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창간된 오토카는 어떻게 이동 혁명을 이끌었나
상태바
1895년 창간된 오토카는 어떻게 이동 혁명을 이끌었나
  • 데이비드 버제스-와이즈(David Burgess-Wise)
  • 승인 2020.12.23 17: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표적인 자동차 역사학자 데이비드 버제스-와이즈(David Burgess-Wise)가 어떻게 125년 전, 한 젊은 영국인이 자동차에 관한 잡지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변화하면서 새로운 세계 산업의 주요 부분이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동차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자. 도로교통이 보행자, 자전거와 마차의 속도로 움직이는 세상. 그렇다고 결코 조용한 세상이 아니다. 소음이 다를 뿐이다. 거리에는 행상들의 고함소리, 자갈길을 달리는 말발굽소리와 쇠테바퀴 소리가 요란하다. 따르릉거리는 자전거와 증기차의 기적소리가 어우러진다. 아무튼 별천지다.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치는 수 백 만의 말이 도로를 달리며 시가지를 어지럽힌다. 장거리 여행은 기차시간표가 완전히 좌우했다. 그리고 제일 가까운 철도역에서 불과 10km 떨어진 소도시가 까마득히 멀기만 했다. 

지난 100여 년에 걸쳐 서서히 바뀌어온 저쪽 세상이다. 철도가 등장하면서 중세 이후 최대의 교통혁명을 치르던 세상이었다. 실제로 도로를 달리는 증기차가 있었다. 무게가 몇 톤이나 되고 덩치가 큰데다 동작이 굼떠서 여간 힘들지 않았다. 게다가 쇠바퀴가 노면을 갈아엎었다. 결국 엄격한 교통법이 나와 증기차의 속도는 사람이 걸어 다니는 것과 다름없었다. 더구나 교통법에 따라 붉은 깃발을 든 사람이 ‘제 힘으로 가는 차’ 앞을 반드시 앞장서야 했다. 

바로 1895년 영국의 실상이었다.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만들어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산업혁명 중심축의 실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유럽대륙의 라이벌 프랑스와 독일보다는 엔진을 단 자동차를 채택하는데 10년이나 늦었다. 당시 영국에는 독자적인 자동차 메이커가 단 하나도 없었고, 전국에 자동차는 겨우 6대뿐이었다. 그들은 거리에 나올 때마다 법을 어기게 마련이었다. 영국 의회가 가볍고 편리한 자동차를 무게 5톤이나 되는 증기차와 똑같이 다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동차에는 반드시 운전자와 기술자가 있어야 하고, 차가 온다고 경고하는 사람이 앞장서야 했다. 

그러던 그해 말 어느 날 오후였다. 영국 잉글랜드 중부의 코번트리 시가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코번트리는 당시 영국 자전거 산업의 중심지였고, 대성공을 거둔 인쇄회사 아일리프, 산즈 & 스터미의 본고장이었다. 아일리프는 대표적인 자전거 잡지 <더 사이클리스트>(The Cyclist)를 펴냈다. 이 잡지사 직원 모두가 창문으로 달려가 내다봤다. “와, 모터카다!” 일제히 고함이 터졌다. 

이상한 기계의 조종간을 해리 로슨이 잡고 있었다. 로슨은 <더 사이클리스트>의 편집자 헨리 스터미를 만났다. 스터미는 근엄한 표정을 한 전직 교사였다. 그는 나이 22세였던 1879년 오리지널 <더 바이시클리스트>의 독립 핸드북이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그리고 이 잡지를 그 뒤 번창하던 아일리프 회사에 팔았다. 아일리프는 코번트리에서 생산되는 자전거의 석판인쇄를 해냈다. 

젊은 윌리엄 아일리프는 이익이 두둑한 주말 시장을 잡을 새 잡지를 만들려고 서둘렀다. 한데 그때까지 알맞은 소재를 생각해낼 수 없었다. 그러다가 자동차를 보고 생각했다. “스터미 씨, 저게 언젠가 도로를 굴러다니게 될까요?” 아일리프는 로슨이 떠나자마자 물었다. 

 

자동차 산업은 1890년대에 급속히 팽창했다

“틀림없어요. 아일리프 씨.“

“그럼 잡지를 만들만한 자동차 관련 자료가 있습니까?” 

“물론이죠, 아일리프 씨.”

“그럼 자동차에 관한 신문이나 잡지를 만듭시다. 내일, 당장!” 

하지만 새 간행물의 이름을 무엇으로 해야 할까? 스터미가 온갖 가능성을 찾아 헤맸다. 차는 너무 새로운 물건이어서 무엇이라고 불러야할지 아무도 몰랐다. “말 없는 수레”(Horseless Carriage) “스스로 움직이는 수레”(Automobile Carriage), “자동식 수레…”(Automatic Carriage…) “오토카!”(Autocar!) 영국 자동차 잡지 <오토카>(Autocar)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아리송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를 위해 새 잡지에 부제목을 달았다. “기계로 움직이는 수레를 위해 발간되는 정기간행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자동차 잡지의 역사상 이처럼 마감이 짧은 적은 없었다. 1895년 11월 2일 토요일, <더 오토카>(The Autocar) 창간호가 나왔다. 겨우 12쪽짜리 잡지가 가판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1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아일리프와 스터미가 가진 자동차의 미래에 대한 믿음은 더없이 굳어졌다. <오토카>는 자동차 발달사와 보조를 함께 했고, 때로는 자동차 발달사의 틀을 잡는데 한몫을 했다. 오늘날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이 잡지가 생동감이 넘치고 미래지향적이라는 데 있다. 코번트리에서 100여 년 전 토요일에 그랬던 바와 마찬가지로. 그야말로 <오토카>는 자동차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전 세계 자동차 잡지 가운데 <오토카>와 웬만큼 역사를 비교할 잡지는 찾을 수 없다. 이 잡지는 영국 자동차산업보다 6주일이나 앞섰다. 영국 자동차산업의 공식 탄생일은 1896년 1월 14일. 다임러가 코번트리에 자리 잡은 날이었다. 그보다 더 오래된 자동차 메이커는 메르세데스-벤츠와 푸조 둘뿐이었다.

