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 스페셜① 새로운 20년을 돌아보다
상태바
미니 스페셜① 새로운 20년을 돌아보다
  • 힐튼 할로웨이(Hilton Holloway)
  • 승인 2021.05.27 17: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59년, BMC는 영국차 중 가장 상징적인 차를 출시했다. 바로 미니다. BMW는 모든 걸 다시 했다. 힐튼 할로웨이는 과거 20년을 되돌아보고 동시대의 산증인과 함께 브랜드의 디자인과 기술 완성도를 살펴봤다.
알렉 이시고니스 경은 혁신적인 미니를 1950년대 말에 만들어 냈다

미니 옥스퍼드 직원들과의 단체 통화에서, 미니 브랜드가 얼마나 독특한지 알 수 있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BMW그룹의 거대한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말이다. 

20년 이상 브랜드를 새롭게 만들어온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실험에 관한, 하면 된다 식의 설계와 생산, 그리고 자신만의 길을 자유롭게 찾는 방식에 놀란다. 

주어진 두 번째 삶의 첫 14년 동안 미니는 뮌헨에 있는 작은 스튜디오를 기반으로 한 디자인 팀, 설계 작업을 진행하는 도급업체들과 함께 많은 것을 만들어 내는 일종의 부티크 운영 체제일 뿐이었다.

베테랑 홍보 책임자 안드레아스 램프카(Andreas Lampka)가 말하길 미니는 “시장에 판매되고 있는 다른 차들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틈새시장을 공략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램프카가 말하는 이 틈새시장은 돈이 된다. 보장되는 잔존가치와 자신이 원하는 차가 공장에서 나오는 것을 기꺼이 기다릴 줄 아는 고객들이 있기 때문이다. 

미니 옥스퍼드가 불러 모은 회의에서 이 마진에 대한 베테랑은 믹 피셔(Mick Fisher)였다. 공장에서 가장 오래 일한 직원이다. 1967년 롱브리지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브리티시 레이랜드의 보잘것없는 창건 당시부터였다. 실제 그가 오스틴에 합류했을 때는 오리지널 미니가 여덟 살을 맞이하던 해였다. 

 

롱브리지에서 미니 메트로를 설치하는 작업을 한 이후 피셔는 옥스퍼드로 옮겨 1982년과 1984년 자동차 출시를 앞두고 오스틴 마에스트로와 몬테고 생산라인을 설치하는 일을 했다. 그 이후 계속 거기에 있다. 

뉴 미니의 뿌리는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7년 전, 보수적인 한 독일의 작은 자동차 제조사가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BAE)로부터 로버그룹을 사들였을 때였다. 당시 자동차 세계는 끔찍했다. 

BMW가 랜드로버를 사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출시를 앞둔 레인지로버 2에 디젤 엔진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BAE는 그들 모두를 가져가길 바랐다. BMW는 새로운 시장 개척에 열중했다. 이제 막 꽃을 피워보려는 SUV와 시티카 영역을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BMW 배지가 그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가 분명치 않았다. 로버그룹과 역사적인 브랜드들을 사는 것은 놀라운 기회처럼 보여야 했다.

희한하게도 당시 BMW의 총책임자였던 베른트 피셰츠리더는 오리지널 미니의 브레인 역할을 했던, 1988년에 세상을 등진 알렉 이시고니스 경의 친애하는 조카였다. 피셰츠리더는 어렸을 적 버밍엄에 있는 이시고니스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도 말했다. 

미니의 재창조는 아마도 인수 당시 가장 뜨거운 주제였을 것이다. 첫 번째 뉴 미니가 공장에서 나오기까지는 7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걸렸지만, 로버와 BMW의 스타일리스트는 새로운 세대의 경쟁력 있는 버전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이어갔다. 

대략, 로버의 사상가들은 오리지널 미니의 정교한 서스펜션을 보존하길 원했고 비범한 인테리어 패키지도 이어가길 바랐다. BMW는 미니 쿠퍼 S 랠리카의 재창조라는 다른 이미지를 그렸다. 드라이빙 다이내믹스에 집중한 미니라는 것이다. 

디자인 테마는 스피드였다. 1995년 10월 BMW의 프랭크 스테픈슨의 스케치를 사용했다. 스피드를 나타내는 설계와 분명 부합하진 않았다. 스테픈슨과 로버의 데이비드 세딩톤이 그 디자인을 그려내고 있는 동안 게이돈과 뮌헨 사이 어딘가에서 설계 구상은 갈 길을 잃어가고 있었다. 

