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혜의 영화와 자동차] 세인트 빈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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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의 영화와 자동차] 세인트 빈센트
  • 신지혜
  • 승인 2015.04.2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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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이슬러 레바론 컨버터블

빈센트. 나이 든 심술쟁이 아저씨의 전형적인 모습. 혼자 살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왕래도 귀찮고 언제나 술병을 끼고 사는 평범하고 진부하다 못해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한 쇠락한 모습.

아마도 엄마와 둘이 빈센트의 옆집으로 이사 온 올리버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런 수준이었을 것이다. 이삿짐을 나르던 두 사람이 빈센트의 나무를 부러뜨리지 않았더라면, 그 나무가 빈센트의 크라이슬러 레바론 컨버터블을 덮치지 않았더라면 아마 서로 엮이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살아갔을 두 사람, 빈센트와 올리버의 첫 만남은 그렇게 유쾌하지 않고 일상적이지 않은 만남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이 두 사람을 꽁꽁 묶어놓는다.

경마와 알코올에 찌는 노친네인 줄로만 알았던 빈센트는 알고 보니 전장의 영웅이었고, 알고 보니 치매에 걸려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사랑하는 아내를 최고급 요양원에 데려다놓고 지극정성을 쏟는 로맨티스트였고, 알고 보니 임신한 스트리퍼 다카를 편견 없이 대하며 보살피고 있는 인정 많은 사람이었고, 알고 보니 올리버에게 자신을 방어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는 강인한 남자였다.

올리버도 만만치 않다. 연약하고 나약하며 부모의 이혼으로 의기소침한 듯 보이는 올리버는 알고 보니 이혼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친부모가 아니지만 두 사람 모두 올리버를 진정 사랑하여 양육권을 위해 다투고 있고 비록 자기를 괴롭히던 친구일지라도 친구가 되고자 손을 내밀 줄 아는 따뜻한 아이이며 언제나 어느 상황에서나 예의 바른 말투와 몸가짐을 갖는 반듯한 소년이었다.

이런 좋은 파장(가까이 가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직접 느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올리버의 엄마 매기, 밤의 여인 다카, 이제는 지난 시절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빈센트의 아내 등등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잔뜩 가지고 있다. 그 이야기들이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첫인상으로 뭉쳐진 겉모습을 하나씩 벗겨내며 서서히 감동의 엔딩으로 모아진다.

그렇다고 영화가 억지스러운 감동에 젖어 있거나 질펀한 감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말하는 ‘우리 주위의 영웅, 세인트’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한 계단 한 계단을 아주 잘 쌓아올린 균형미와 견고미가 돋보이는 영화다.
 

빈센트의 낡은 자동차는 크라이슬러 레바론 컨버터블. 영화의 첫 장면부터 빈센트는 이 차를 엄청나게 타고 돌아다닌다. 차가 있어야 이동이 용이한 뉴욕 브룩클린답게 빈센트는 어디를 가든지 크라이슬러와 함께한다. 아마도 그가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부터 이 차는 두 사람의 삶에 깊이 관여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치매에 걸린 아내는 자동차에 대한 기억도 고스란히 무의식에 저장한 채 최고급 요양원에 가 있는 것일 테고 이제 홀로 남은 빈센트는 올리버를 데리고 다카를 데리고 그들이 빈센트를 필요로 할 때마다 크라이슬러에 올라타고 브룩클린을 누빈다.

빈센트에게 크라이슬러 레바론은 그의 삶의 축적이며 새롭게 그의 삶에 들어와 의사 가족이 되어주는 사람들과 또다시 시작하는 시간의 증인이며 빈센트와 사람들을 이어주는 더없이 훌륭한 공간이다. 그만큼 빈센트의 삶에 관여했으니 크라이슬러 레바론 컨버터블은 빈센트의 오랜 친구라 해도 되지 않을까.

글 · 신지혜 (시네마토커, CBS-FM [신지혜의 영화음악] 제작 및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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