 

헨리 스터미(Henry Sturmey)는 1895년에 오토카(Autocar)를 설립해 1901년까지 이끌었다

창간 첫 해 <오토카>는 사실상 박해받는 소수의 잡지에 지나지 않았다. 1896년 11월 14일에 와서야 영국정부는 교통법을 바꿔 자동차 운전자들에게 ‘도로의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마저 제약된 자유였다. 여전히 전국적으로 제한속도는 19km였다. 그러나 악명 높은 ‘붉은 깃발 든 사람’(Red Flag Man)은 영원히 사라졌다. 이 ‘해방일’을 축하하기 위해 해리 로슨의 자동차 클럽은 런던에서 브라이튼까지 75km를 달리는 자동차 투어를 벌이기로 했다. 

지금도 왕립 자동차 클럽은 1905년 이전의 클래식카를 중심으로 런던-브라이튼 달리기를 해마다 열고 있다. 처음 런던-브라이튼 달리기를 열었을 때 <오토카>는 특별호를 냈다. 모든 기사를 붉은 글씨로 짠 ‘붉은 글씨의 날’(Red-Letter Day)이었다. 특별호는 수천 부가 팔려 그동안 틀어 막혔던 자동차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던가를 웅변했다. 해방일 달리기 출발선에는 윈칠시 백작이 나왔다. 그는 로슨의 자동차 회사 그레이트 호스리스 캐리지 컴퍼니의 이사였다. 그리고 로슨 회사는 다임러와 코번트리 모터 밀즈 공장을 함께 쓰고 있었다. 윈칠시 백작은 스타트 라인에서 그 동안 자동차 앞을 흔들고 다니던 붉은 깃발을 찢었다. 

당시의 보도 내용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대략 33대가 브라이튼으로 출발했다. 그 중 22대가 제때 도착하여 그날 밤 축하 만찬에 참석했다. 하지만 몇 년 뒤 <오토카>는 당시 상황을 솔직히 털어놨다. 그에 따르면 그 중 몇 대는 기차에 실려가 만찬장에 도착했던 것이다!

출발과 동시에 <오토카>는 국제적인 기사를 실었다. 창간호에 미국의 첫 실용차 듀리에이(Dureya)를 다뤘다. 이 자동차는 미국사회를 뒤바꾸고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도구로 자리를 굳혔다. 지금 자동차 없는 미국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에는 미국이 자동차 발달사에선 유럽에 까마득히 뒤져 있었다. 몇몇 미국 선구자들이 실험용 차를 만드는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렇지만 자동차를 만들어 파는 메이커는 단 하나도 없었다. 

1895년 미시건주의 디트로이트에는 자동차가 단 한 대도 없었다. 따라서 장차 이 도시가 ‘모타운’(Motown=자동차 도시)이라 불리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던 6월의 어느 늦은 밤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실험용 사륜차 쿼드리사이클을 몰고 잠든 디트로이트를 처음으로 달렸다(인적이 없는 시간이어서 천만다행이었다. 포드는 그 차에 브레이크를 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가올 새롭고 거대한 산업을 알리는 전령이었다. 

1896년 듀리에이 형제는 ‘경이로운 미국 자동차’를 한정 생산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럴 때에도 <오토카>는 알맞은 헤드라인을 뽑아내는 기막힌 재능을 발휘했다. 그런데 자동차는 본격적인 교통수단이기보다는 서커스의 곡예장비쯤으로 여겨졌다. 

 

1907년 롤스로이스는 정교함으로 우리의 테스터들을 놀라게 했다

<오토카>는 듀리에이를 기사로 실었다. 자동차 제작자가 기사를 쓰기는 했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토카> 도로 시승기 제1호였다. “듀리에이는 깔끔하고 탄탄하다. 자전거처럼 쉽게 조종할 수 있다. 스티어링 레버 하나로 출발하고 정차한다. 따라서 한 손으로 차 전체를 조절할 수 있고, 앞좌석 양쪽에서 운전할 수 있다. 차는 마음대로 앞뒤로 갈 수 있고, 말과는 달리 정확하게 다룰 수 있다.”

1895년에는 핸들링 문제가 지금과는 아주 달랐다. “그밖에 ‘손을 대지 않고도’ 한쪽 바퀴가 큰 돌을 넘어갈 수 있어 안전했다. 따라서 뜻하지 않게 스티어링이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않고, 승객을 뒤집어엎는 일은 없었다. 지금까지 사용되던 스티어링과는 달랐다.”

<오토카>가 나왔을 때 자동차는 갓 태어났을 뿐이었다. 따라서 자동차를 둘러싼 공인된 용어가 없었다. 영국의 모험가 데이비드 샐러먼즈 경은 푸조를 갖고 있었다. 당시에 그는 바로 얼마 전 영국 최초의 모터쇼를 열었다(물론 <오토카> 창간호에 실렸다). <오토카> 기자가 그 차를 소개하면서 사용한 용어를 보자. ‘출발과 정지 레버’, ‘속도 변경 레버’, 그리고 엔진 기어를 해제하기 위한 풋레버‘라고 했다. 

