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혜의 영화와 자동차- '비뚤어진 집’ 속의 트라이엄프 TR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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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의 영화와 자동차- '비뚤어진 집’ 속의 트라이엄프 TR3A
  • 신지혜
  • 승인 2019.11.06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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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죽음 직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소피아는 사립탐정이 된 찰스를 찾아간다. 옛정에 얽힌 찰스는 어정쩡하게 소피아를 따라나서 대부호 레오니디스의 대저택에 발을 들여놓는다.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주변인 모두는 일단 용의자가 되지만 찰스는 일단 당혹스럽다. 가족구성원도 많을뿐더러 관계도 복잡하고 레오니디스의 직접적 사인으로 알려진 안약(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인슐린과 바꿔치기 된)도 어느 누구의 제재 없이 접근 가능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찰스는 탐정이다. 그리고 이건 소피아의 의뢰가 아닌가. 정신 바짝 차리고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 

그렇게 레오니디스가의 구성원들을 만나면서 찰스는 점점 더 레오니디스의 그림자를 느끼게 되고 그의 큰 영향력 아래에 있던 사람들의 세밀한 균열이 점점 드러나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수사를 할수록 단서를 찾거나 의심이 가는 사람을 찾게 되기는커녕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던 찰스는 그 집안의 막내 조세핀이 자신의 곁을 돌고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 꼬마소녀에게서 찰스는 조금씩 퍼즐조각을 얻게 된다. 그 조각이 어떤 그림을 만들게 될지 알지 못한 채.

추리소설의 대모라 칭할 수밖에 없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대표작 중 하나인 ‘비뚤어진 집ʼ을 영화로 만들었다. 워낙 잘 짜인 플롯과 등장인물들의 밀고 당기는 관계들이 세련되게 그려져 있는 작품이라 영화로 만들기에 오히려 어려운 부분이 많았겠다 싶다. 

문학적 묘사는 때로 영화적 서술로 옮기기엔 지나치게 섬세하고 두 시간 남짓의 러닝타임을 갖는 영화에 모두 다 집어넣으려다 보면 자칫 난삽하고 몰입을 떨어뜨리게 되니 말이다. 이 영화는 다행히도 훌륭한 각색으로 그런 우려를 가볍게 뛰어넘었고,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는 영화 ‘비뚤어진 집’을 관객들의 마음에 각인시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비뚤어진 집ʼ은 통상적인 추리물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찰스의 활약을 중점적으로 그렸다기보다는 오히려 조사과정에서 조금씩 드러나는 각자의 사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부호의 저택에 모여 사는 대식구. 아무런 문제나 걱정이 없어 보이는 그들이지만 모두 자신의 꿈을 마음속에 구겨 넣은 채 살고 있다. 배우인 마그다의 꺼지지 않는 꿈, 사업가인 로저의 꿈, 자유로운 삶을 갈구하는 클리멘시의 꿈, 발레를 향한 조세핀의 꿈…. 이 꿈들은 파편이 되어 레오니디스가의 이곳저곳을 떠돈다. 그 중에서 가장 날카롭고 여물지 못한 꿈은 피할 수 없는 슬픔과 충격이 되어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영화 속에서 눈에 띄는 자동차가 있다. 바로 트라이엄프 TR3A. 아이들의 이모할머니 이디스의 자동차로, 레오니디스가의 자손들을 보살피고 키워온 그의 마음과 태도처럼 군더더기 없이 말끔하고 세련된 차이다. 

날카로운 눈매와 꼿꼿한 자세, 거침없는 시선과 품이 넓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해 온 이디스는 트라이엄프를 몰고 집의 안과 밖을 누비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런 트라이엄프는 누구보다 이디스의 면면을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급히 누군가를 함께 태우고 집 밖을 나서는 이디스의 청을 들어준 것은 아닐까. 조수석에 탄 누군가의 비밀과 그 비밀을 알아버린 이디스의 복잡하고 슬픈 마음과 생각이 가져올 종말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마도 흰색 트라이엄프는 알고 있지 않았을까. 

이디스의 트라이엄프는 이디스가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고 받은 충격을 쏟아내는 공간이었을 것이고 이디스의 복잡한 마음과 생각을 식혀주는 공간이었으며 결국 이디스의 결심과 실행을 돕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초중반까지는 이 흰색 트라이엄프의 역할이 그리 크지 않았지만 종반부로 갈수록 아무에게도 내려놓을 수 없는 마음의 짐을 진 이디스가 온전히 자신의 모습을 내보일 수 있고 모든 것을 함께 정리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트라이엄프는 커다란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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