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혜의 영화와 자동차 - 에린의 차, 포드 크라운 빅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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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의 영화와 자동차 - 에린의 차, 포드 크라운 빅토리아
  • 신지혜
  • 승인 2019.09.27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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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눈을 뜬 여자는 부스스한 머리와 구겨진 옷차림 그대로 느린 몸동작으로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가까운 곳에서는 동료 경찰들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멍하니 풀려 있던 여자의 시선이 숨진 채 엎드린 남자의 목에 가 닿고 그 옆에 떨어진 보라색 염료가 묻은 지폐에 멈추더니 순간 반짝인다. 

지폐를 손에 들고 여자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고 동료 경찰들은 그녀가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피곤하고 짜증난다는 듯이 굴며 여자를 쫓아 보낸다. 여자의 이름은 에린, 경찰이다. 

17년 전 에린은 수사를 위해 조직에 잠복한 FBI 크리스와 접촉하고 함께 위장수사를 맡게 된다. 난폭하고 위험한 조직의 보스 사일러스 때문에 그들의 일상은 위험하고 위태롭지만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한 채 견뎌 낸다.

하지만 그 날, 은행을 털러 갔던 그 날. 차를 타고 떠나기만 하면 되었던 그 시각. 보라색 염료가 가방에서 터지는 바람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사일러스는 은행으로 다시 들어가고 누군가에게 닥칠 위험을 방치할 수 없었던 크리스는 그를 따라 들어간다. 그리고 그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에린의 딸이 16살이 되고 에린은 여전히 크리스의 복수를 꿈꾸고 있다. 그런 에린의 눈앞에 사일러스의 신호가 포착된 것이다. 목 뒤의 문신과 보라색 염료가 묻은 지폐. 

에린은 이제 사일러스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간다. 17년 전의 복수를 위해.

긴 세월을 복수만을 바라보고 달려 온 경찰 에린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 ‘디스트로이어’. 제목 그대로 오랜 시간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사일러스를 추적해 가는 에린의 끈질기고도 일면 무모해 보이는 추적을 그리고 있다. 

그 지루하고도 강렬한 추적에 기꺼이 동참하는 차는 포드 크라운 빅토리아다. 미국의 경찰차로 유명한 크라운 빅토리아는 에린의 정체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차이다. 에린은 경찰. 위험한 잡입수사를 했던 경찰이다. 동료이자 연인이었던 크리스를 눈앞에서 잃고 충격과 분노 속에서 17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왔다. 그런 에린을 대변해주고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은 크라운 빅토리아다. 

크리스와의 유일한 추억이 된 딸은 현실감각 없이 복수의 화신이 되어 버린 어머니와 교류하려 하지 않고 엇나가고 그릇된 행동만 할 뿐이다. 그런 딸을 보며 어이없고 마음이 아프지만 에린은 자신의 감정을 어찌할 수 없다. 에린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크리스가 크게 자리 잡고 있고 에린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사일러스가 각인되어 있으니 에린 스스로가 스스로 끊어내지 않으면, 마무리하지 않으면 절대 끝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에린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에린의 마음을 받아주며 에린과 함께 며칠이고 잠복을 하며 어디든 달려가 준 것은 오직 에린의 자동차 포드 크라운 빅토리아뿐이다. 

동료들이 이제 그만 하라고 말릴 때도, 에린이 나타나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도, 에린이 사건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면 귀찮은 표정을 역력히 드러내며 고개를 돌릴 때도, 에린의 곁에는 크라운 빅토리아가 있었고 그 모든 감정과 행동에서 비롯된 짐을 지고 있을 때 그 짐을 함께 받아준 것도 크라운 빅토리아다. 

에린의 친구, 에린의 동료, 에린의 잠자리, 에린의 조력자인 포드 크라운 빅토리아는 단순히 경찰차 이상의 존재가 됐고 단순히 몰고 다니는 이동수단 이상의 역할을 해 주었다. 

에린이 스스로 디스트로이어가 되어 모든 것을 끝냈을 때 포드는 어쩌면 한숨을 내쉬었을지도 모르겠다. 언제 끝날지 모르던 에린의 복수가 드디어 마침표를 찍고, 회복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던 딸과의 관계에도 이제 비로소 빛이 들기 시작하는, 그 때가 되어서야 포드는 비로소 에린과 함께 짐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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