<오토카>의 특집 기사에는 새로운 차를 기술적으로 분명하게 묘사하는 내용이 급속히 늘어났다. 따라서 자동차 용어를 새로 만들어내는데 큰 도움을 줬다. 아울러 영국 자동차산업을 육성하는 데도 한몫을 했다. 가령 영국 최초의 자동차 메이커 다임러가 1896년 1월 창립됐다. 그때 <오토카> 창업자 헨리 스터미가 이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첫 번째 도로 주행 테스트 대상은 1928년 오스틴 세븐이었다

자동차 시승기의 원조

초창기부터 <오토카>는 글자 그대로 수천 대의 차를 대상으로 실용적인 기사를 제공했다. 1928년 처음으로 도로시승에 번호를 붙이기 시작했다. 그 뒤 실로 엄청난 실적을 쌓았다. <오토카> 기자들이 처음부터 스티어링을 잡은 것은 아니지만 시승기사만은 창간초기부터 실었다. 

일단 선구자들의 용감한 시대는 1900년경 막을 내렸다. 게다가 도로에 나오는 각종 모델이 갑자기 늘어났다. 유럽 자동차 오너 가운데 상당수는 운전기사를 고용했다. 따라서 <오토카>의 초기 도로 시승기는 드라이버가 아니라 오너의 시각에서 씌어졌다. 초기 보도는 진정한 시승기라기보다 도로주행 인상이었다. 그렇지만 <오토카>의 판정은 불멸의 명성을 남겼다. 

그때가 1907년 초였다. <오토카> 기자가 신형 40/50마력 롤스로이스 ‘실버 고스트’를 시승하고 이렇게 썼다. “제3단으로 차를 몰고 있으면 어떤 속도든 엔진을 느낄 수 없다. 그리고 달리든 서 있든 8일에 한번 태엽을 감는 시계소리보다 더 크게 청신경을 자극하지 않았다.”

그보다 50년 뒤 광고업자 데이비드 오길비가 쓴 글이 더 분명하다고 할지 모른다. “신형 롤스로이스가 시속 100km로 달릴 때 가장 큰 소리는 전기시계에서 나왔다.” 하지만 <오토카>가 까마득히 먼 옛날에 이미 써먹은 표현에 불과했다.

1910년경 새롭고 좀 더 쉽게 살 수 있는 차가 나오면서 오너 드라이버가 점차 늘어났다. <오토카>에는 ‘직접 손을 댄’ 새로운 시승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배질 H. 데이비스가 쓴 시승기가 1910년의 가장 뛰어난 글로 꼽혔다. 그는 여러 해에 걸쳐 자주 <오토카>에 글을 실었다. 때로는 ‘런어바우트’(Runabout=경쾌한 소형차) 또는 익시온(Ixion=헤라를 범하려다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불의 수레바퀴에 묶인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이라는 별명으로 글을 썼다. 영국 성공회의 참사원이었던 데이비스는 프리랜서로 활약하며 수입을 보탰다. 

1910년 데이비스는 초기 모델 T 포드 한 대를 공무용으로 빌렸다. 스코틀랜드에서 열리는 6일간의 모터사이클 경기에서 심판을 보기 위해서였다. 2천735km를 달린 뒤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감회는 남달랐다. 그 차는 220파운드짜리로 당시 영국 시장에서 가장 싼 차로 꼽혔다. 모델 T의 탁월한 성능을 담은 장거리 시승기가 <오토카>에 처음 실렸다. 

당시 포드의 페달 작동식 주전원 기어박스에는 2단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모델 T보다 훨씬 비싼 차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그럼에도 모델 T는 물에 잠긴 도로, 가파른 고개와 깊이 패인 도로를 다른 차보다 훨씬 잘 달렸다. 데이비스의 표현이 구식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판정의 성실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스피드와 파워, 그리고 정숙성, 신뢰성, 경제성과 톱 기어의 힘찬 상승세는 우리에게 큰 감명을 줬다. 우리는 영국 북부의 높은 절벽과 황무지 위를 달리며 더할 수 없이 모델 T를 험하게 다뤘다. 이로 미뤄 이 차는 일상생활에서 뛰어난 구실을 하리라 짐작할 수 있다.”

 

모터리스트들은 50마일 여행으로 1896년 주행 규제 해방을 축하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모델 T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데이비스의 열성적인 보도가 포드의 영국 내 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1911년 헨리 포드는 북아메리카 이외에 처음으로 공장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영국의 잉글랜드 북서부에 있는 맨체스터에 들어선 공장이 영국 시장에 내놓을 포드를 만들었다. 게다가 데이비스는 회고적인 기사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온 세상이 알다시피 얼마 뒤 허약한 차체를 강화했고, 덕택에 헨리 포드는 포드 T를 1천500만 대나 팔았다.” <오토카>의 유명한 판단력을 보여주는 초창기의 실례였다. 모델 T 포드는 비싸지 않은 교통수단으로 세상을 확 바꿔놓았다. 때문에 1999년 국제심사위원단이 포드 모델 T를 ‘세기의 차’(The Car of the Century)로 선정했다. 말을 바꿔 ‘20세기 최고의 차’로 뽑은 것이다. 

그밖에도 <오토카>의 시승기가 역사가 된 본보기가 1920년 1월에 나왔다. 제1차 대전 중이었다. <오토카> 기자 S.C.H. ‘새미’ 데이비스는 항공기 엔진 검사관으로 복무했다. 영국 해군의 급성장하던 왕립 해상공군부대였다. 거기서 역사에 남을 디자이너 W.O. 벤틀리를 만났다. 그가 설계한 BR1과 BR2 로터리 엔진은 영국의 가장 유명한 전투기에 장착되었다. 

