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가티의 위대한 로드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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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가티의 위대한 로드카들
  • 믹 월시(Mick Walsh)
  • 승인 2022.09.04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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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프리의 영광은 1930년대에 저물었다. 하지만 이 고혹적인 부가티 스포츠카 T55와 T57S는 여전히 세상에서 빛나고 있다
사진 토니 베이커(Tony Baker)
눈길을 잡아끄는 로드스터는 에토레 부가티의 아들 장이 디자인했다

여기는 영국 중동부 노스요크셔의 험악한 황무지길.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 그런데 부가티 클래식 스포츠카 2대의 환상적인 모습은 그에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이윽고 타입 55 로드스터에 이어 날씬한 타입 57S가 트윈캠 직렬 8기통의 현란한 사운드트랙을 뿜어내며 도로를 달렸다. 그야말로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그들은 웅장한 그레이트 호수를 배경으로 탁 트인 고개를 잇따라 넘었다. 타입 55는 미끈한 유선형에 옐로+블랙 아르데코 스타일 페인트로 장식했다. 뒤따르는 보닛이 길고 나직한 블루 로드스터와는 극적인 대조를 이뤘다. 

놀랍게도 이 두 디자인은 꼭 4년 간격을 뒀다. 타입 55는 공장에서 완성된 미모의 걸작이었던 반면 뒤따라 나온 타입 57S는 섀시만 제작돼 영국 코치빌더 코르시카가 보디를 입혔다. 그리고 장기간 소유한 둘째 오너가 꾸준히 손질을 했다. 

제2차세계대전 이전에 나온 이들은 모두 당대의 고성능 전설로 시속 160km를 넘었다. T55는 슈퍼차저 2.3L 그랑프리 엔진으로 무장하고 롤러-베어링 크랭크를 달았다. 한편 뒤에 나온 자연흡기 3.2L 타입 57S는 막강한 토크를 자랑했고, 최고출력은 200마력에 육박했다.

이들은 장기간 닐 코너의 정성어린 보호와 손질을 받았다. 코너는 수많은 걸작 히스토릭카 오너이자 존경받는 카 마니아로 직접 레이스에 출전하기도 했다. 그는 한평생 부가티를 사랑했다. 부인 프레다 역시 그에 못지않게 똑같은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어느 차든지 기회만 있으면 몰고 다녔다. 이들의 카 컬렉션 중 가장 좋아했던 두 부가티를 아낌없이 몰고 다녔다. 벤틀리 블로어, 알파 8C와 페라리 250도 이들의 집에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했지만 부가티 2대만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몰샤임 최고의 작품이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잘 알려주는 대목이다. 

 

T55를 몰려면 몸을 꼿꼿이 세워야 한다

두 차는 스타일과 스펙에서 절묘한 대조를 이룬다. T55는 부가티 최후의 그랑프리 강자 타입 51 엔진과 타입 47 섀시를 타입 49 기어박스와 짜맞춰 만들어냈다. 통틀어 38대 중 13대는 공장에서 만든 로드스터 보디를 씌웠다. 이 차를 부가티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로드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튼튼하고 매력적인 단조 액슬, 리프 스프링과 시그니처 그랑프리 스타일 주조합금 휠로 2세대에 걸친 부가티 디자인을 능란하게 아울렀다. 창업자 에토레의 아들 장이 트윈캠 엔진을 도입하는 데 앞장섰고, 경이적인 스타일을 완성했다.

타입 57S는 영광스러운 부가티 로드카의 마지막이었다. 액슬 하나가 뒤 프레임을 꿰뚫었고, 개성있는 V 라디에이터에 드라이 섬프였다. 따라서 코르시카 로드스터는 스탠스가 훨씬 낮았다. 영국제 보디를 입고 러지 와이어 휠을 신었으나 여전히 빈틈없는 순종 부가티였다. 이 주문형 머신은 크롬장식이 최소한에 그친 경주용 경량 로드스터로 태어났다. 

화려한 T55와는 대조적으로 목적의식이 뚜렷한 존재감을 뽐냈다. 이름 높은 유선형 ‘탱크’ 스타일의 타입 57G(슈퍼차저를 달지 않았다)는 제2회 르망 24시간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한편 T55의 레이스 기록은 신통치 않았다. 그렇지만 이 둘은 모두 1930년대를 대표하는 궁극적인 로드카였다. 

