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스탱 탄생 50주년, 반세기를 달려온 야생마의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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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탱 탄생 50주년, 반세기를 달려온 야생마의 궤적
  • 임재현 에디터
  • 승인 2015.04.17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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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들어 미국 자동차시장은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출생한 베이비붐 세대가 대거 신차 시장으로 유입되면서 엄청난 수의 젊은 소비층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비싸지 않으면서 새롭고 특별한 차를 원했다. 포드 사업본부장 리 아이어코카(Lee Iacocca)는 이러한 추세를 반영해 베이비붐 세대를 겨냥한 새로운 모델 개발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포드 회장 헨리 포드 2세의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포드는 야심차게 선보인 신규 브랜드 에드셀(Edsel)이 론칭 27개월 만에 3억5천만 달러(현재 화폐가치로 약 3조772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손실을 기록하며 실패한 직후였다. 헨리 포드 2세는 검증되지 않은 신제품을 섣불리 개발해 회사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리 아이어코카는 그런 그를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결국 개발 승인을 따내는 데 성공하고 1962년 9월 개발에 착수했다. 개발자금으로는 겨우 4천500만 달러(현재 화폐가치로 약 3천870억원)가 주어졌다. 기술진은 개발비용을 줄이기 위해 2세대 팰콘을 기반으로 삼았고, 대부분의 주요 부품을 기존 제품들에서 가져왔다.

디자인 총괄 부사장 유진 보르디나트는 세 곳의 디자인센터(포드, 링컨-머큐리, 선행 디자인)가 경합을 벌이도록 했다. 최종적으로 조 오로스가 이끈 링컨-머큐리 팀(데이비드 애쉬, 게일 할더만, 존 포스터)의 안이 채택됐다. 18개월 만에 개발이 완료된 머스탱은 1964년 4월 17일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처음 공개됐다.
 

1세대 1964년~1973년
표준사양을 낮춰 기본가격을 2천368달러(현재 화폐가치로 약 1천990만원)로 억제한 대신, 자동변속기, 비닐 가죽 시트, 화이트 리본 타이어 등 다양한 품목을 옵션으로 돌린 ‘풀 초이스 시스템’을 도입했다. 스포티한 외관과 균형 잡힌 성능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 판매 첫날부터 돌풍을 일으켰다. 여기에 미국의 경제 호황과 효과적인 마케팅 전략이 맞물려 베이비붐 세대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령대와 소득계층을 파고들었다.

포드는 머스탱의 첫해 판매량을 8만대로 내다봤지만, 출시 첫날에만 2만2천대가 팔렸고, 불과 18개월 만에 100만대를 돌파했다. 머스탱은 1920년대 ‘모델 T’ 이후 가장 성공한 포드 모델로 자리매김하며 미국 자동차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을 세웠고, 포드는 재기에 성공했다. 머스탱의 성공은 바다 건너 토요타 셀리카 개발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포드는 차체를 키우고 디자인을 대폭 바꾼 페이스리프트 모델을 1968년에 출시했다.

1세대 머스탱은 한 시대를 풍미한 문화적 아이콘이다. 2000년대 초반 미 해군은 모병광고에서, 싸워서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3가지로 비치 보이스, 애플파이, 1967년식 머스탱을 꼽았을 정도. (“The Beach Boys. Apple pie. The ’67 Mustang. Three things worth fighting for.”)
 

2세대 1973년~1978년
1970년 포드 사장에 오른 리 아이어코카는 소형차 중심으로 빠르게 바뀌던 시장 상황에 맞춰 더 작고 연비가 좋은 머스탱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당초 1세대 머스탱의 기반이 된 팰콘과 크기와 성능이 비슷한 매버릭을 기초로 삼을 계획이었으나, 토요타 셀리카, 닷선 240Z 등 일본산 수입차에 대응하기 위해 크기가 더 작은 핀토 기반으로 최종 결정됐다. 디자인 개발은 1970년 포드에 인수된 이탈리아 코치빌더 기아(Ghia)가 맡았다.

정식 명칭이 머스탱 Ⅱ인 2세대 머스탱은 이전보다 차체 크기를 줄였지만, 새로운 미국 배기가스 및 안전 규제에 대응하면서 무게는 증가했고, 성능은 떨어졌다. 공교롭게도 출시 첫해 오일쇼크가 터졌는데, 첫 12개월간 385,993대가 판매돼 1세대 출시 첫해 판매량 418,812대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3세대 1978년~1993년
리 아이어코카 주도로 개발된 마지막 머스탱. 1970년대 후반 미국 자동차 회사들은 오일쇼크 여파로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고, 작고 연비 좋은 일본차가 큰 인기를 끌었다. 머스탱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피해갈 수 없었다. 3세대 머스탱은 가볍고 구조가 단순한 폭스 플랫폼 기반으로 개발됐고, 엔진은 V6 및 V8과 함께 머스탱 최초로 직렬 4기통도 포함됐다.