벤틀리는 고속 스포츠카를 만들 꿈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 1918년 11월 평화가 찾아오자 프로토타입 작업에 들어갔다. 당연히 새 차 시승 제의를 받은 첫 번째 저널리스트는 새미 데이비스였다. 데이비스가 신형 3L 벤틀리를 다룬 2쪽짜리 도로시승기는 자동차 기사의 고전이 됐다. “벤틀리의 스피드를 당국은 못마땅하게 여겼고, 법적으로는 제약을 받고, 발각되면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벤틀리의 가장 뛰어난 특징이었다. 오로지 이 차만이 고속 주행의 위대하고 독특한 감각을 완전히 살릴 수 있다. 시적으로 까마득히 솟아오르는 황홀감이다. 금방 눈앞에 가로수가 늘어서고 인적이 드문 눈에 익은 긴 도로가 펼쳐진다. 마치 본능처럼 차에 탄 모든 사람이 시트에 깊숙이 몸을 박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자아!’ 부르릉거리던 배기음이 강렬한 포효로 바뀌었다. 하얀 도로가 차를 향해 달려들었고, 모두의 어깻죽지가 좌석 등받이에 찰싹 달라붙었다.”

데이비스의 시승기가 벤틀리를 1920년대 영국 스포츠카의 위대한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한편 벤틀리는 아직 애송이 기업이라 대량생산할 자금이 없어 애를 태웠다. “그런 기사에 힘입어 10배를 넘는 차를 팔 수 있을 테지만, 차를 만들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오토카>의 시승기만이 벤틀리 브랜드의 명성을 날린 유일한 계기가 아니었다. <오토카>에는 독창적인 미술가 F. 고든 크로스비가 있었다. 그는 벤틀리의 유명한 날개달린 ‘B’ 배지를 그렸다. 지금도 벤틀리의 라디에이터를 장식하고 있는 바로 그 엠블렘이다. 

그런데 새미 데이비스는 벤틀리 브랜드에 영광을 안겨줄 그보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0년대 초에 이르러 <오토카>의 시승기는 좀 더 탄탄한 틀을 잡기 시작했다. 표준이 될 시승 코스를 결정했다. 현재 <오토카> 본사가 있는 런던 남서부의 다양한 시가지와 시골 도로를 코스에 넣었다. 아울러 시승 코스 중간지점에 있는 브룩랜즈 서킷을 이용했다. 당시 영국 도로에서는 여전히 제한속도 시속 32km가 적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브룩랜즈 서킷에서 합법적으로 최고시속을 시험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트랙은 영국 자동차계의 시험시설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각 차의 성능을 비교할 수 있는 난코스를 마련했다. 

 

<오토카>는 포드 모델 T의 성공에 기여했다

이때부터 <오토카>는 표준형 2.2L 탱크로 연비 조사를 시작했다. 그와 함께 승차감과 핸들링을 검사 항목에 넣었다. 당시 속도계는 법적으로 달아야할 계기가 아니었다. 때문에 가속이나 코너링 속도를 계산하기는 쉽지 않았다. 시승기가 권위를 갖추려면 무언가를 추가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 <오토카>의 엘리트 4인방이 등장했다. 새미 데이비스, 몬테이크 툼스, H.S. 린필드와 제프리 스미스. 그들은 영국 시장에 나온 온갖 모델의 성능을 비교할 한층 과학적인 방법을 고안해냈다. 제동, 가속과 연비 수치는 표준방식에 따라 계산했다. 차의 규격은 표준 ‘대형차’(실제로는 롤즈로이스 팬텀 세단)와 비교해서 결정했다. 시승차의 옆모습 뒤에 실물 크기의 팬텀 윤곽을 두고 가늠했다. 

1928년 4월 13일 새로운 시승기가 처음 <오토카>에 나왔다. 위대한 영국차 가운데 또 다른 모델 오스틴 세븐(Austin Seven)이 마침 시승대상이었다. 최고시속 75.6km, 시속 40km→ 0 정지거리 14.6m, 연비는 15.0km/L였다. 시승방식과 비교평가 기준은 꾸준히 개선됐다. ‘대형차’의 기준이었던 팬텀의 윤곽은 치밀하게 계산된 그림으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시승차의 실내 규격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시승기의 신중한 표현 뒤에 불안요인을 숨기는 경우가 있기는 했다. “제동력은 좋다. 그러나 시속 50km에서 최고의 제동력을 끌어내려면 브레이크를 잘 조정해야 할 것이다.” 뷰익 스트레이트 에이트의 1933년 시승기의 일부다. 여기서 시승자는 말끝을 흐리고 있다. 하지만 <오토카>의 시승방법과 자료산출방식은 알찼다. 1930년대에 꾸준히 이뤄진 기술발전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었다. 싱크로메시 기어가 들어와 구형 ‘크래시’ 기어박스를 몰아냈다. 독립 앞 서스펜션이 들어왔고, 처음으로 모노코크 보디가 등장했다.