코너는 타입 55를 먼저 사들였고 1970년 이후 끈질기게 몰고 다녔다. 그가 직접 몰고 다닐 수 없는 차는 그의 컬렉션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1965년 실버스톤에서 절친인 제프리 세인트존과 피트 월에서 스포츠카 연습하는 장면을 지켜봤는데, 그때 타입 55 한 대가 심하게 연기를 내뿜으며 지나갔다. 제프리가 그 차를 사야 한다고 내게 말했다. 그리고 몇 년 뒤 딕 크로스웨이트가 전화를 걸어 그 오너가 엔진을 수리할 의사가 없으니 흥정하기 딱 좋은 때가 왔다고 말했다.” 실제 코너는 그 오너와 거래를 했고, 에큐리 에코스 트랜스포터에 실어 요쿠셔로 갔다. 그때 그랑프리 타입 59 한 대도 함께 실었다.

이 타입 55는 섀시번호 55207이었고, 공장에서 만든 그대로의 쿠페 스타일로 출발했다. 2차 대전 직후 런던 모터쇼카(1933년)의 섀시번호 55223의 순수 로드스터 보디로 갈아입었다. 모터쇼 당시 NS ‘니키’ 엠비리코스가 부가티 스탠드에서 바로 사들인 차였다. 

타입 57S의 보디 디자인은 영국 코치빌더 코르시카가 담당했다

아서 버철은 유능한 전직 팀 로터스 자동차 정비사였고, 짐 클라크와 함께 일했다. 그가 코너 팀에 합류하여 T55 복원에 착수했다. 크로스웨이트 & 가디너는 키가 낮은 신형 크랭크케이스를 중심으로 엔진을 되살렸다. 튜닝에는 오리지널 제니스 48K 카뷰레터와 타입 51의 점화순서가 들어 있었다. 

“타입 51 엔진은 부가티 사상 최고였고, 파손되지 않았다. 우리는 해마다 오일을 갈았고, 크랭크샤프트나 롤러 베어링에 절대로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크게 바꾼 부분은 기어박스뿐이었다. T55는 이미 ENV 프리셀렉터로 전환한 뒤였기 때문이었다. “오리지널 스펙은 T49 트랜스미션이었다. 부가티에 정통한 사람들이 기어변환이 늦어 차를 망친다고 하는 말썽거리였다. 특히 1~2단이 문제였다.” 브라인턴 엔지니어링과 공동 작업을 하면서 오리지널 타입 49 케이싱을 이용해 새 기어박스를 만들었다. 

코너는 “이 차는 내가 지금까지 몰아본 2차세계대전 이전의 차 가운데 변환속도가 가장 빠르다. 그 재미만으로 자꾸 기어를 만지고 싶었다. 아울러 장거리 여행용으로 오버드라이브를 갖췄다”고 말했다. 

일단 버철이 기계 복원을 마치자 보디를 오리지널의 블랙+옐로 색상으로 다시 칠했다. 이로써 장 부가티의 오리지널 디자인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뒤이어 코너는 핸들링의 정밀 튜닝에 들어갔다. 

복원작업을 완성한 뒤 코너 부부는 타입 55를 몰고 여행을 다니고 있다. 오직 세인트 존의 피고니-팔라스키 보디 T55만이 즐거움과 주행거리에서 코너 부부의 부가티와 맞설 수 있다. 요크셔를 가로지르는 규칙적인 출퇴근과 아울러 이 환상적인 머신은 스페인과 아일랜드 탄생의 본고장인 몰샤임 여행을 비롯해 유럽 전역을 돌아다녔다. 

아늑한 실내, 낮은 좌석

공교롭게도 T57S는 대부호 엠비리코스와 인연이 있었다. 26세의 이 부호는 자신의 T55를 교체하기 위해 여기 실린 바로 그 차를 사들였다. 영국 최초의 타입 57S는 섀시 번호 57.375. 

그는 런던의 딜러 커널 소렐을 통해 주문했다. 원래 이색적인 아에로 쿠페를 주문하려 했지만 섀시만 바꿨다. 열렬한 프라이비터 레이서였던 그는 그의 ERA R2A를 몰고 몇 차례 성공을 거뒀고, 모나코에서는 3위를 기록했다. 

그는 1936년 9월 5일 아즈의 투어리스트 트로피에 신형 부가티를 몰고 출전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그는 8월 말 프랑스에서 섀시를 보냈다. 하지만 코르시카가 보디를 완성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빡빡했다. 북부 런던의 코치빌더 코르시카는 딱 4일 만에 보디를 완성했다. 스타일은 엠비리코스, 존 리와 찰리 스태머스의 합작품이었다. 

결국 코르시카는 타입 57S 보디 8대를 만들었다. 이 업체의 고객명단은 실로 인상적이었다. 지상 스피드 기록의 맬컴 캠벨 경을 비롯해 영국 모터스포츠계의 명사가 총망라돼 있었다. 엠비리코스는 프랑스계 라이벌 들라이예와 탈보를 꺾기 위해 가능한 한 무게를 줄이라고 지시했다. 

