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숨막히는 또는 너무한 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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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숨막히는 또는 너무한 뒤태
  • 이경섭
  • 승인 2023.04.12 1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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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이의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하는 건 사람만이 아니다
사진 Donald Giannatti, Unsplash

운전하며 가장 많이 쳐다보는 게 앞차 꽁무니다. 자동차를 판단할 때 ‘뒤태’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다. 물론 자동차 디자인에서 얼굴인 전면부나 전측면, 차의 실루엣을 보여주는 옆모습도 중요하지만 어디까지나 자동차 디자인의 완성은 뒷모습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주변에서 요즘 예쁘다고 칭찬이 자자한 S자동차 T 모델의 뒷모습이 그래서 내겐 조금 아쉽다. 압도하는 앞모습과 달리 허전한 궁둥이와 살짝 쳐진 후미등이 둔해 보이기 때문이다. 공부 많이 한 디자이너들이 죽도록 연구하여 결정권자의 까다로운 승인을 거쳐 내놓은 역작을 내가 감히 느낌만으로 비하할 수는 없겠지. 다만 자동차는 뒷모습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1 내 차를 유심히 보는 사람은 내 뒷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많은 운전자가 차 뒷부분에 신경 쓴다. 기왕의 디자인이야 어찌할 수 없지만 거기에 뭔가를 더해 재치 있게 활용할 수는 있으니까. 가장 쉬운 방법이 스티커를 붙이는 것이다. 이런저런 문구와 도안이 들어간 스티커는 장식이기도 하고 차주의 감각과 의사를 드러내는 메신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가장 흔하게 보는 스티커가 ‘아이가 타고 있어요’ 정도다. 영어로 ‘Baby in car’. 아이가 타고 있으니 어쩌라고? 뒷차가 조심하라고? 아니면 운전을 엉망으로 해도 이해하라는 뜻인가. 그런 건 아니고 사고가 났을 때 체구가 작은 아이를 구조대가 발견하지 못할까봐 잘 찾아봐 달라는 일종의 안내문(?)이다. 의미 이해를 위해 ‘위급상황시 아이를 먼저 구해 주세요’라고 친절하게 풀어 써놓기도 한다.

어떤 이는 아이의 성별과 나이, 혈액형도 써놨던데 자녀를 향한 부모의 비장한 뜻은 알겠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실제 사고현장에서 이 스티커가 얼마나 효용을 발휘할지 의문이 든다. 구조가 필요할 만큼 파손된 차에서 스티커 붙은 뒷유리창이 멀쩡하기 어렵고, 사고를 수습할 때 없는 아이를 찾느라 정작 귀중한 구조시간을 허비할 수도 있으며 스티커 표시된 혈액형만 보고 병원에서 무작정 수혈을 할 리도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따지고 들면 너무 삭막할지 모르지만 스티커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어느 전문가는 이런 스티커 내용이 범죄에 악용될 소지가 있으므로 자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범죄까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를 향한 부모의 갸륵한 각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저 장식품이다. 효용은 불분명하고 호불호는 분명한.

#2 초보운전 표시에 대한 운전자 의무는 없다. 하지만 붙이는 게 여러 모로 좋다. 과도하거나 오용하는 게 문제다.     ‘직진밖에 몰라요’ ‘건드리면 폭발해요’ ‘나도 내가 무서워요’ ‘먼저 가. 난 이미 틀렸어’ ‘면허를 따긴 땄는데…’ ‘무면허나 마찬가지’ ‘지금까지 이런 초보는 없었다. 이것은 액셀인가 브레이크인가’ 등등 얕은 재치를 뽐내는 스티커들. 붙인 당사자 마음은 몰라도 이런 문구를 읽는 뒷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심지어 ‘초보인데 보태준 거 있수?’라거나 ‘짐승이 타고 있음’ ‘운전은 초보 마음은 터보 건들면 람보’ ‘빵빵대면 죽여버림’ 같은 협박성 스티커도 있다. 이런 스티커를 붙이고도 멀쩡히 운전하는 사람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 

초보자를 위한 배려는 좋지만 배려를 강요하는 태도는 불쾌하다. 명랑사회를 저해한다. 이런 문구가 난무하는 건 초보운전 표시 방법을 자율에 맡겨놓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초보운전 스티커 규격화를 위한 법규 개정안이 국회에서 발의되었다 하니 지켜볼 일이다. 법 제도를 떠나 상식으로 판단하는 일이다. 스티커 문구는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나의 표현이고 그게 어떻게 읽힐지 가늠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저 ‘초보운전’ 또는 ‘양보 감사합니다’ 정도면 충분히 아름답다.

#3 우리 아파트 단지에 이상하게 주차하는 차가 있다. 매일 지하주차장 현관 출입구 앞에 차를 세워 놓기 때문에 출근할 때 보면 ‘주차 금지구역입니다. 이동주차 바랍니다’라는 안내문이 앞유리에 항상 꽂혀 있다. 차 뒷유리에는 이런 스티커가 커다랗게 붙어 있다. ‘일본차라서 죄송합니다. 이런 줄 모르고 샀어요. 말이나 살 걸 그랬어요.’

추측컨대 차에 문제가 있는데 업체에서 제대로 조처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해 취한 소심한 복수이거나 한때 일본제품 불매운동 상황에서 슬쩍 면피하려는 수작이거나. 또는 둘 다이거나. 어느 쪽이건 제 얼굴에 뱉은 호박잎만한 가래침이다.

이 스티커를 볼 때마다 울화가 치민다. 보다 못해 어느날 ‘일본차는 괜찮아요. 주차는 똑바로 하시죠’라고 포스트잇에 굵은 글씨로 썼다. 썼지만 차마 붙이지는 못했다. 경고장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불법행위(?)를 지속하는 상대는 아예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마음의 소리가 컸기 때문이다. 그저 흘겨보며 혀나 찰 수밖에.

‘하차감’이라는 말을 쓴다. 승차감에 대응하는 신조어인데 기발한 표현이다. 차가 근사하니 차에서 내린 나도 남들 눈에 근사해 보이리라는 기대. 허세일지언정 그런 기대는 나쁘지 않다. 옷이 나를 나타내듯 차도 나를 표현해 주니까. 그렇다면 내 차에 붙이는 스티커가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좀 더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내 생각엔 차체 그대로 아무것도 붙이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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