제2차 대전 뒤 새로운 세대의 시승방식과 시승자들이 등장했다. 그때부터 브룩랜즈는 사용할 수 없게 됐다. 극비 공군기 제작공장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낡은 활주로를 시험장으로 이용했다. 뒤이어 완전히 새로운 시험시설 MIRA(자동차산업 연구협회)가 태어났다. 그즈음 영국의 주요 메이커 밀집지역에 가까운 미드랜즈에서 문을 열었다. <오토카>는 그곳으로 시승코스를 옮겼다. 더 많은 정보를 요구하는 독자들의 목소리는 커져만 갔다. 그에 따라 <오토카> 시승기의 인기는 가파른 상승곡선을 타고 올랐다. 1960년대 말 <오토카>가 시승을 할 때면 적어도 1천600km를 달렸다. 시승에는 6명의 기자가 한 팀을 이루고, 그 중 한 기자가 보고서를 작성했다. 물론 5명의 동료로부터 시승소감을 종합했다. 

대체로 시승에는 일상적인 운전이 들어갔다. 사무실로의 출퇴근, 업무용 운행, 단거리 여행을 포함했다. 그러나 단 하루만은 온전히 MIRA 성능시험에 바쳤다. 런던을 출발하여 고속도로를 타고 오전 10시에 MIRA에 도착했다. 그러면 시승팀이 ‘제5번 바퀴’를 차에 달았다. 원심력하의 타이어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 전기 속도계로 시속 16~225km에서 오차 0.32km의 정확성을 자랑했다. 

MIRA는 길이 5.0km의 고속 뱅크 서킷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 서킷의 길이 1.6km 쌍둥이 직선코스에서 최고시속과 가속성능을 측정했다. 연비는 전자-기계 계기로 쟀고, 다음으로 제동력과 회전반경을 밝혀냈다. 그날 하루는 MIRA의 특수 노면에서 그립과 서스펜션 시험으로 마무리됐다. 물론 그 뒤로 이런 시험은 모두 전자장비로 하고 있다. 그리고 최신형 모델의 너무나 매끈한 보디에 제5의 바퀴를 달기는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1980년대에 라이츠-데이톤 코레비트의 속도측정 장치가 대신 들어섰다. 이 장비의 집게를 뒤쪽 번호판에 연결해두면 광선으로 속도, 거리와 시간을 측정한다. 요즘 <오토카> 시승팀은 베드퍼드셔에 있는 현대식 밀부르크 테스트 트랙을 사용한다. 하지만 최고속 슈퍼카의 궁극적인 속도시험을 할 때에는 이탈리아의 나르도 서킷으로 달려간다. 시속 320km를 넘는 슈퍼카를 길이 12km의 뱅크 오벌에서 몰아붙인다. 

그러나 하이테크가 어지럽게 날뛰는 이 시대에도 <오토카>는 역사의식을 굳게 지키고 있다. 1995년 11월 <오토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았다. 그때 편집장 스티브 크로플리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양산차의 스티어링 휠을 잡았다. 창간주역 헨리 스터미가 몰았던 것과 똑같은 1897년형 다임러였다. 젊은 기자들이었다면 105년이 된 노병의 빅토리아식 기술을 비웃었을지 모른다. 크로플리는 최고시속 39km로 달린 뒤 이렇게 선언했다. “뛰어난 성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자동차 기술은 1895년 이래로 크게 그리고 빠르게 변화해 왔다

자동차계 뉴스의 선두주자

창간과 더불어 <오토카>는 자동차계 내부 정보수집에 놀라운 기량을 발휘했다. 때문에 자동차 저널리즘계에서 선망과 명성을 한 몸에 받았다. <오토카>는 당초부터 영국만이 아니라 국제무대를 취재대상으로 삼았다. 처음으로 임명된 특파원의 한 사람이 미국에서 활약한 기술전문 기자였다. 그는 ‘휴도 돌너’라는 가명(본명은 아놀드)으로 글을 썼다. 당시 <오토카>의 외부 필자는 엄격하게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명을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돌너는 기술문제를 알기 쉬운 용어로 풀어쓰는 전통을 세웠다. 그 뒤 <오토카>는 이 전통을 굳게 지키고 있다. 1898년 그는 글을 쓰는 목적을 이렇게 설명했다. 기술문제를 “쓸모 있는 세부를 빠뜨리지 않고 단순하게 그려 보이는데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복잡한 전기와 기술문제를 학문적으로 늘어놓는 것보다 독자들에게 훨씬 유익하다고 믿는다.”

국내와 해외에서 <오토카>는 한결같이 업계의 신뢰를 얻었다. 따라서 으레 내부소식을 가장 먼저 보도하고, 기업 최고위층 인사와 독점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토카>는 빼어난 첩보망을 갖고 있다. 덕택에 새로 나올 모델을 누구보다 먼저 알 수 있는 내부 정보통이 있다. 

1896년 11월 ‘붉은 글씨의 날’(Red Letter Day) 특별호는 실로 역사적인 기록이다. 초창기부터 <오토카>는 글자 그대로 수천 수만의 특종 사진 제1호를 발표했다. “<오토카>의 미술가가 서둘러 그린 스케치가 영국에서 처음 만든 다임러”였다. 그 전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22년 <오토카>가 50주년을 맞았을 때였다. 재규어 카즈의 창업자 윌리엄 라이언즈 경이 <오토카>의 편집능력에 대단한 찬사를 보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오토카>는 자동차를 단순한 교통수단 이상으로 보는 모든 사람을 위해 자동차의 역사를 기록했다. 카마니아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자동차 발달에 크게 이바지하는 공적을 세웠다.” 나아가 <오토카>의 편집정책을 이렇게 묘사했다. “견해는 건전하고, 그 견해를 밝히는데 두려움이 없다. 기술적인 기사와 설명은 정확하다.” 이 말은 당시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대로 적중하고 있다. 