포드는 1, 2세대에 비해 판매가 신통치 않자 제휴관계이던 마쓰다에서 앞바퀴굴림 플랫폼을 가져와 머스탱을 개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V8 엔진을 탑재하지 못하는 앞바퀴굴림 머스탱에 대한 소비자 저항이 심했고, 결국 포드는 차세대 머스탱으로 개발한 차를 프로브로 출시했다. 이에 따라 세대교체가 미뤄지면서 15년 동안이나 생산한 최장수 머스탱이 됐다.
 

4세대 1993년~2004년
폭스 플랫폼을 개량한 SN95(또는 폭스4) 플랫폼 기반이다. 포드는 4세대 머스탱을 위한 SN95 개발에 7억 달러(약 7천693억원)를 쏟아 부었다. 기존 폭스 플랫폼 부품의 60%를 새로 설계해 핸들링과 진동·소음 수준이 크게 향상됐다.

1996년 포드코리아 설립과 함께 처음으로 국내에 공식 출시된 머스탱이기도 하다. 당시 국내 판매가격은 쿠페가 2천584만원, 컨버터블이 3천341만원이었다. 1998년에는 포드의 새로운 디자인 철학 ‘뉴 에지’를 적용하고, 1세대 이미지를 반영한 디자인으로 대폭 손질한 페이스리프트 모델을 선보였다.
 

5세대 2004년~2014년
머스탱을 위해 새로 개발한 D2C(D클래스 2도어 쿠페) 플랫폼 기반으로 1999년 개발이 시작됐다. 포드 글로벌 디자인 총괄 부사장 제이 메이스의 지시로 도중에 개발방향이 바뀌면서 디자인을 마치는 데만 3년이 걸렸다. 제이 메이스는 1세대 머스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복고적 미래주의(retrofuturism) 디자인을 추구했다.

포드는 2002년 ‘리빙 레전드 투어’를 통해 1960년대 디자인을 연상케 하는 머스탱 GT 콘셉트와 머스탱 컨버터블 콘셉트를 GT40 콘셉트와 함께 선보였고, 2003년 디트로이트모터쇼에서 공개해 큰 화제가 됐다. 콘셉트 카의 디자인을 계승한 5세대 머스탱은 출시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머스탱의 성공은 쉐보레 카마로와 다지 챌린저의 디자인 개발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1960년대 포니카 경쟁을21세기로 다시 불러왔다.
 

6세대 현재
2009년 S550이라는 코드네임으로 개발이 시작됐고, 2010년 12월 포드 독일 디자인센터 소속 케말 큐릭의 디자인 안이 선정됐다. 이후 그는 미국 본사 디자인센터로 자리를 옮겨 외장디자인 개발을 주도했다. 초기 디자인 안은 급진적인 변화라는 이유로 임원 품평회를 통과하지 못했고, 3가지 디자인 안을 새로 제출해 2012년 12월 A안으로 최종 결정됐다.

2013년 12월 5일 미국 본사를 비롯해 뉴욕, 로스앤젤레스, 바르셀로나, 상하이, 시드니 등 4개 대륙 6개 도시에서 동시에 공개됐다. 머스탱 역사상 처음으로 오른쪽 스티어링 휠 모델도 개발돼 전 세계에서 판매가 전개될 예정이다. 지난 2001년 포드 호주법인이 전문 튜너에 의뢰해 오른쪽 스티어링 휠로 개조한 4세대 머스탱 250대를 판매한 적은 있지만, 공식적으로 좌측통행 국가용 모델을 출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세대 머스탱이 공개된 지 정확히 50년 만인 지난해 4월 17일 ‘50주년 한정판’(50 Year Limited Edition)을 선보였다. 50주년 한정판은 머스탱의 탄생연도를 상징하는 1,964대가 생산됐고, 지난해 9월 출시 직후 매진됐다. 마지막 모델은 자선경매를 통해 17만 달러(약 1억8천683만원)에 낙찰됐다.
 

