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멜 트로피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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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멜 트로피를 아시나요?
  • 닉 딤블비(Nick Dimbleby)
  • 승인 2022.06.07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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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여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터프한 지형을 넘나들며 모험을 떠났던 전설적인 카멜 트로피에 대한 회상
글·사진 닉 딤블비(Nick Dimbleby)

 

카멜 트로피에 대해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듣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어쨌든, 이런 이벤트가 시작된 시기는 이미 40년 전인 1980년이다. 정확하게는 4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생의 절반에 해당하는 시간. 이벤트는 1980년 5월부터 2000년 7월까지 진행됐다. 그 시간 동안에 35개 나라에서 566개 팀이 출전해 24개국 오지를 돌아다니며 경합을 치렀다. 

최초의 카멜 트로피는 세 개의 서독 팀이 포드 U-50을 타고 12일 동안 브라질의 벨렘에서부터 산타렘까지 이어진 아마존을 가로지르며 달렸다. U-50은 지프 USA로부터 라이선스를 취득한 브라질 공장에서 생산했다. 핀토에서 가져온 4기통 2.3L 엔진을 장착했다
최초의 카멜 트로피는 3개의 서독 팀이 포드 U-50을 타고 12일 동안 브라질의벨렘에서부터 산타렘까지 이어진 아마존을 가로지르며 달렸다. U-50은 지프 USA로부터 라이선스를 취득한 브라질 공장에서 생산했다. 핀토에서 가져온 4기통 2.3L 엔진을 장착했다

담배 회사가 후원을 맡은 20년 동안, 단순히 유명한 인물만을 남긴 것은 아니다. 오늘날 유튜브 비디오와 몇몇 매거진, 그리고 이베이 비디오만 열정적으로 찍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카멜 트로피는 모터스포츠 역사에 해마다 먼지만 쌓이는 유물로 남아 있어야 맞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전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왜일까? 아마도 이 이벤트는 아주 이국적인 장소에서 열리는데다가, 놀라운 일을 치른 사람들과 연관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85년에는 더욱 열악한 상황에 맞닥뜨렸기 때문에 모든 호송차가 정글을 빠져나가기 위해 헬리콥터로 옮겨야 했다

1980년대와 90년대가 아주 오래전인 것처럼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지금 바라보는 차, 카메라, 그리고 이벤트에서 사용된 실제 기술을 본다면 꼭 그렇지도 않다. 당시는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하는 포토그래퍼는 없었다(모두 필름 카메라를 사용했다). GPS와 위성 내비게이션은 이제 막 생겨나던 때다. 그리고 페이스북, 유튜브, 그리고 인스타그램도 없던 시절이다. 이벤트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방법은 지금과는 매우 달랐다. 

비록 모터스포츠 이벤트로 분류되긴 했지만, 전통적인 레이스도 아니고 랠리 성격을 띤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운전 기술이 필요하다기보다 참가자들로부터 참을성과 지구력을 요구했다. 매년, 참가를 원하는 운전자는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참가자들은 사륜구동의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처럼 그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모험가가 됐다.

1985년 랜드로버의 호송대가 보르네오 칼리만탄에 있는 한 마을을 통과하고 있다
80년대 초 브리티시 레일랜드가 마지막 참가팀이었다. 랜드로버의 계획 일부는 유럽과 다른 곳의 성공적인 제품을 수입해 판매를 늘리는 것이었다. 이처럼 레인지로버는 1981년 카멜 트로피에 참가한 모든 독일 팀을 영웅으로 만들었다. 서독 시장에서는 이 프로모션이 제법 잘 먹혔기 때문이다
종종 다리를 놓는 것은 평범한 일에 불과하다. 심장이 멈출 듯한 순간들도 자주 펼쳐졌다. 한번은 1993년 말레이시아 사바 이벤트에서 썩은 통나무가 부서지며 디스커버 차량이 위험에 처한 적도 있었다
10주년을 맞이하며, 이 행사는 다시 한번 트랜스-아마존 하이웨이(TAH)를 달렸다. 조건은 험난했다. 14개 팀이 참가했으며, 디펜더 110을 타고 수렁에 달려들만큼 의기양양했다

참가자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아마추어였다.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어떤 경우에서건 전문 레이싱 라이선스는 참가가 허용되지 않았으며, 또 하나는 군에 복무중인 사람은 참가할 수 없다는 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가자들에게는 어떠한 보수나 상금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참가에 의의를 두었다. 

일단 조직위원들에게 충분히 좋은 인상을 심어줬다면, 그리고 선택됐다면, 팀 멤버들은 일생일대의 모험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진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카멜 트로피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이었다. 하드코어 오프로드와 미지 세계로의 여행을 결합한 각각의 행사는 이국적이고 외진 장소에서 열렸다. 팀 간 경쟁이라는 요소도 있었지만, 서로 경쟁한다기보다 운전 기술과 우승 의지에 중점을 뒀다. 영국 팀으로는 밥, 조 아이브스 형제가 1989년 아마존에서 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다. 

이벤트 리더 안드레아스 벤더는 그 호송대를 진흙탕에서 계속 움직이도록 했다<br>
이벤트 리더 안드레아스 벤더가 진흙탕에서 차를 움직일 수 있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다

 

1985년 보르네오의 강을 가로지르는 동안 강물이 윈드스크린을 덮쳤다
또 다른 극적인 순간, 밥 리브스는 디스커버리가 미끄러지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스노클 덕분에 엔진은 계속 돌아갔다

3개의 서독 팀이 그들의 포드 U-50 지프로 브라질 레인포레스트를 달렸던 첫 번째 여행 이후, 1981년 조직위원회는 10대의 레인지로버로 랜드로버 팀을 구성했다. 파트너십은 17년 동안 이어졌고 1983년 88인치 시리즈 III로 갈아탔다. 1998년 뉴 페이스 프리랜더가 나오기 전까지 최종 라인업은 디펜더와 디스커버리로 구성됐다. 클래식 1970 레일랜드 컬러 샌드글로우(The classic 1970s Leyland colour Sandglow)는 카멜 트로피의 대표 디자인이 됐다. 루프랙, 추가 램프, 윈치와 불-바(winches and bull-bar)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말이다.

놀라운 사진과 영상, 그리고 이야기들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지난해 랜드로버가 워크스 V8 트로피 헌정 모델을 한정 출시했다. 1990년 여정에서(3도어 디스커버리 모델)부터 우승의 영광을 거머쥐었던 것을 기념했다. 이 차는 미국 경매 사이트에서 14만 파운드(약 2억2400만 원)에 낙찰되며 관심을 끌었다. 카멜 트로피는 이제 모두에게 익숙한 이름으로 남을 수 있을까? 

카멜 트로피: 역사의 마지막 기록은 닉 딤블비에 의해 쓰여졌다. 그 내용은 포터 프레스(Porter Press)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러 나라 팀들은 힘을 합쳐 운전했다. 1984년 이벤트는 새로운 모델이 합류했다. 1에서 10까지 강도를 조절할 수 있는 코일 스프링을 처음으로 적용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는 클래식 윈치, 웨이딩 스노켈, 루프랙, 추가 램프와 알루미늄 샌드 트랙 등을 모두 갖춘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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