그밖에 또 다른 전통을 들어보자. <오토카>의 역사만큼 오래된 공장 탐사기사가 그것이다. 사상 최초의 탐사기사는 1890년대의 “그레이트 호스리스 캐리지 컴퍼니에 관한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었다. 그 뒤 1990년대의 “부가티의 최후통보” 사이에는 거의 100년의 간격이 있다. 하지만 밑바닥에 깔린 원칙은 같다. 핵심적인 내부 인사와 정보에 접촉하는 정통한 필자에 의존하여 허구에서 사실을 걸러내어 진실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 

<오토카>는 장기간에 걸쳐 빼어난 특파원을 수없이 투입했다. 그 중에도 눈부신 인물이 W.F. 브래들리. 그는 제1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오토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1903년부터 자동차계에서 놀라운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03년 그는 프리랜서로 파리-마드리드 ‘죽음의 레이스’를 보도했다. 1905년 브래들리는 파리에 본거지를 둔 <뉴욕 헤럴드>에서 일했다. 뒤이어 뉴욕에서 나오는 자동차 잡지 <오토모빌>에 14개월 있었다. 그때 그는 미국 동부지방의 모터스포츠계 주요 인사를 모두 만났다. 1909년 프랑스로 돌아온 뒤 <헤럴드>의 자동차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이때 대표적인 메이커와 기술자들을 남김없이 사귀었다. 아울러 갓 태어난 항공계와도 탄탄한 인연을 맺었다. 덕택에 루이 블레리오의 역사적인 영불해협 비행을 취재한 소수 기자단에 끼었다. 창사 이후 <오토카>에서는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찬란하게 빛났다. 그 중에도 S.C.H. ‘새미’ 데이비스만큼 뛰어난 기자도 드물었다. 그는 모터스포츠의 황금기라는 1919년에서 1951년까지 스포츠 팀장으로 활약했다. 동시에 영국 유일의 레이스 서킷 브룩랜즈에서 정규 드라이버로 활약했다. 뛰어난 드라이버였던 그는 1922년 애스턴 마틴이 브룩랜즈에서 32개의 세계 및 클래스 신기록을 수립하는데 한몫을 했다.

 

MIRA는 오토카의 뛰어난 도로 주행 테스트 장소임을 입증했다

자동차 디자인계에 미친 큰 영향 

1920년대에 이르자 <오토카>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세계 자동차 잡지계에서 베스트셀러의 정상에 등극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개인의 자동차 활동이 사실상 끊어진 암흑시대였다. 그럼에도 1주일에 5만 부씩 팔리는 기적을 이뤘다. 수많은 강점이 있는 가운데 마법의 미술가 프레드릭 고든 크로스비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다임러의 제도실에서 일하다가 1908년경 <오토카>로 자리를 옮겼다. 미술가로 급속히 성장한 그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여행과 레이스 장면을 그려냈다. 

컬러사진이 널리 퍼지기 이전 1920년대와 30년대에 크로스비는 일련의 레이스 장면을 그려냈다. 그의 작품들은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그 시절 잡지에서 컬러 그림을 보기는 어려웠다. 크로스비의 극적인 그림들은 부록으로 특별히 만들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한때 복사한 그의 그림은 널리 팔려나갔다. 반면 그의 원화는 지금도 수집가들의 손을 거치며 수천, 수만 파운드에 팔리고 있다. 

아울러 그 시대는 망원렌즈 카메라가 없었고, 고속 통신이 불가능한 때였다. 따라서 극적인 사진을 만들기는 불가능했다. <오토카>의 수많은 레이스 기사는 크로스비의 그림으로 생기를 찾았다. 크로스비는 트랙에서 일어난 화끈한 사고를 그려냈다. 드라이버와 관객들로부터 모은 정보를 바탕으로 현장에서 스케치한 장면이었다. 그의 기교는 당대의 카메라를 넘어서는 효과를 냈다. 

아울러 크로스비는 단면도 기술을 개척했다. <오토카>의 유명한 모터쇼 특별호는 신형 섀시의 정교한 그림으로 독자를 압도했다. 다재다능한 크로스비는 정밀한 조각가이며 뛰어난 만화가였다. 장기간에 걸쳐 <오토카>는 모터쇼 특집을 실었다. 크로스비와 함께 유능한 미술가들이 일을 했다. 특히 맥스 밀러가 유명했다. 밀러는 이름난 서적 삽화가의 아들이었다. 그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단면도를 그려냈다. 크로스비가 동작 묘사에서 그렇듯 맥스는 단면도의 1인자였다. 뒤에 그의 희귀한 재능을 핵발전소와 가로돛 범선의 내부 기능을 그려내는 데까지 확대했다. 

21세기 초 팩스와 e-메일이 일상적인 도구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오토카>가 최신 뉴스를 끌어내는 속도는 가히 마법과 같다. 1920년대에는 여객선이 대서양을 건너는데 1주일이 걸렸다. 국제전화가 드물었고 비용이 많이 들었다. 가장 빠른 통신수단은 전보였다. 따라서 <오토카>의 뉴스수집 기술은 가히 기적과 같았다. 

1927년 자동차계에서 가장 고대하던 뉴스는 분명했다. ‘세계를 바퀴 위에 올려놓은 차’ 모델 T는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시대에 뒤떨어졌다. 대량생산의 천재 헨리 포드가 그 뒤를 이을 무슨 차를 내놓을까에 관심이 집중됐다. 1908년 첫선을 보인 뒤 1천500만 대 넘게 만든 ‘세계적인 차’도 마침내 시대에 뒤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포드는 1927년 5월 디트로이트 공장에서 생산을 중단하고 후계차 작업에 들어갔다. 