■ 머스탱 이름의 유래
야생마를 뜻하는 머스탱으로 이름 지은 배경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미 공군 전투기 P-51 머스탱의 이미지를 담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원래 ‘토리노’(이탈리아 북서부 도시)가 유력했지만 헨리 포드 2세와 이탈리아 여성과의 불륜 스캔들로 인해 이탈리아 이름은 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지난해 4월 리 아이어코카는 머스탱이 홍보회사가 제안한 이름이라고 밝혔다. J. 월터 톰슨 애드버타이징이 여러 동물 이름들을 제안했는데, 그 중 하나가 머스탱이었다고. 디자인 부서는 ‘쿠거’(미국 사자)를 강력하게 추천했지만, 리 아이어코카는 머스탱을 선택했다. 교외를 빠르게 달리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 다. 사진은 머스탱 개발을 주도한 리 아이어코카(왼쪽)와 도널드 프레이.
 

■ 차대번호 1번 머스탱
머스탱은 1964년 4월 17일 공개와 함께 판매가 시작됐다. 포드는 판매 개시 약 5주 전부터 수천 대의 머스탱을 생산해 북미 각지로 보냈다. 전시, 홍보, 시험 등 내부적인 목적을 위해 제작한 선행 생산모델이었다. 그중에는 처음으로 생산라인을 빠져나온 차대번호 1번(5F08F100001) 머스탱도 있었다. 차대번호 1번 머스탱은 멀리 캐나다 동쪽 끝 뉴펀들랜드 섬의 항구도시 세인트존스에 있는 한 포드 매장으로 보내졌다.

출시 다음날 캐나다 동부지방항공(EPA) 기장 스탠리 턱커(사진)는 매장 앞을 지나가다 우연히 이 머스탱을 봤고, 영업사원을 설득해 판매용이 아니었던 이 차를 구입했다. 차대번호 1번 머스탱이 부주의하게 판매됐다는 사실을 포드 본사에서 알아차린 것은 그로부터 수주가 지난 뒤였다. 포드 측은 그의 차를 구입하려고 했지만, 턱커는 자신의 차를 되팔고 싶지 않았다. 양측의 합의에 따라 턱커는 1966년 2월 자신의 차를 포드에 돌려주었고, 포드는 새 머스탱으로 바꿔줬다. 또한, 포드는 1966년 5월 2일에 생산된 100만 번째 머스탱을 그에게 추가로 전달하기도 했다. 포드는 차대번호 1번 머스탱을 헨리 포드 박물관에 기증했고, 현재까지 그곳에 전시되어 있다.
 

■ 머스탱 국내 1호차
대한민국 최초의 머스탱 오너는 영화배우 신성일. 스티브 맥퀸 주연의 영화 〈블리트〉를 보고 머스탱에 매료된 그는 1969년 640만원을 들여 빨간색 머스탱 마하 1(사진)을 수입했다. 당시 신성일이 살던 집값이 240만원, 신진자동차 코로나가 86만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다. 머스탱은 미국에서 합리적인 가격의 대중적인 자동차였으니, 당시 한국과 미국의 경제적 격차를 실감케 한다.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이 개통되던 날, 마하 1로 질주하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의전차량 행렬과 마주친 일화가 유명하다.
 

■ 인기 영화배우 머스탱
007 시리즈 3편 〈골드핑거〉(1964년)에서 1964년식 머스탱 컨버터블이 스크린에 데뷔한 이래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다. 〈블리트〉(1968년)에서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종횡무진 누빈 진녹색 머스탱 GT(사진)는 머스탱을 문화적 아이콘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007 시리즈 7편 〈다이아몬드는 영원히〉(1971년)에서는 1971년식 머스탱 마하 1이 라스베이거스에서 화려한 묘기를 펼쳤고, 〈식스티 세컨즈〉(1974년)에서는 ‘엘리노어’라는 애칭으로 불린 마지막 목표물이 1973년식 머스탱 마하 1이었다. 2000년에 나온 리메이크 작품에서는 1967년식 쉘비 머스탱 GT 500이 ‘엘리노어’로 나왔다.

〈분노의 질주〉시리즈의 스핀오프 격인 〈패스트 & 퓨리어스: 도쿄 드리프트〉(2006년)에는 닛산 RB26 엔진을 넣은 1967년식 머스탱 GT, 〈트랜스포머〉(2007년)에는 2005년식 설린 S281E가 경찰차 모습을 한 디셉티콘으로 등장해 존재감을 뽐냈다. 최근에는 〈니드 포 스피드〉(2014년)에서 2013년식 쉘비 GT 500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글 · 임재현 에디터 (jlim@iautoca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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