완성차는 연회색으로 칠하고 길고 낮은 보닛에는 그리스 국기를 그렸다. 사이클 윙과 짧은 테일의 날씬한 2인승이었다. 경주차형 특징에는 윈드실드와 앞 왼쪽 바퀴 뒤의 탱크, 한곳에 극적으로 돌출한 4개 배기관이 들어있었다. 

슈퍼차저 2.3L 타입 51 그랑프리 엔진이 동력을 공급한다

레이스에서 예기치 않은 충돌로 휘어진 부가티는 런던으로 돌아왔다. 줄리오 람포니가 손질했고, 리처드 시먼이 다시 몰고 레이스에 나갔다. 엠비리코스의 레이스 생애는 1937년에 끝났다. 그때 테크노토 독립 서스펜션으로 새로 무장한 ERA를 몰고 그랑프리 디 피렌체에 나갔다. 하지만 연습중 엄청난 충돌사고로 포기했다. 다행히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그리스의 플레이보이 엠비리코스는 모터스포츠를 완전히 그만두고, 섀시 57.375를 포함해 경주차를 모두 팔아치웠다.

그러나 엠비리코스의 생활은 여전히 정상을 달리고 있었다. 그는 신형 타입 57C 아탈란테 로드카를 몰고 다녔고, 조세핀 베이커가 군림하던 사교계에서 인생을 즐겼다. 이후 미국에서 엠비리코스는 ‘쿠키’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맨해튼의 글래머 엘리너 영과 사랑에 빠졌다. 1941년 이들은 함께 세상을 떠났다. 당시 엠비리코스와 베이커는 자가용 비행기 페어차일드 24로 날아가다 거친 날씨에 로드아일랜드 맨터투크 바다에 떨어졌다. 

타입 57S의 둘째 오너는 로니 사이먼드슨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브루크랜즈의 존경받는 엔지니어와 비행교관으로 활약했다. 그의 첫째 부가티는 1925년에 사들인 부가티 브레시아였다. 완벽주의자 사이먼드슨은 부가티 브랜드에 충성을 다했다. 사실 그 이전의 타입 57 스포츠카가 시속 160km에 도달하지 못해 실망했다. 

코르시카에 들어간 타입 57S는 새로운 윙, 광폭 윈드실드와 개량형 테일을 달았다. 게다가 색상을 블루로 교체했고, 실내를 다시 손질했다. 브루크랜즈의 톰슨 & 테일러에서 튜닝을 마치자 타입 57S는 성능이 크게 뛰어올랐다. “가속은 경이적이었다. 성능은 나의 기대치를 완전히 충족시켰다. 나는 뻔질나게 속도계를 185km 또는 그 이상으로 밀어올렸다.” 1956년 사이먼드슨은 브레이크를 유압 시스템으로 업그레이드했다. 역시 T&T가 그 작업을 맡았다. 개조작업을 하면서도 원래의 드럼을 살렸으나 록히드가 공급한 실린더와 파이프를 썼다. 1950년대 중반부터 사이먼드슨은 클래식과 부가티 오너스 클럽 행사에 노력을 집중했다. 거기서 3L 이상의 스포츠카 클래스에서 계속 선두 그룹을 지켰다. 

57.375의 운전대를 잡아본 인물은 아주 드물었다. 한데 존 볼스터가 사이먼드슨을 설득하여 <오토스포츠>의 ‘율타이드 로드 테스트’에 출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볼스터는 지극히 정교한 머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때 부가티는 오리지널이 아닌 16인치 휠로 0→시속 97km 가속 7.8초를 기록했다. 16인치 휠은 힐클라임 경기용이었다. “부가티는 당시 모든 열혈 카 마니아가 선망하는 대상이었다” 볼스터가 설명했다. 

3.2L 직렬 8기통의 성능은 막강했다

45년 동안 사이먼드슨은 프레스콧에서 2000회 이상 완주했다. 차는 오너의 의상 패션과 딱 들어맞게 완벽했다. 진정한 신사였던 그는 언제나 스포츠 재킷과 타이를 빈틈없이 갖췄다. 이후 1984년 여름, 사이먼드슨은 80세에 가까웠다. 그때 코너의 절친 세인트 존이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사이먼드슨이 마침내 모터스포츠에서 물러났고, 차를 시장에 내놓을 거라는 내용이었다. “까다로운 흥정이었다. 나는 전화로 제의했고, 이후 로니가 전화를 걸어 말했다. 우리에게 그 차를 넘겨주게 되어 기쁘다고…. 나는 차를 받으러 아들 나이젤과 함께 찰스 코티지로 갔다. 호화판 점심을 한 뒤 우리는 노스요크셔로 떠났다. 4시간 30분 만에 집에 도착했고, 평균시속 110km였다. 