새 차가 어떤 모습인가는 극비에 붙여졌다. 공식 발표는 12월 2일로 예정됐다. 한데 11월 18일 <오토카>는 신형 포드 모델 A의 세부를 유럽에서는 처음 발표했다. 당시 포드 딜러들마저 새 차가 어떤지를 알지 못했다. 고객들은 초조한 나머지 기계의 제원과 성능이나 가격을 알지도 못한 채 12만5천 대를 주문했다. 

 

엔진 천재 벤틀리가 오토카에서 길을 들였다

<오토카>는 극비에 속한 세부사항을 공개했다. 그 중에는 신형 포드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트라이플렉스 안전유리를 기본 장비로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다른 매스컴보다 너무 앞서간 <오토카> 기사를 영국 일간지가 다투어 보도했다. 일간지 <더 모닝 어드버타이저>는 “우리는 <오토카>의 기사에 힘입어 처음으로 보도하게 되었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12월 1일까지 새 차의 공식 사진은 나올 수 없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오토카> 독자들이 잡지를 열었을 때 새 차의 첫 사진이 실려 있었다. 양산 이전의 프로토타입을 따온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일대 특종이었다. 그런데 포드 공장에서 5천km나 떨어진 <오토카>가 어떻게 해냈을까? 당시의 편집진만이 알고 있었고, 그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1930년대의 <오토카>는 자동차 디자인계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정기적으로 자동차의 보디 디자인을 실었다. 스타일 미술의 초창기에 영국 자동차산업계의 첫 스타일리스트의 연재기사를 받아들였다. 현대적 의미의 디자이너는 C.F. 보베이. 코번트리 싱어의 ‘미술가-기술자’였다. 그의 1931 싱어 ‘케이 도’ 세단은 아르데코 ‘폭포’ 스타일을 살렸다. 그의 첨단 디자인 철학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오토카> 독자들에게 똑똑히 전했다. 모터쇼가 열릴 때면 <오토카>는 으레 디자인의 흐름을 특집으로 다뤘다. 자동차 스타일이 극적으로 변하고, 자가용이 급격히 늘고 있는 시대였다. 그때 <오토카>의 스타일과 장비에 대한 영향력은 엄청났다. 

아울러 실용면에서의 영향력도 막강했다. 1930년대에 이르러 마침내 영국에 운전시험이 도입됐다. 

그때 <오토카>는 초보운전자를 위한 일련의 기사를 연재했다. 운전기술 향상을 위한 길잡이였다.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수많은 자동차 오너들이 자가정비 하기를 좋아했다. 때문에 <오토카>는 ‘인기 있는 차 정비법’을 실었다. 점차 늘어나는 오너드라이버들이 차를 계속 굴릴 수 있는 모든 정보를 간결하게 전달했다. 

1945년 11월 <오토카>는 자랑스럽게 50회 생일을 축하했다. “2천611번째인 이번 호를 맞아 <오토카>는 중단 없는 출간 50년을 경축한다. 심지어 1914~18년과 1939~45년의 두 차례 세계대전도 우리 잡지를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안타깝게도 2차 세계대전 후의 인쇄업계 파업으로 <오토카>가 60주년을 맞기 전에 그 기록은 깨지고 말았다. 

 

<오토카> 편집진은 독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영국 인쇄업체들이 협력을 거부하자 프랑스에서 인쇄하는 비상수단을 동원했다. 1950년의 파업기간에는 8쪽짜리 뉴스판을 단 한번 내기도 했다. 1895년 이후 나온 가장 희귀한 <오토카>였다. 창간호의 마감일은 상상할 수도 없이 짧았다. 이에 비춰 <오토카> 창간호에 단 하나일망정 광고가 실렸다는 사실은 경탄을 금할 수 없다(더구나 광고를 낼 영국 자동차산업이 태어나기도 전이었다). 그 첫 번째 광고는 다임러 엔진을 소개했다. 거기에는 회사 주소나 연락처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당시 해리 로슨은 다임러 엔진의 영국 판매권을 F.R. 심스와 협상 중이었다. 심스는 몇 년 전부터 다임러 엔진을 수입하고 있었지만, 사업은 겉돌고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광고가 곧 잡지의 중요한 일부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오토카>에서 광고의 비중은 아주 컸다. 자동차산업의 발전상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차의 스타일과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는 매력적인 기록이었다. 농민들과 오픈카 드라이버들은 언제 비가 오는지를 알아내는 육감을 키운다. 마찬가지로 <오토카> 기자들은 실제로 나오기 오래 전에 다가오는 경향을 예감하는 독특한 능력을 지녔다. 1958년 유럽에서 자동차 고객들은 일본차를 보기는커녕 들어본 적도 없었다. 1957년 파리 모터쇼에는 후지 프린스 한 대가 덩그러니 나왔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오토카>의 로널드 바커는 멀리 앞을 내다보고 도쿄로 날아갔다. 일본 자동차산업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주요 일본 메이커의 공장을 방문하고 최고경영진을 만났다. 그런 다음 일본차를 폭넓게 평가하는 기사를 썼다. 

