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혜의 영화와 자동차] 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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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의 영화와 자동차] 화장
  • 신지혜
  • 승인 2015.06.08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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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무의 K7, 추대리의 쏘울

아마도 그는 젊은 시절부터 실패나 큰 실수가 없었을 것이다. 언제나 단정하고 깍듯하고 능력 있고 인망 있는 오정석 상무. 아마도 그는 젊은 시절부터 누군가들에게서 존중과 신망을 받아왔을 것이다. 너스레를 떠는 성격도 아니고 까탈스러운 것도 아니고 언제나 돌아보면 듬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처럼 오정석 상무는 자기 자리를 늘 잘 지키고 있는,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지금의 오 상무가 있게끔 물심양면 힘이 되고 기반이 되어주었던 아내의 암이 재발하고 딸과 사위는 아무 대책 없이 타국에서 터를 잡겠다고 떠났다가 여의치 않자 불쑥 집에 들어와 버린다. 언제나 청춘일 줄 알았던 육신은 시간의 흐름을 좇아 민망한 노화현상이 생기는데, 경력직으로 입사한 추은주 대리의 싱그러움은 그만 그의 마음을 건드리고야 만다.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평생을 함께해 온 아내의 사그라지는 육체의 고통과 제어할 수 없는 육체의 비루함은 오 상무의 마음을 짓누르지만 그는 연민인지 정인지 모를 마음으로 아내의 병수발을 든다. 아무런 불평도 없이 아무런 동요도 없이. 그런 그를 향해 아내는 날카로운 육감으로 “내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지?”라고 묻는다.

이제 막 회사 동료로 알게 된 추 대리의 싱그러운 육체와 활기와 당당한 미소와 자존감을 풍기며 발휘되는 능력은 오 상무의 마음을 설레게 하지만 그는 적당한 거리와 예의로 추 대리를 대한다. 아무런 내색 없이 아무런 동요도 없이. 그런 그를 향해 추 대리는 어렴풋하지만 확실한 육감으로 단단한 시선을 그에게 꽂는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화장>은 그렇게 삶과 죽음, 젊음과 노쇠, 욕망과 절제, 환상과 현실, 의무와 도피, 책임과 무책임 사이에서 방황하는 오 상무의 내면과 행동을 통해 火葬과 化粧 사이를 넘나든다.
 

오 상무의 아내가 쓰러졌을 때 그리고 평소 오 상무가 타는 차는 기아 K7. 탄탄한 중견 화장품 회사의 중역이 타기에 괜찮은 차다. 화려한 외관도 아니고 슈퍼카가 아닌, 실용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강인함이 슬쩍 느껴지는 이 차는 오 상무의 인생과도 닮아 있는 듯하다. 군더더기 없고 남들에게 싫은 소리 듣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온 품성이 느껴지는 오 상무는 딱 이런 차를 탈 것 같다.

오 상무의 기아 K7은 아마도 아내와 그의 기억을 담고 있을 것이다. 수년 전 아내에게 발병한 암과 그 투병생활과 이제는 암이 떨어져 나갔구나 싶어 안도했을 마음과 이후의 삶과 재발까지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을 것이다. 긴 시간은 아니겠지만 오 상무의 현재 수년의 시간과 기억과 삶을 담은 차인 것이다.

추 대리가 타는 차는 기아 쏘울. 하얀 바디에 빨간 지붕을 얹은 그 차는 딱 추 대리 같다. 신선하고 상큼한 그러면서도 단단한 시선에 담긴 무언가는 흰 바디와 붉은 지붕을 고스란히 옮겨다 놓은 것 같다. 추 대리의 기아 쏘울은 영화의 종반부, 그녀가 오 상무의 별장을 찾아올 때도 등장하는데 순수함과 딱 붙어 있는 위태한 욕망을 담고 온 그녀의 쏘울은 결국 오 상무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다.

원작의 훌륭함과 시나리오의 탄탄함, 감독의 연출과 배우들의 긴 호흡이 아귀를 딱 맞추며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글 · 신지혜 (시네마토커, CBS-FM [신지혜의 영화음악] 제작 및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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