 

BMW와 로버는 1997년 매우 다른 버전의 미니를 가졌다 

미니를 위한 두 가지 최종 콘셉트가 1997년 공개됐다. 로버의 정교한 미드 엔진 원박스 스피리추얼과 BMW 스튜디오에서 나온 ACV30 2도어 쿠페 모델이다. 후자는 확실히 몬테카를로 랠리 미니에 대한 찬사였다. 

마지막으로 선택된 뉴 미니의 모습은 1997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 전날 밤 창고에 있는 무대에서 잠시 드러냈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프리뷰를 보러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아타고 달렸지만 붐비는 군중 속에 갇혀 발이 묶였던 것을. 그 이후 미니에 대한 기대는 거의 3년 반 동안 정점을 찍었다. 

그 짧았던 공개는 텔레비전 뉴스 방송을 탔는데, 트위터가 발명되기 10여 년 전이라 큰 화제가 됐다. 그리고 영국인들의 환호를 끌어내는 ‘쿨 브리타니아’(고대 로마 시대에 영국 땅을 이르던 말, 보수당의 18년 장기집권에 종지부를 찍게 하면서 1997년에 집권한 토니 블레어가 ‘새로운 노동당, 새로운 영국’을 부르짖으며 내걸었던 구호다.)에도 영향을 줬다. 

영상 통화를 하는 이들 중 한 명은 현재 미니 옥스퍼드에서 미래 모델을 구상하는 설계 책임자인 톰 페스타이다. BMW와 협력해 옥스퍼드 공장에서 새로운 차들을 만들 수 있도록 했다. 페스타는 1998년 새로운 미니에 적용될 설계 콘셉트를 검토하는 미팅에 참석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는 BMW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제품 총괄 볼프강 라이츨러를 만났다. “그는 차체 강성을 1도당 3만Nm로 만드는 게 목표라고 했는데, 무슨 스포츠카를 만들려나 생각했죠.” 만약 제품이 제대로만 된다면 비즈니스는 분명 성공할 것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쇠약한 로버그룹보다 미니의 느릿한 구상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BMW에서부터 미니를 더욱 독립적인 브랜드가 될 수 있게끔 해준 원동력이었다. 예를 들면 아우디의 1998년식 아우디 TT 쿠페보다 더 독보적이었다는 것. 미니의 초기 예상은 연간 4만 대에 불과했다. 롱브리지에서의 미니의 조립 계획은 적절한 범위 안에 들어갔다. 

옥스퍼드에서 IT 전문가인 제이슨 필드는 독일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회의에 있었다. BMW가 2000년 3월 로버그룹을 팔겠다고 발표했을 때다. 정부 및 언론의 압력으로 손실을 보고 있었던 로버 자동차들과 롱브리지는 이전 경영진들에게 꼴랑 10파운드에 넘어갔다. BMW에 남아 있는 미니 프로젝트는 옥스퍼드 공장으로 옮겨졌다. 18개월 된 로버 75가 만들어지고 있을 때다. 

결국 75의 옥스퍼드 생산 라인은 통째로 롱브리지로 옮겨졌고 새로운 미니가 대신 옥스퍼드에서 만들어졌다.

피셔는 “지금껏 없던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75의 생산 라인을 해체하고 옮겨야 했죠”라며, “75의 생산 라인은 2000대 가량 만들었어요. 그리고 있는 것들로 미니를 만들어야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옥스퍼드에 있는 팀은 공장을 개조해 BMW 공장으로 다시 짜 맞추는 데 대략 9개월이 걸렸다. 그리고 새로운 모델이 생산 라인을 따라 굴러 나왔다. 

당시 페스타가 말하길 미니는 콜리(현재는 BMW 옥스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로 가고 있다고 했다. 연간 9만 대를 판매할 계획으로 말이다. 필드는 “2000년 여름이나 가을쯤에 나올 것이 분명합니다. 인기를 끄는 건 시간 문제였어요”라고 덧붙이며, “프로토타입을 몰아보니 내가 VIP가 된 기분이었죠. 사람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몰려들 게 틀림없었죠”라고 자신했다. 