코너는 타입 57S를 곧바로 직장 출퇴근용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 위대한 부가티는 코너 집안에서 으레 ‘로니의 차’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깔끔하게 보존되고, 트림을 비롯해 소중한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최근 엔진을 다시 손질했고, 보디는 더 짙은 블루로 바꿨다. 원형을 되살린 디테일에는 더 커진 헤드라이트, 오리지널 윈드실드와 18인치 휠이 들어갔다. 

역사적인 부가티를 잇따라 시승한 것은 나에게 황홀한 특권이었다. T55의 콕핏은 참신한 디자인이 돋보였다. 마치 그랑프리카를 타고 있을 때처럼 섀시 안에 깊숙이 발을 뻗고 꼿꼿이 일어나 앉았다. 다만 기어가 한복판에 있기 때문에 공간이 더 좁았다. 목재 메인 패널 아래 엔진 스커틀이 보였다.

캠샤프트 베벨과 스퍼트레인 드라이브 엔진은 앞쪽에 놓였고, 엔진 노트가 한층 분주했다. 엔진, 롤러와 상큼하고 날선 배기음을 거의 삼키는 슈퍼차저의 기계적인 합주가 귀청을 때렸다. 이 엔진은 힘차게 회전대를 오르내렸고, 아름답게 끌었다. 짜릿하게 조율된 기어박스가 한층 감동을 더했다. 

오리지널 투어링 T49는 느리고 무거운 기어변환으로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브라인턴 디자인은 짧은 고속 동작으로 다음 기어를 체크할 수 있었다. T55는 시끄럽고 느린 기어변환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환상적인 드라이빙 머신이었다. 

옐로&블랙 T55와 블루 타입 57S

스코틀랜드의 거대한 황무지를 달려 깨끗하고 탁 트인 커브를 돌았다. 날카로운 스티어링과 억센 파워를 만끽할 때 모나코나 스파프랑코르샹의 시롱이나 바르지가 된 기분이었다. 고속 변환이 모든 것을 뒷받침했다. 그랑프리 카보다는 무게가 더 나가기에 케이블-드럼 브레이크는 좀 더 점진적인 압력과 노련한 감각이 필요했다. 도로의 범프에서 덜컥거리는 것은 액슬을 비틀기 때문이었다. 100% 순혈의 윤택하고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쇼윈도에 반사된 이들의 흘러내리는 라인에 맞설 상대는 없었다. 

타입 57S도 그에 못지않게 인상적이었으나 한층 세련된 모습이었다. 운전석 도어(T55에는 운전석 도어가 없다)를 통해 똑같은 4스포크 호두나무 림 스티어링 밑으로 들어갔다. 좌석은 아늑하고 낮고 몸에 꼭 맞았다. 시야는 길게 뻗어나간 보닛과 거의 수평으로 보였다. 대시보드는 잘려나간 아래쪽 한복판에 크랭크 기어레버가 들어왔고, 운전위치를 개선하기 위해 핸들 컬럼을 줄였다. 사이먼드슨은 완벽주의자의 자세로 인체공학을 다뤘다.

도로에 나가자 복잡한 드람 쇼크업소버 덕분에 승차감은 최고였다. 범프를 매끈하게 타고 넘었고, 고속 코너에서는 단단히 평형을 유지했다. 브라인턴 박스는 거침없이 작동했다. 타입 57S의 넓은 게이트와 길고 굽은 레버는 느렸다. 그러나 코너는 내가 너무 멈칫거린다고 충고했고, 변속을 그보다 빨리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36년 디자인된 차치고는 가공할 수준의 성능이었다. 극적으로 폭발하는 토크는 나에게 강력한 펀치를 날렸다. 비탈을 거뜬히 치고 올랐고, 1000rpm 또는 그 이하에서 톱기어로 파워를 뿜어냈다. 엔진의 유연성은 실로 탁월했다. 완벽한 투어링카로 인상적이면서도 느긋하게 도로를 집어삼켰다. 어느 모로나 이 정제된 머신은 균형 잡힌 핸들링과 막강한 성능, 믿음직한 유압 브레이크로 눈부시게 조율된 실력을 발휘했다. XK120 드라이버들이 사이먼드슨의 푸른 기적 앞에서 주눅 들었던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여기 나온 부가티 듀오는 어느 한쪽을 골라 뽑기는 정말 어려웠다. 내 안의 부가티 순수파는 타입 55를 갈망했다. 그와는 달리 T57S는 2차대전 이전의 궁극적 스포츠카였다. 82년 동안 오너가 3명밖에 없었던 까닭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코너 가족의 선택도 둘로 나눠졌다. 닐과 프레다는 T55가 마지막으로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와는 달리 나이젤은 ‘로니의 차’를 골랐다. 정열적인 마니아들이 오랫동안 두 부가티를 즐기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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