처음으로 <오토카> 독자들은 일본회사명을 들었다. 어느 날엔가 ‘포드’와 ‘오펠’처럼 귀에 익게 될 스바루를 알게 됐다. 스바루의 신형 360을 일급 서스펜션, 매끈하고 발랄한 엔진과 알맞은 실내공간과 안락성을 갖춘 차라고 칭찬했다. 그리고 토요타도 빠트리지 않았다. 바커는 토요타의 신형 ‘토요타 코로나’를 몰아보고 사진을 찍었다. 995cc짜리 패밀리카가 발표되기도 전이었다. 토요타가 길이 2km의 뱅크형 테스트 서키트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도 소개했다. 일본 자동차산업은 세계 자동차 제조업계를 휘어잡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젊은 시절의 일본 자동차업계를 이처럼 자세히 보도하기는 처음이었다. 일본 자동차 메이커를 보는 바커의 시각은 특히 예리했다. “수출증가가 일본의 무역균형에 대단히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극동의 동향을 예의 주시해야 한다.”

이듬해 <오토카>는 라이벌들을 앞질러 다가올 대세를 짚어냈다. 새 모델이 발표되기 5일 전에 로널드 바커와 한 동료가 프로토타입 미니를 뽑아내어 지중해 일대의 마라톤 시승을 준비했다. 세상이 알렉 이시고니스의 작은 기적이 태어난다는 소식을 막 들었을 때였다. 이미 그때 <오토카> 팀은 미니에 짐을 싣고 출발했다. 영불해협을 건너 1만3300km의 대장정에 들어갔다. 

한 달 뒤 미니는 런던에 돌아왔다. 험한 도로를 고속으로 달렸음에도 기계 상태는 놀랍도록 멀쩡했다. 전 구간에서 연비 13.0km/L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그렇게 먼 거리를 함께 달려온 뒤에도 바깥에서 보면 믿을 수 없을 만큼 작다. 실내의 운반용량과 도로에서 큰 차와 같은 거동에 비춰 참으로 경이롭다.” 시승팀의 판정이었다. 그렇더라도 두 기자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도 미니가 50여년 뒤까지 생산이 계속되리라 예상했을까? 혹은 1995년 자동차사 100년의 탁월한 차로 미니가 선정되리라 짐작이라도 했을까 의심스럽다.

 

계측용 5번째 바퀴는 1980년대에 디지털 기어에 자리를 내주었다

뛰어난 편집진이 만든 최고의 잡지

탁월한 재능을 갖춘 편집진이 자동차 잡지계에서 <오토카>의 선도적 지위를 더욱 굳건히 다졌다. <오토카> 기자 중에는 당대의 가장 유명한 고성능 엔진 일부를 설계한 인물이 있었다. 1955~64년에 <오토카> 기술담당 기자로 활약한 해리 먼디를 들 수 있다. 그는 이전에 앨비스, ERA, BRM과 코번트리-클라이맥스(거기서 성공작 FPF 그랑프리 엔진을 설계했다. 이 엔진은 포드가 전설적인 DFV 엔진을 들고 나온 1967년까지 그랑프리를 휩쓸었다)에서 일했다. 해리는 <오토카> 시절에 여러 가지 프리랜서 사업을 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제품이 로터스-포드 트윈캠 엔진. 여러 고성능 클래식의 심장으로 들어앉았다. 개중에도 포드 로터스-코티나가 유명하다. <오토카>를 떠난 먼디는 재규어의 개발기술 책임자로 들어갔다. 거기서 1980년 은퇴할 때까지 엔진 개발을 담당했다. 그들의 출신배경이 무엇이든 <오토카> 필자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자동차와 운전에 관한 예리한 지식과 아울러 업계 최고 지도자 및 기술자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잡지 전체에 열기가 넘친다. 

<오토카> 회장 사이먼 테일러는 1948년(겨우 4살의 어린 나이에!) 이후 이 잡지의 열성적인 독자였다. 1984년 <오토카> 소유주가 잡지를 팔겠다고 밝혔다. 당시의 소유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잡지의 운명을 결정할 잣대를 자동차에 대한 사랑에 두지 않았다. 그보다는 재정담당자 또는 경리직원이 잡지의 운명을 좌우했다. 그때 테일러와 그의 기업 헤이마켓(Haymarket)이 당장 인수협상에 들어갔다. 테일러는 철저한 카마니아. 그의 수집차에는 AC 에이스와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장 아름다운 더비 벤틀리’가 들어있다. 더비 벤틀리는 1937년 최고의 코치빌더 거니 너팅이 이본 드 로스차일드 여사를 위해 만든 걸작이었다. 테일러의 <오토카> 철학은 단순하다. “사람들이 차를 사랑하는 풍토에서 <오토카>는 최대의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여기 있는 어느 누구도 그 진실을 뒤집을 수 없다.”

115년이 넘는 시승경험을 통해 <오토카>는 진정 위대한 차가 무엇인가를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 유럽의 6대 자동차 매체와 함께 해마다 <카 오브 더 이어>를 후원하고 있다. 유럽 20개국의 자동차 저널리스트 55명으로 구성된 국제심사위원단이 대상을 결정한다. 심사대상을 모두 분석한 뒤 5개 모델로 후보를 압축한다. 거기서 최종 수상작을 골라낸다. 

하지만 <카 오브 더 이어>는 해마다 실시하는 시상행사 중 하나에 불과하다. <오토카>가 자동차산업계의 공로자를 기리는 권위 있는 행사는 한둘이 아니다. 런던에서 열리는 시상식은 자동차산업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최상의 축제다. 그때 <오토카>는 한 해 최고의 인물 ‘맨 오브 더 이어’, 최고 메이커, 모터스포츠 인사, 최고 기술자, 대표적인 디자이너, 탁월한 전문 기술자를 표창한다. 그리고 안전, 환경, 기술과 디자인 부분도 빠트리지 않는다. 

12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오토카>는 찬란한 미래를 향해 힘차게 달려간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