 

미니의 다양한 뛰어난 JCW와 GP 차들은 제법 많은 양이 판매됐다

또한, 필드는 덧붙였다. “모든 게 확실해졌습니다. 연간 10만 대에서 11만 대를 판매할 수 있을 것, 그리고 BMW가 차체 압출 공장 있는 스윈던의 모든 생산 역량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75 세단의 저조한 판매량보다 훨씬 높은 가동률이었다. 그저 생산 라인만 바꾼 것이 아니라 풀어야 할 커다란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필드는 새로운 IT 시스템을 설계했다. 네트워크와 전화기가 설치됐다. 필드는 “몇 달 동안 그저 먹고, 일하고, 자는 것이 다였습니다”라고 말했다. 

BMW UK의 제조 커뮤니케이션 매니저 킴벌리 라구시스는 가장 최신의 BMW 공장은 산업적 관계를 완전히 재부팅할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쪼개진 미니를 통합하려면 “관리에 대한 많은 변화가 있어야 했고 거기엔 새로운 패턴들도 포함됐다”고 말했다. 

공장은 한해 12만5000대의 75를 생산해낼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생산 라인 팀은 좁은 공간에서 제한된 시간 안에 미니를 만들어 내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BMW를 놀라게 한 점이다. 

페스타는 “초기에는 모든 것을 시도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고, 정말 대단했다. 하면 된다의 정신이 미니에 깃들었다”며, “옥스퍼드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느껴졌고 항상 우리가 찾아왔던 것”이라고 말했다. 

페스타에 따르면 로버 산하에 있는, 열악한 환경에 있는 롱브리지의 관계에서 탄생한 콜리의 결과물이었다고 말했다. “로버의 태도는 종종 돈을 쫓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설계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줬죠.”

미니 팀 멤버들이 이 시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듣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골격 생산 라인을 밀어 붙여야만 했던 파일럿 프로덕션(시험 생산)의 미니를 처음으로 공개하기도 했다. 

 

밀레니엄이 찾아왔을 때부터 옥스퍼드는 BMW 미니의 고향이 됐다

옥스퍼드는 슈퍼차저의 쿠퍼 S를 포함해 서둘러 새로운 모델들을 추가했다. 페스타는 드롭탑 미니 모델이 매우 중요했었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카브리오의 출시는 도전이었습니다. 처음에 카브리오는 라인업에 없었죠. 따라서 공장에 새롭게 추가할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페스타는 “많은 작업들이 추가됐습니다. 실과 전반적으로 차체 강성을 높여주는 작업들 말이죠. 클럽맨은 내가 이끈 첫 번째 프로젝트였습니다. 한쪽만 한 개가 달린 측면 도어뿐 아니라 양쪽으로 갈라져 열리는 리어 도어를 처음으로 달기도 했습니다”고 말했다.

트렁크 문을 거대한 테일라이트 위로 닫히게 만드는 일 등의 보디 설계는 도전이었다. 페스타는 “BMW의 실링, 방수 기술을 가져다 썼다”고 말하기도 했다. 

옥스퍼드의 명성은 “땀 흘리는 자산”이라는 말로 이어졌다. 거기엔 세 가지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가 있었다. 

페스타는 미니 E를 “가장 비용 효율적인 프로젝트 중 하나”라고 말했다. 흥미로운 아키텍처의 전동화와 온보드 진단 데이터가 작동하는 기능을 포함하고 있다. 

”백 명의 고객에게 그 차를 빌려줬습니다. 그리고 실도로 주행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죠. 돌아온 피드백으로 사람들이 EV에 어떻게 적응했는지를 알게 됐습니다.“

 

2008년의 일이었다. 장난감 같은 차가 아니라 조용하고 부드러운 제대로 된 차였다.

옥스퍼드가 BMW 그룹 내에서 주도했던 또 다른 프로젝트는 미니 로드스터와 쿠페 형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솔직히, 땅콩 프로젝트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차들은 수집가들의 차가 됐습니다.” 페스타는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 시키는 작업이었지만 시제품 없이 제작된 첫 BMW 파생 모델이었습니다. 3D CAD(컴퓨터 지원 설계 프로그램) 작업에서 생산 도구를 바로 사용했어요. 가상현실 기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는 이 두 대의 차에서 교훈을 얻었죠”라고 말했다. 

