 색(라피즈 블루 메탈릭)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차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은 이 차가 300마력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날라리 같은 동급 핫 해치들에 비하면 조금 소극적인 인상이긴 하다. 하지만 높은 잠재력을 수수한 외모로 숨긴 어른스러운 모습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찬찬히 살펴보면, 일반 골프는 물론이고 GTI와도 다른 부분이 많다. 헤드램프는 얼핏 봐선 똑같지만, 다른 모델들과는 달리 U자형 LED 주간 주행등이 한쪽에 2개씩 달렸고, 방향지시등도 LED다. 테일램프는 GTI/GTD와 같은 디자인이지만, 빨간 부분을 어둡게 처리한 것이 다르다. 앞뒤 범퍼와 함께 사이드 스커트도 R 전용 부품이다.
 

어두운 색조의 실내공간은 금속장식과 파란색 포인트가 어우러져 간결하고 차분한 분위기다. 카본파이버 무늬를 낸 가죽이 이색적. ‘나파 카본’이라는 이름의 가죽 패키지인데, 독일에선 2천730유로(약 347만원)짜리 선택품목이다. 운전석은 국내 시판 골프 모델 가운데 유일하게 전동식이고(메모리 기능은 없다), 속도계는 시속 320km까지 표시되어 있다.

시동 버튼을 누르면 GTI와는 확연히 다른 박력 있는 소리를 토해낸다. GTI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자기 능력을 표현하며 전투의지를 드러낸다. 엔진은 직렬 4기통 2.0L 직분사 터보 휘발유. GTI와 같은 3세대 EA888 엔진을 바탕으로 실린더 헤드, 피스톤, 연료분사장치, 터보차저 등을 튜닝하거나 새로 설계했다. 
 

골프 R 버전의 EA888은 최고출력 300마력, 최대토크 38.8kg·m을 발휘한다. 360마력을 내뿜는 새끼고지라 A 45 AMG 4매틱도 있으니,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수치는 아니다. 그보단 매우 폭넓은 영역에서 높은 토크를 유지하는 것이 특징. 1,800rpm부터 5,500rpm까지 최대토크, 5,500rpm부터 6,200rpm까지 최고출력을 낸다. 즉 모든 영역에 걸쳐 최고의 성능을 발휘하는 셈이다.

최신 소형 터보 엔진은 터보래그가 줄어들어 직선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대신 터보 엔진 특유의 과격함과 화끈함이 예전보다 옅어진 측면이 있다. ‘꽝 터보’라고 불렀던 과거의 터보 엔진에 비해 세련되고 다루기는 쉬워졌지만, 그만큼 좀 밋밋해진 것도 사실. 이는 골프 R도 마찬가지다. 2.0L 엔진치고 엄청난 출력을 내면서도 광적인 기질은 없다. 그런데 무척 빠르다.
 

가속페달을 꾹 밟는 순간 두툼한 토크가 밀려오고 회전한계까지 단숨에 치닫는다. 골프 R은 최신 5세대 할덱스 커플링 방식(전자제어 유압식 다판 클러치)의 네바퀴굴림. 필요에 따라 동력을 앞뒤 100:1에서 0:100까지 자유자재로 배분한다. 정지 상태에서의 발진은 앞바퀴굴림인 GTI와 가장 큰 차이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론치 컨트롤을 쓰면 뒤쪽으로 구동력이 전달되며 땅을 박차고 나간다. GTI의 경우 발진할 때 전자 장비가 효과적으로 슬립을 억제하지만, 그 결과 걷어차는 힘은 아무래도 약해지는 경향이 있다. 반면, 골프 R은 네바퀴굴림 차 특유의 로켓 스타트가 인상적이다.
 

엔진과 짝을 이룬 6단 듀얼클러치 변속기(DSG)는 변함없이 선명하고 매끄럽다. 빠른 변속시간과 회전수 보상 기능은 눈부실 만큼 뛰어나다. 시프트업은 0.03초 만에 끝낸다고 하니, 아무리 실력이 좋은 드라이버라도 이길 수 없는 속도다. 스로틀을 활짝 열면, 시속 50, 90, 130, 165km에서 각각 2, 3, 4, 5단으로 변속하며 맹렬히 가속한다.

주행모드(드라이빙 프로파일 셀렉션)는 에코·노말·레이스·인디비주얼로 네 가지. 주행모드에 따라 엔진과 변속기, 스티어링 세팅이 바뀐다. 승차감에는 변화가 없고, 인디비주얼 메뉴에선 헤드램프 동작 속도마저 골라둘 수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GTI의 스포츠 모드를 대신한 레이스 모드. 노말 다음에 갑자기 레이스라니 R 모델답다. 그런데 주행모드 변경이 매우 번거롭다. 주행모드를 바꾸려면 모드 버튼을 여러 번 누르거나, 버튼을 눌러 주행모드 화면을 띄운 뒤 터치해서 선택해야 하는 식이다.

성가신 과정을 거쳐 레이스 모드에 들어가면, 곧바로 엔진 소리가 바뀐다. 앞 유리 아래쪽의 사운드 액추에이터가 엔진 소리를 키워 실내로 유입시킨다. 다소 인공적인 느낌이긴 한데, 주행의 강렬함에는 제법 잘 어울리는 소리다. 스티어링은 조금 밋밋하기는 하지만 묵직하고 정교하다. 총 회전수(로크 투 로크)는 2.1회전으로, 조작할 때 날카롭고 공격적인 느낌을 준다.
 

속도를 높여 코너에 진입하면 처음에는 약간 언더스티어 반응을 보이는데, 이때 조금 더 과감하게 밀어붙이면 안쪽으로 확 말려들며 노면을 움켜쥐고 돌아간다. 최근 “레일 위를 달리듯”이란 표현을 남발하는 경향이 있지만, 골프 R은 정말로 레일을 타고 돌아가는 듯하다. GTI의 코너링 성능도 뛰어나지만, R은 그 수준을 넘어선다.

ESC 버튼을 한번 누르면 ESC 제한 상태가 되고, 3초간 누르고 있으면 완전히 해제할 수도 있다. 마른 노면에서 ESC를 완전히 끄고 몰아붙여보면, 타이어 스키드음만 요란해질 뿐 움직임 자체에는 큰 차이가 없다. 골프 R의 운동성능이 소프트웨어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하드웨어로 만들어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눈길에서 ESC를 끄면 신나는 주행이 가능하리라 짐작된다.
 

코너링 한계에서의 거동 변화가 완만하고 매우 안정적이기 때문에 조금도 불안하지 않다. 시승 전에는 재미가 부족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조금 무리다 싶을 정도로 내던져도 잘 받아주기 때문에 스로틀을 더 열어보는 과감한 시도도 해볼 수 있었다. 골프 R의 한계는 예상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다.

추측컨대 혼다 시빅 타입 R 같은 아주 날카로운 해치백보다는 흥미진진함이 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나 쉽게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재미를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유일하게 아쉬운 부분은 배기사운드다. GTI보다 훨씬 풍성한 소리를 들려준다는 점은 만족스럽다. 잠시 소리에 취해 있다 보면 어느새 제한속도를 훌쩍 넘기게 된다. 하지만 과거 VR6나 R32 같은 6기통 선배들이 냈던 영광스런 사운드와 비교하면 음색이 평범하다.

한바탕 레이스 모드에서 뛰고 에코 모드로 바꾸면 실내가 조용해진다. 배기사운드는 에코 모드에서도 건재하지만, 서킷을 돌고 피트에 들어서는 듯한 여유로운 기분이 된다.
 

에코 모드에선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는 즉시 DSG가 중립에 들어가 공회전 수준까지 엔진회전수를 떨어뜨린다. 일반 골프와 같은 감각이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골프 R의 진면목인지도 모른다. 스포츠카 뺨치는 성능을 내면서 패밀리 해치백의 모든 혜택도 고스란히 누릴 수 있다.

골프 R은 데이트에도, 가족여행에도, 트랙 데이에도 가져갈 수 있는 차다. 오른발에 힘을 주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강력한 엔진을 품고 있지만, 평소에는 송곳니의 존재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고성능 모델을 다루기 위해서 운전자가 어느 정도 기량을 갖춰야 한다는 것은 옛날이야기다. 골프 R은 누구나 쉽게 스피드를 즐길 수 있는 성능과 실용성을 겸비한 신종 슈퍼 스포츠카다.

글 · 임재현 에디터 (jlim@iautocar.co.kr)
사진 · 김동균 (paragur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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