로드스터는 또한, 3D 프린터를 사용해 프로토타입을 만든 BMW 그룹의 첫 번째 차다. 디지털 파일에서 레인 채널을 시연했다. 미니의 추종자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많은 비난을 쏟아냈지만 두 모델은 9만 대 정도를 팔아치우는 쾌거를 거뒀다.

옥스퍼드의 13년 정도는 BMW 제국에서 짧은 기간 판매, 혹은 많은 맞춤형 모델들을 낳았다. 고성능의 존 쿠퍼 웍스 모델도 그중 하나다. 업마켓 페닌슐라 호텔을 위한 ‘쇼핑 스페셜’ 모델로 오직 20대만 제작했다. 롤스로이스 트림의 미니 굿우드 버전 등과 JCW GP 하드코어 핫 해치라인을 구축한 것이다. 

페스타는 “작은 차로 수익을 내는 것은 항상 도전입니다. 어떻게든 사업성을 띠어야 했죠”라고 말했다. 2013년 옥스퍼드가 완전히 BMW의 새로운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어렵게 시작한 3세대 미니 해치백을 소개했다.

미니는 뿌리 깊은 성격의 변화를 거쳤고 다양하면서도 작은 패밀리차에서부터 성장했다. 그리고 종종 보다 높은 품질로 간주되는 존재감을 드러냈다. 

 

미니 카브리오는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크게 성공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미래에는 어떤 모습일까?

램프카는 미니가 이미 고급차 시장에 들어가 있다고 자랑하고 있더라도 미래에는 더 좋은 자리를 위해 뛸 것이라고 말했다. “프리미엄은 크기를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미니는 다른 경쟁자가 없는 상태죠. 미니의 가치는 더 오를 것입니다. 미니의 저가형 버전은 매력을 잃을 겁니다. 대량 생산 체제는 미니의 감각이 없으니까요.” 

2020년 팬데믹이 강타했을 때 미니는 전 세계 29만2000대를 판매했다. 2019년 대비 16%가 증가한 수치다. 하지만 평균 연간 판매량은 34만5000대이기 때문에 비교적 감소한 기록이다. 

“현재 세일즈 기록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램프카는 말했다. “각 미니에서 마진을 남기는 것은 다른 모델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찻값의 20%가 고객이 고른 옵션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 모델에서 돈을 법니다. 차들은 적힌 가격 그대로 팔리지 않죠.” 실제로 지난해 2만565대의 미니가 JCW 모델로 판매됐다. 

램프카는 덧붙였다. “우리는 적당량을 만듭니다. 절대 남았던 적이 없습니다.”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이다. “독일에서는 고객 주문 미니를 받기 위해 3개월에서 6개월가량 기다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영국 브랜드와 관련이 있는 두 가지 사실을 관찰했다. 첫째는 미니의 장점 중 하나는 BMW가 기대하고 관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매자들은 그들만의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섀시가 특출나게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브랜드의 일부인 셈이다. 

램프카는 미래의 자동차 시장이 틈새시장을 개척하고 모든 경쟁사를 추격하며 끊임없이 볼륨 확대만을 위해 성장하는 시대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미래는 비교가 안 되는 자동차가 살아남는 것이다. 

“예를 들어 로버 75는 다른 차와 너무 ‘비교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브랜드는 오늘날 좀 더 좋은 포지션을 갖고 있죠. 많은 완성차 제조사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롤스로이스가 얼마나 많은 차를 팔아서 럭셔리 브랜드가 될 수 있었을까요?” 램프카가 던진 질문이다. 

램프카는 레인지로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국의 차들이 얼마나 고유한 장점이 있는지에 대해 보여주는 좋은 예다. 특히, 고급차 시장에서 그리고 붐비는 세그먼트의 경쟁을 피할 수 있을 때 말이다. 

그는 "미니의 미래는 현행 라인업에서 하이브리드 또는 순수전기차로 20%가 채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차세대 미니가 나오는 2023년 이후의 일이다.

또한 중국에서 장성자동차와 함께 50-50으로 추진하고 있는 미니 EV 프로젝트는 해외 시장을 위한 주문 맞춤형 솔루션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미래를 위한 목표이기도 하다.

“현재, 중국에서 수입하는 미니는 현지에서 생산한 BMW 3시리즈와 사실상 같은 가격입니다. 하지만 전세계 미니는 충분히 전동화가 진행될 것이며, 지극히 도시적인 브랜드가 될 것입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